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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모두 제자학교 학생입니다 (눅 1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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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제자학교 학생입니다 (눅 10:1-20)

1. 우리와 관계 맺는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 들어 있는 두 가지 사명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속에는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

1) 구원에 대한 부르심 -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다. 우리를 예수님의 피에 적셔서 우리를 건져주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과 관계맺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2) 사역에 대한 부르심, 세상을 향한 부르심, 다른 사람을 향한 부르심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지만 하나님은 그곳에서 멈추지 않으신다. 우리에게 어떤 일을 맡기신다. 우리에게 사역을 주신다. 이 세상을 섬기라고, 다른 사람을 섬기라고 우리를 부르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첫 번째 것에만 한정시킨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나를 구원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한다. 나를 죄에서 건지신 것에 대해 목소리 높여 찬송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멈추어 버린다. 이제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그저 신앙을 지키면서 할 일이란 주일에 한 번 교회에 나와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오라”(Come here!)고 부르셨다. “너희들은 나에게 와서 값없이 내가 너희에게 주는 구원을 얻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을 얻고 즐거워하고 노래하고 찬양하고 예배하였을 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셨다. "Go!" (가라)고 하신다. “이제 세상으로 가야 한다. 사람들에게 가야한다. 세상 속에서 나와 함께 걸으며 나를 도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나님은 우리를 가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오라 가라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제자란 무엇인가? 우리를 부르신 주님이 오라고 하셨을 때 오는 사람이고, 이제는 가라고 하실 때 기꺼이 가는 사람이 제자이다. 주님의 명령과 부르심에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제자이고, 제자가 그렇게 살아가는 방식이 제자도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는 그 제자도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달라스 윌라드는 이런 사회적인 현상에 대해서 잘 표현했다. 그는 『잊혀진 제자도』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사람들과 교회는 제자(또는 제자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제자가 되어 제자를 삼으라”했지만 “제자”가 되지 않고도 영원히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있다는 가르침이 교회 안에서 용인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사람, 더 많은 돈, 더 많은 건물, 더 많은 프로그램, 더 많은 교육이 아니라 그 분의 제자(도제, 학생, 배우는 사람)이 되어 인간 실존의 모든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사는 법을 그 분께 배우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고 보여주는 교회는 언제나 위에서 말한 그런 것들(더 많은 사람, 돈, 건물, 프로그램, 교육)이 하나도 없거나 거의 없을 때 최고의 기량을 발휘했다. 비결은 거기에 있다. 그들이 제자가 되었다는 데 있다.

  제자란 그리스도처럼 되겠다는 의지와 그래서 그 분의 믿음과 실천 안에 거하겠다는 의지를 품고, 자신의 일상사를 그 목표에 맞추어 체계적이고 점진적으로 재조정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제자도를 버리면 우리는 내 마음을 채우는 평안, 사랑이 관통하는 삶,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주권에 비추어 매사를 바라보는 믿음, 아무리 낙심되는 상황에서도 견고히 서 있는 소망, 옳은 일을 행하고 악한 세력을 물리치는 능력을 잃는다.” 

  성경은 언제나 제자를 말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 된다. 우리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제자가 될 때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우리는 능력을 발휘한다. 반대로 우리가 제자도를 버리면(제자도를 잃으면) 우리는 편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또한 능력도 잃는다.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2. 무서운 시대

1) 자신을 놀고먹는다고 하는 부모님의 소리가 듣기 싫어서 부모님을 죽인 아들.
2) 삼촌과 함께 살면서 집을 얻을 때 삼촌이 빌려간 돈 안 갚는다고 죽인 조카.
3) 여성 2명 살해당해서 강에서 시신 발견.  범인 세 명은 - “창업하려고 범행”했다고 한다.

너무 끔찍하고 무서운 시대가 되었다. 딸 가진 아버지로서 한숨이 나온다.

  크리스천 극작가 머레이 와츠는 이런 사회 현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이 사회와 문화를 보면서 ‘너무 끔직하다! 폭력, 비윤리, 선정적인 장면들... 이런 장면들을 보면서 아! 세상이 썩을 대로 썪었구나!’라고 말한다. 세상이 썩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먼저 거기에 소금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왜 세상이 이렇게 되었을까? 바로 거기에 있어야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있어야 할 것 대신에 다른 것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이 세상에서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축구장을 사람들이 꽉 메운다. 어떤 가수, 연예인이 간다고 하면 청소년들이 난리가 난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 극성팬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세속적인 것들이 혁명적으로 사회의 각 분야 속에 깊이 침투하고 있다. 그들은 복음을 위협하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왜 복음이 필요한가? 이런 세상에서 복음은 부적절하고 불필요하다!’고 외치고 있다. 기독교 윤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그들이 이 세상 속에서 그들의 전략이 성공하고 있는 이유는,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도록 훈련받고 철저하게 헌신된 제자들을 동원하기 때문이다.”

  세상도 철저하게 훈련받고 헌신된 제자들이 있다.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동원하고 있다. 비가와도 경기장을 찾는 사람들이 있기에 경기장은 꽉 차고, 몇 시간을 기다려도 좋으니 입장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표는 매진된다. 세상은 기독교가 잃어버린 제자의 능력을 오히려 발휘하고 있다.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레너드 스윗이 말한 것처럼 잃어버린 “제자”를 기독교가 빨리 되찾아 와야 한다.


3. 성경 속으로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70명의 제자들을 선택하셔서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는 장면이다. 비슷한 장면이 앞에서도 나온다.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신다(6장). 예수님이 12명의 제자들과 70명의 제자들을 선택하신 이유는 똑같다.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얼마나 큰 사명인가? 그 일과 함께 확실히 보장되어 있는 것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기대와는 조금 다르다.

(3절)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4절) “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고 가라.”
(6절)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에 있으면” (평안을 받을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7절)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주는 대로 먹어. 안주면 굶어.)
(8절)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들 영접 안 할 수도 있어)
(10절) “어느 동네에 들어 가든지 너희를 영업하지 아니 하거든” (영접 안하는 사람도 있어)
(13-15절)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복음을 전해도 거부한 동네들”
      (나도 그랬어! 너희들도 그럴 수 있어!)

  종합해 보면  “고생길이다. 불확실성(어느 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이 있다. 잘 안 될 수도 있어!” 이런 말씀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셨다. 아무 것도 확실치 않고, 고생길이 환한데도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셨다. 저는 주님의 말씀 속에서 깨달은 것들이 있다.

1) 주님은 그렇게 고생길이 훤하고, 불확실성에 붙잡혀 있었고, 복음 전파가 어렵고 잘 안 될 수도 있었지만 어느 것 하나도 실패라고 보지 않았다는 점
→ 주님은 그 모든 것이 다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하셨다.

2) 그런 가운데서 순종했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 70인이 돌아와서 보고한 내용을 보면 귀신이 항복하고,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일들이 벌어졌다.

3) 복음을 위해서 헌신한 제자들에게 주님은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한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20절)고 말씀하셨다.
→ 예수님은 귀신들이 항복하는 기적보다도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어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4. 유태인 대학살 때 살아남은 철학자 엠마뉴엘 레비나스는 타자(나, 자아와 대비되는 개념)의 문제와 우리 삶을 향한 타인들의 요구를 종교의 궁극적인 문제로 보았다. 레비나스는 그 동안의 철학의 제일 목표가 형이상학이었지만 철학적 근본적인 제를 과연 어떻게 살 것이냐? 이 윤리학의 문제로 철학의 수레바퀴를 돌려놓았다. 우리가 천국 문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외칠 말은 “열려라 참깨”가 아니라, 우리가 대답해야할 천국 문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질문은 “너는 누구를 함께 데리고 왔느냐?(너는 누구와 함께 이곳에 왔느냐?)”일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이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은 나와 하나님의 관계의 초점이 무엇인가와 관련이 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초점이 여전히 “나”라면 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다. 그 관계의 초점은 “남”(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믿음은 어쩌면 하나님과 나란히 걷는 것이다. 나란히 걸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나와 함께 걸으며, 나를 도와, 다른 사람을 섬기라. 다른 사람을 사랑해라.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라.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힘들어도 의미 있는 삶을 살아라.”
  제자는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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