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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들 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사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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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사 5:1-7)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일본의 소설가[오에 겐자부로]라는 사람이 쓴<사육>이라는 글이 있는데 그 내용은 한 명의 흑인 병사를 짐승처럼 사육하는 일을 맡았던 소년의 체험을 소재로 한 비극입니다.

2차 대전 때 도시에서 떨어진 산마을에 살고 있던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마을에 커다란 비행기가 떨어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곧 수색에 나섰고, 저녁 무렵 비행복을 입은 흑인 병사를 끌고 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멧돼지 덫으로 쓰는 쇠사슬로 그의 양쪽 발목을 묶고 지하 창고에 가두고는 짐승처럼 사육하게 됩니다. 그리고 소년이 그 일을 맡아서 합니다. 먹을 것을 주고 감시도 하고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멧돼지 덫에 묶여진 흑인 병사의 살갗이 벗겨져 염증이 생긴 것을 보고 너무 불쌍히 여겨서 그를 덫에서 풀어 줍니다. 자유를 주면 혹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도 흑인병사는 도망도 치지 않고 고분고분하게 생활을 합니다. 자유롭게 된 흑인 병사가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게 되자 마을 사람들은 그를 더 이상 지하 창고에 가두지 않고 마을에서 산책하게도 하고 강에서 물놀이도 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오래 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시청에서 흑인 병사를 끌고 오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낌새를 알아차린 흑인병사는 불안을 느낀 나머지 자기에게 자유를 주었던 소년을 인질로 잡고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지하 창고로 내려가게 되었으며, 흑인 병사는 결국 그 소년의 아버지가 휘두른 낫에 두개골이 깨져 죽고 마는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가만히 음미해보면 깨닫는 바가 큽니다. 흑인 병사가 족쇄에 채워져 자유를 잃어버리고 발목에 염증을 일으키며 하루하루를 고통과 신음 가운데 살아가고 있을 때 한 소년의 도움으로 자유를 누리며 살아 갈 수 있었습니다만 시청에서 끌고 오라는 지시에 흑인 병사는 지레 겁먹고 당황하여 자기에게 자유를 주고 먹을 것을 주었던 어떻게 보면 생명의 은인인 소년을 인질로 잡고 난동을 벌이는 배신을 하였고 그 배신의 결과는 안타깝게도 죽음이었습니다.
모든 인류가 죄의 족쇄에 채워져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 수 없었을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믿지 않거나 환경이 나빠지면 지레 겁먹고 당황하여 예수님을 배반하고 조금만 자신감이 생기면 하나님을 의지하기는커녕 교만하여 하나님을 배신하는 역사를 되풀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도 그런 맥락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원하는 바가 있는 농부가 포도원에서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고 탄식하는 이야기인데 결국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채워 주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내용을 봅니다. 한 포도원의 농부가 땅을 팠습니다. 깊이 갈았습니다. 돌을 치우고 거기에다가 극상품의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가꾸었습니다. 거둘 때가 되어 좋은 포도를 기대했는데 심지도 않은 들 포도가 맺혔습니다. 정말 4절 말씀처럼 포도원을 위해서만 모든 것을 쏟아 부었는데 더 이상 할 것이 없을 만큼 포도밭에다가 정성을 다했는데 전혀 엉뚱한 열매가 맺혔으니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최선의 은혜를 주었는데 최하의 열매가 달렸습니다. 이게 될 말입니까? 우리는 때때로 가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혹은 문화적으로 불만도 있고 불평을 늘어놓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생각해 보면 이러면 안 되는 것이거든요.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기에 충분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진실하게 살도록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필요한 은혜를 넘치도록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겸손하게 생각하면 우리의 수고에 비해서 그 결과는 항상 큰 것입니다. 우리의 진실은 부족한데도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주십니다. 우리의 의는 형편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앙적으로도 좋은 열매 맺기에 필요한 최상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내가 정작 들 포도를 맺어놓고는 이런 저런 변명을 합니다. 농부를 탓하고 환경을 탓합니다.

그럼 이제 진리 하나를 생각해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처럼 간단한 진리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내가 심었고 그 심은 대로 내가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십니까? 인생은 어떻게 보면 추수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존경 받고 있다고 생각 되거든 내가 남을 존경하며 살았다고 자부해도 됩니다. 내가 남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내가 사랑받기를 원한다면 그것처럼 맹랑한 이야기가 어디 있습니까? 가만히 보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자기가 심은 것을 거두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지금 내가 받고 있는 이대로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이것을 거둘만한 씨앗을 뿌리지 않았나를 생각해보면 틀림없이 내가 심은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문제 앞에 섰을 때는 내가 뿌리고, 내가 심고, 내가 거두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이 진리만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면 세상은 시끄러울 일이 없습니다. 이 사회를 볼 때 꼭 어둡고 부정적인 면만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 사는 사람만 보면 수고 없이 불로소득 한 것처럼만 보이고 그래서 나도 그러지 못할 일이 어디 있냐는 식으로 한탕주의철학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 저 것 따질 것 없습니다. 누구든지 내게 주어진 형편대로 수고하고 수고한대로만 기대하며"심은 대로 거둔다."는 이 원리가 통하고 이것이 내 생의 철학이 되고나면 이 세상의 어떤 경우에도 무슨 변명이 필요하겠습니까? 모든 것을 근시안적으로 그리고 지극히 인간적으로만 보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보다 멀리 보다 깊이 보게 되면 심은 대로 거두는 것에는 예외가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자, 그런데 문제는 이 진리를 거슬리고 있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포도원에는 들 포도를 맺음이 웬 말입니까? 농부는 분명히 극상품의 포도를 심었건만 어찌하여 이런 들 포도가 맺혔냐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농부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비가 적었던 것도 아니고 거름이 적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정성이 부족했느냐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품의 포도가 아니라 들 포도가 맺혔다는 것은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러니까 상식적으로든 과학적으로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실 이러면 안 되는 것이거든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인의 관심은 포도 열매가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물량적인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입니다. 인생은 질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얼마나 길게 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양질 적으로 사느냐 입니다. 더군다나 신앙은 더욱 그렇습니다. 남을 탓할 일이 아닙니다. 포도원이 농부에게 왜 이런 씨를 뿌렸느냐, 왜 이런 비료를 썼느냐고 할 수가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생과 신앙의 열매는 자신의 문제이며, 깊이 감춰진 죄의 문제가 드러나는 것이며, 오랫동안 해묵은 죄가 오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하나님은 사랑해서 구원하신 이스라엘을 향한 비유적인 이야기입니다만 바로 우리들을 향한 말씀임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셨습니까? 7절에 하나님은 공평과, 의로움과 사랑을 바라셨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심으면서 사랑을 원했고, 공의를 심으면서 공의의 열매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미움의 열매를 맺고, 공의 안에 사는 사람들이 불의의 열매를 맺고, 진리를 바랐는데 거짓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이스라엘만을 향한 말씀이겠습니까?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는 우리의 마음도 옥토 같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거기에 복음의 씨가  뿌려 졌을 때 아름다운 열매가 맺힐 줄로 기대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신앙도 좋은 열매를 맺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열매를 알아보기도 전에 가시덤불이 있고 잡초가 무성합니다. 이제 어느 것이 원 종자인지 알아보기가 힘들게 되었을 지경입니다. 어쩌다가 보이는 열매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아니니 어쩌면 좋습니까? 그런데 누구를 탓 할 것입니까? 누구를 원망할 것입니까? 열매는 내가 맺어놓고 이제 와서 심은 농부를 향해 원망을 늘어놓을 것입니까? 열매 맺을 만한 환경이 좋았느니 나빴느니 할 것이냐 말입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습관은 어떻습니까? 내 인격은 어떻습니까? 내 성품은 괜찮은가요? 더구나 내 신앙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충분한 열매가 맺혔습니까?
한 선교사가 식인종들에게 잡혔습니다. 선교사가 말합니다."당신들은 나를 잡아먹을 모양인데 나를 잡아먹으려면 먼저 내 고기가 맛이 있는지 없는지 맛보는 것이 어떻소?"하면서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자기 종아리의 살을 한 점 잘라내어 추장에게 건넸습니다. 추장은 침을 삼키더니 한 입 썩 베어 물었다가 곧 얼굴을 찌푸리며"퉤-"하고 땅에 뱉어 버렸습니다. 추장은 너 같은 고기는 필요 없다는 듯 그 선교사를 놓아 보냈다고 합니다. 선교사의 한 족 다리는 고무로 만든 의족(義足)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해 전에 그 선교사는 불행히도 사고로 다리 하나를 잘라 냈습니다. 그리고 당시 병원에 누워 있을 때 많은 친구들이 문병하러 병실로 찾아와서는 롬8장 28절의 말씀을 읽어 주었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런데 그때는 그 성경 구절이"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하고 원망했었답니다. 그러나 그 잘린 다리로 인하여 생명을 구할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제야 앞날을 위하여 준비해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잘 못 씨앗을 뿌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계획대로 씨를 뿌리시고 마지막에는 그 심으신 대로의 열매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신앙의 열매는 커냐 작으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많으냐 적으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오직 질적으로 온당하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심어 주신 대로 열매 맺으면서 살아가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우거진 잡초를 다 제거하고 깨끗하고 순결한 포도나무가 되어야합니다. 그리하여 주인의 소원대로 극상품 포도열매를 맺는 포도나무처럼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열매로 맺어가는 신앙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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