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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 (출 13: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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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 (출 13:17-22)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항오를 지어 나올 때에 (19)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20) 그들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1.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 중 열 번째인 장자 죽음의 재앙을 당하여 바로 왕의 장자로부터 감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 그리고 동물에 이르기까지 처음 난 것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는 재앙이 임하자 애굽 전역이 통곡의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어린양의 피가 문지방과 좌우 설주에 표시되지 않은 집은 사망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같이 나라 전역에 내린 엄청난 재앙에 바로 왕은 급히 모세와 아론을 불러 ‘네 백성을 이끌고 이 땅에서 속히 나가라, 양도 소도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몽땅 몰아가고, 각종 금은패물과 의복을 원하는 대로 구하여 가지고 나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감격적인 해방의 기쁨을 안고 애굽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거주한 지 430년 되는 해, 그 해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야곱(이스라엘)의 가족 70명이 고센 땅에 거주하게 한 지 430년의 세월이 흘러 여자와 어린아이를 제외하고 성인 남자만 60만 명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출12:23-38) 여기에다 수많은 혼합 민족들이 함께 애굽에서 나왔으니까 출애굽한 무리는 대략 200만 명이 훨씬 넘었습니다. 이들이 모두 모세의 명대로 고센 땅 라암셋에 모여 꿈에 그리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처음 라암셋에서 남동쪽 50km 지점에 위치한 숙곳을 지나 약 50km 를 더 내려가 ‘광야 끝’에 위치한 에담에 도착하여 비로소 장막을 쳤습니다. 여기까지는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순조롭게 행군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이스라엘 백성을 되돌려 믹돌과 바다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홍해 바닷가에 천막을 치게 하라.”(출14:2) 고 급히 명령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바로의 생각을 미리 아시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끝’에 도착하게 되면 앞뒤로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어 추격하게 되면 손쉽게 사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장자의 재앙으로 크게 두려워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었지만, 이제 이미 재앙으로 죽어버린 장자들을 다시 살릴 수는 없는 지경이고, 더 이상 무슨 재앙이 있겠느냐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준다는 것은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통치권에도 치명적 타격이 될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돌이켜 추격을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친위 전차대와 당시 최첨단의 전차 600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추격에 나선 것입니다.(출14:1-9)

모세의 영도 아래 이스라엘 백성은 앞에 홍해가 가로 놓인 바알스본으로 돌려 그곳에 장막을 치게 되었습니다. 이 홍해 바다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바다를 갈라지게 하여 육지같이 건너게 하신 기적을 베푸신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변심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는 바로의 군대를 홍해 바다에 수장시키므로 바로와 그 군대, 그리고 애굽 사람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자 한 목적으로 이스라엘을 그곳으로 이동시켰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심으로 바로의 군대가 더 이상 추격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출14:31)


2. 이렇게 해서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는 기적, 추격하는 애굽 군대가 수몰되는 하나님의 능력을 목격하게 되었고, 그 길로 지중해변을 따라 가자(Gaza) 지구를 거쳐 가나안으로 향하게 되면 4일이면 약속의 땅에 도착하게 되는 최단거리 지름길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지름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시고 또 다시 돌려 “홍해의 광야 길”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 지중해변은 철기 문화를 배경으로 강력한 무력으로 무장한 매우 호전적인 블레셋 족속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들 블레셋 다섯 족속들은(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가드, 에그론 등) 상호 군사동맹을 결성하여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430년 동안 종살이에 익숙해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투 무기는 고사하고 전쟁에 필요한 체재나 조직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치룰 준비가 전혀 없는 가운데 이들 동맹군 블레셋 족속들과 맞부딪치게 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숨에 가나안을 포기하고 애굽에서 나온 것을 후회하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소지가 아주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시고 6배나 먼 홍해의 광야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 길로 인도하시다.”에서 ‘인도하다’의 원뜻은 위로하다, 동정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주변 환경을 잘 아시고 그들을 위로하면서 인도하셨다는 뜻입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연약함을 깊이 아시고 취한 사랑의 배려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광야 길로 돌리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여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시내산 언약을 이루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출3: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아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이같은 사랑 깊은 배려를 깨닫지 못하고 지름길이 되는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을 고집했더라면, 그들은 후회 막급한 사태를 당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지중해변을 따라가는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지름길일 뿐만 아니라 시원한 바다바람을 쐬어가며 사막도 없이 너무나 편안하고 낭만적인 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같은 편안하고 쉬운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시고 6배나 먼 길로 돌아가는 길, 그리고 물 한 방울 없이 낮에는 너무 뜨거워 그늘이 없이는 도저히 한 발자국도 걸어갈 수 없는 사막 길, 밤에는 기온이 뚝 떨어져 추위에 견딜 수 없는 광야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이렇게 멀고도 험한 “광야 길”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8:2입니다.

(신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광야 길”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며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겸손과 순종을 훈련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을 낮추어 순종해야만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겸손해야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를 낮추어야만 높아질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 가장 뿌리 깊은 죄악은 교만입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교만에서 금단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입니다. 그 교만 죄로 인해 인류에게 저주와 사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망과 저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로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셔서 사람의 모양으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분”(빌2:6-8)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무엇보다 가장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를 낮추는 겸손과 순종의 훈련을 받아야만 합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복을 받고자 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시고 복종하셨던 것처럼 겸손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시기 위해 제일 먼저 겸손과 순종의 훈련을 위해 “광야의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애굽의 왕궁에서 40년을 지내며 자만심과 혈기로 가득 찬 모세를 하나님께서 미디안 광야로 내보내 40년을 지내게 하신 것은 모세로 하여금 철저히 낮아져 겸손한 지도자로 훈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모세를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불러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내라고 말씀하셨을 때,
“(출3:11)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고 겸손함을 보였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게 하는 이적을 보여주시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말씀하셨음에도 모세는
“(출4:10)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라며 겸손해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들어 축복하십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를 높이십니다.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자에게 은혜와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끝까지 겸손하지 아니하면, 훗날 재산이 증식되고 소유가 풍부하게 되어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면, 교만해져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기 때문입니다.

’(신8:11-17) 겸손은 존귀와 축복으로 가는 지름길이지만, 교만은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잠18:12) 교만하면 마귀가 찾아오고 마귀의 종노릇하게 되며, 겸손하면 마귀가 떠나고 성령이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마귀는 겸손한 사람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은 교만한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겸손한 성도가 많은 교회는 모두가 하나되어 부흥하지만 교만한 사람이 많은 교회는 분열되어 흩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겸손하면 마음이 넓어지지만, 교만하면 마음이 좁아집니다. 겸손하면 마음이 밝아지지만, 교만하면 마음이 더욱 어두워집니다. 겸손한 사람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겸손하여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하나님 앞에 내 놓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하게 됩니다. 겸손하여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하여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지함을 하나님 앞에 내 놓을 때,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임하게 됩니다.

“광야 길”은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함께 하지 아니하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길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길입니다. 항상 자기를 낮추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로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함께 하여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신8: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4.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쉽고 편안한 지름길에서 돌려 멀고도 험한 “광야의 길”로 인도하시는 이유는 가나안 축복을 받을 만한 성숙한 백성이 되도록 연단하고 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가나안 땅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입에 그냥 넣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형제들과 부모가 장차 자기 앞에 절을 하는 꿈을 주셨지만, 그 꿈이 이루어져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는 형들에 의해 구덩이 던져져 죽을 뻔하기도 하며, 노예로 팔려가 종살이도 하며,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등 13년 세월의 온갖 시련과 연단이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자신의 고난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 것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팔레스틴 땅에 7년 흉년이 시작되어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에 오게 된 자기 형제들을 보았을 때입니다.(창45:5-8)

(창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 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조선 숙종 임금 때 김학성이란 분이 있었는데.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습니다. 이 분은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가 삯바느질을 해서 김학성과 그 아우를 공부시키고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열 손가락이 다 닳을 정도로 밤낮 없이 바느질을 해야 겨우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지경이었는데. 거기다가 두 아들까지 일을 안 시키고 공부를 시키려고 하니 얼마나 살림이 쪼들렸겠습니까??그런데 비 오는 어느 날, 두 아들은 서당에 가고 혼자 바느질하고 있는데, 낙숫물 소리가 이상해서 유심히 들어보니 어디서 쇳소리 같은 것이 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이상하다 싶어 그 쪽으로 가봤더니 분명히 낙숫물 떨어지는 밑에서 쇠 소리가 나고 있었습니다. 호미로 살며시 후벼 파 봤더니, 그 아래 큰 가마솥이 있고. 솥에는 은전(銀錢)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당시 잦은 난리로 피난을 자주 떠나야했던 어느 부자 집에서 피난을 떠날 때 남몰래 땅속에 묻어두고 떠났던 것 같았습니다. 너무나 뜻밖이었습니다. 가난한 청상과부가 평생 삯바느질해도 벌 수 없는 정도의 엄청난 재물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습니다. ‘삯바느질로 연명하는 팔자도 이제는 끝난 것이 아닌가?’ ‘수절 과부를 불쌍히 여겨 하늘에서 떨어진 복이 아닌가?’ 셋방에서 벗어나 기와집 짓고 평생 일하지 아니하고 두 아들들을 끝까지 공부시킬 수 있는 너무나 많은 돈이 그냥 굴러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돈이 담긴 그 솥에서 한 푼도 꺼내지 않고, 호미로 다시 흙을 끌어와 묻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친정 오라버니에게 부탁하여 그 집을 팔고 다른 집을 구해서 이사했습니다. 그 돈에 관해서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두 아들이 장성하였고, 큰 아들 김학성은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고생한 보람으로 이제 가정 형편도 조금 나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이 늙어 어머니가 임종을 앞두게 되었는데 그제서야 두 아들을 불러놓고 비로소 그 돈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들들이 그 때 그 돈을 취해 얼마든지 편안하게 살 수 있었는데 왜 그러셨느냐고 묻자,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재(財,재물)는 재(災,재앙)다. 아무런 노력 없이 무고히 큰 재물을 얻으면 반드시 뜻밖의 재앙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사람이 나서 마땅히 궁핍한 것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너희들이 어릴 적부터 의식의 안일에 습성이 들면 공부에 힘쓰지 않을 것이요 만약 가난하고 어렵게 자라지 않으면 어찌 재물이 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겠는가. 그래서 내가 집을 옮겨 스스로 단념한 것이다. 내 손으로 번 바느질삯이 노력하지 않고 얻은 만 냥의 돈보다 더 값지지 않겠느냐? 창졸간에 눈앞에 닥친 재물과는 비할 것이 아니다.” 그리고 끝내 돈이 담긴 솥가마니가 묻힌 집을 알리지 아니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장지연의 ‘일사유사’, 逸士遺事)

요즈음처럼 물질만능주의 시대의 가치관으로 보면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한 어머니는 비경제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한 어머니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돈을 그냥 먹기가 꺼린다면 잠시 그 돈으로 재테크에 투자하여 남은 이득을 챙기고 본전 그대로 가져다가 묻어주면 되지 않는가? 돈이 된다면, 그리고 들키지만 않는다면 못할 일이 없다며 사람을 사고파는 일도 서슴지 않는 요즈음 세태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돈이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며 돈 버는 데에는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요즈음 세대에 쉽게 납득가지 않는 여성이라는 것입니다. 부정한 방법을 총동원하여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재산 양도세, 상속세 한 푼 내지 않고 부의 세습을 이루어가는 우리나라 재벌들의 눈으로 볼 때, 어리석은 여인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는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하루아침에 왕에 등극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사울 왕을 하나님께서 이미 버리셨지만, 다윗은 사울 왕의 살해 위협 속에 10여년 동안 힘들고 고달픈 도망자의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사울 왕이 죽었다고 곧 바로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이 아니라 7년 동안 오직 헤브론에서 유다 한 족속만을 다스리는 반쪽짜리 왕으로 지내야 했습니다. 전 이스라엘 민족을 통치하는 왕이 되기까지는 기름부음 받은 후 무려 17년의 시련과 연단이 있었던 것입니다.

(왕상2:11)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된지 사십년이라 헤브론에서 칠년을 치리하였고 예루살렘에서 삼십 삼년을 치리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는 데는 하룻밤이 필요했지만 그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축복의 땅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는 40년의 연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복을 받을 만한 인격과 성품을 갖추지 못하고, 연단을 통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쉽게 그리고 편안하게 받는 복이라면 그 복은 복이 아니라 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쉽고 편안하며 단 시일 내에 도달할 수 있는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이 가까울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시고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인도하신 것입니다. 지름길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지 아니하는 길,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없이도 갈 수 있는 길은 축복의 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광야의 길”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에는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인도하셔서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광야의 길”에는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곳이지만,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오는 기적의 생수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광야의 길”에는 마라의 물처럼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을지라도 단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나타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광야의 길”에는 한 끼 양식을 구할 수 없는 곳이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 생명의 양식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광야의 길”에는 어떠한 질병일지라도 능히 치료하시는, ‘여호와 라파’(Healing GOD), 치료의 하나님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광야의 길”에는 어떠한 대적들도 이길 수 있게 하시는 ‘여호와 닛시’, 승리의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광야의 길”은 비록 돌아가는 길이지만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 축복의 땅에 이르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지 아니하는 길은 비록 가까울지라도 반드시 후회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광야의 길”에서 겸손과 순종을 배우고 익히며, 그 길이 돌아가는 길이라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주야로 떠나지 아니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침내 축복의 땅에 이르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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