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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창조 (사 38:16-20, 딤후 1:7-10, 요 11: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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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창조 (사 38:16-20, 딤후 1:7-10, 요 11:17-27)

오늘 요한복음 11장의 장면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한 집안에 누나 둘이 있고 남동생이 사는 나사로 집안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어떤지는 기록에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당시 상황으로 봐선 아들 하나에 딸 둘만 남긴 집안에서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이 죽었습니다.

이 남동생의 누이 되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죽은 동생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입니다. 성경 말씀에 쓰여서가 아니라 죽기 전에 예수께 달려와서 살려 주십시오 라고 했더라면 조금 더 극적이었을 텐데 이미 죽어서 치마폭에 싸서 무덤에다 묻어 놓고 나흘째가 되는 날입니다.

그때는 완전히 무덤을 덮는 예식입니다. 반쯤 열어 놓고 삼일쯤 있다가 나흘이 되면 시신이 완전히 썩기 시작했으므로 이 무덤을 완전히 봉쇄하고 끝을 내는 장면입니다. 그날 한 가닥 희망을 품고 두 누나가 예수께 찾아와서 죽은 남동생을 살려달라고 얘기합니다.

이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이야기가 요한복음 11장 거의 전체를 담고 있습니다. 근데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는 너무 안됐고 불쌍해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청을 듣고 무덤에 가서 예수께서 무덤을 향해서 죽은 나사로여 나와라.

그랬더니 나사로가 툭툭 털고 죽은 몸이 산몸이 되어 나온 이야기가 요한복음 12장 마지막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 예수께서 마리아, 마르다를 앞에 놓고 한 가지 묻습니다. 사람을 살릴 수도 있는데 살리기 전에 주님께서 하시는 질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나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무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고 두 누이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하고 말했더니 언니 되는 마르다가 대신해서 이렇게 답합니다.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좋다, 그러면 가자. 그리고 무덤으로 가서 나사로여 나오너라. 이 누이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극적인 장면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을 계속 읽어보면 너무 기뻐서 마리아와 마르다 두 누이가 예수님을 식탁에 초대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향료를 바르는 장면이 그 다음에 나오는데 식탁에 초대해서 밥을 열심히 짖는데 식탁에는 예수와 살아난 나사로가 둘이 식탁에 앉아있습니다.

부엌에서는 언니 마르다가 열심히 음식을 장만 합니다. 누이 마리아는 값비싼 향료를 들고 와서 예수님에게 머리에서 발끝까지 향료를 바르면서 감사를 표합니다. 식탁에 함께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상황. 죽었던 자가 무덤에서 나와서 살리신 자와 겸상합니다.

식탁을 죽은 자와 산자가 같이 식사를 합니다. 부엌에서 음식을 마련하는 큰 누나 마르다는 어떤 심정으로 음식을 마련했다고 여러분 생각하십니까. 죽은 동생이 살아납니다. 살리신 그분을 우리 집에 초대했습니다. 두 분이 맛있게 먹고 즐길 음식을 마르다가 장만할 때 그냥 음식 장만 하는 게 아니고 마르다 입에서는 뭐가 나왔을까.

오늘 저희들이 시편을 서로 읽었습니다만 아마 이렇게 했을 것 갔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읊으면서 음식을 마련하실 것 같고, 오늘 이사야 본문을 다시 받으면 주님, 저 누이 된 마르다가 사는 날 동안 주님의 성전 되는 우리 집에서 주님을 찬양하겠습니다. 오늘 음식은 찬양과 기쁨의 음식입니다.

가능하면 맛있게 드시도록 굉장히 신경을 써서 음식을 마련했을 겁니다. 둘째 누이동생은 너무나 기뻐서 평생을 모아서 마련해 두었던 향료를 가지고 옥합을 깨서 이제 예수님께 발라 드리면서 당신은 내 동생을 살려 주셨지만 당신에게 저는 이 향료를 발라서 당신이 앞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일, 썩지 않아야 될 일, 부활하실 일을 제가 미리 예상을 하고 제가 평생 모아둔 향료를 당신께 발라 드리면서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이 장면을 다 종합하면 나사로 가족의 축제, 부활 이후의 축제가 얼마나 아름답고 기가 막혔겠는지 거기서는 어떤 성가가 울려 퍼질지. 세 사람이 하는 기도는 어떤 내용이었을지 제가 상상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의 축제가 오늘 나사로 집에서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거기서 하시는 말씀이 단 한가지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먹고 즐기자. 그리고 노래하자. 그리고 세상을 위해서 봉사도 하고 실컷 살아보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함께 가자. 얼마나 좋은 식탁이었겠습니까?

오늘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예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면서 이 식탁은 나사로 집안만이 아니라 나를 구세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믿는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식탁을 항상 기회 있으면 마련하십시오. 나는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사실은 이렇게 살아난 나사로는 영생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나사로는 무덤에서 나와서 부활했습니다만 다시 죽었습니다. 언제 죽었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예수의 능력은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의 능력은 하나님에게 받은 것 입니다.

죽음이 아니라 질병에서 고침 받을 수도 있습니다. 정신적 고통을 풀고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해서 새로운 인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생명 있는 동안은 부활하지만 영원한 생명은 여전히 유보 되어있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부활했지만 그 부활은 잠시 부활이고 나중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세상에 생명이 붙어있고 삶이 있는 한 여러분은 부활을 경험 할 수 있습니다. 그 극치의 표현은 나사로의 무덤에서의 부활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또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같이 죽어야 합니다.

그럼 언제 죽은 다음에 부활이 있습니까? 예수께서 말씀이 예수님 자신지 십자가에 죽고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신 다음에 부활해 주러 오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와 함께 죽으면 부활의 몸은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을 얻는다. 예수님이 부활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한테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돌아왔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죽을 것도 이기고 부활에 동참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활은 생명이 있는 한 일시적이고 영원한 부활은 아닙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이 땅에 사는 사람인데 우리말을 하고 살아갑니다. 언어로만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는걸 아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배고파 죽겠다. 서양 말이나 우리말은 거기까지는 같습니다. 실컷 먹고 나서 배가 띵띵 부른 다음에 하는 말입니다. 배불러 죽겠다. 사실은 배고파 죽겠다고 하면 많이 먹으면 배불러 살겠다, 해야 되는 게 거기서 또 죽겠답니다.

죽음을 사랑하는 건지 아니면 죽음을 비하하면서 반어법으로 쓰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분통이 나서 정말 못 견딜 때 분통이 나 죽겠다 거기까지는 이해하겠습니다. 문제가 다 해결된 다음에 너무 좋을 때는 좋아 죽겠다. 왜 이렇게 자꾸 죽습니까?

그래서 혹시 우리 사회에 우리 삶 가운데 역사적으로 너무 죽음의 문화가 커서 죽음의 문화를 벗어나지 못하는 건지. 이제 우리 말 좀 바꿉시다. 배고파 죽겠다고 하지만 배가 부르고 좋을 때는 배부르니 삽시다. 좀 삽시다, 하는 얘기도 가져야 하는데 자꾸 죽겠다는 말 같이 쓰지 맙시다.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정말 남동생의 죽음을 보고 우리도 죽고 싶다고 했을 텐데 무덤에서 나온 다음에 죽겠다 하지 않고 먹자, 마시자, 기도하자, 찬송하자,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저는 우리한테 부족한 것이 뭐냐 하면 배고픔을 이겨내는 것까지는 잘 하지만 배고픔을 이겨낸 다음에 배부를 때 우리는 진심으로 축제가 있습니까? 감사의 찬양이 있습니까? 우리가 다 의욕적으로 살긴 삽니다만 너무나 감사와 축제가 모자란 것 같습니다.

어려울 때는 간절히 기도하지만 어려움이 해결되고 나면 그냥 감사 없이 떠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 하신 것 같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죽음이라 이름 하는 고통의 극치를 다 벗어나고 싶어 하는데 벗어난 다음에 너희들은 뭐하느냐.

너무나 어려웠던 시절 벗어나서 지금은 상당히 그래도 배불리 먹고 사는 시절에 왔는데 이렇게 배불리 먹게 해주었더니 또 죽겠다는 옛날로 돌아가는 거냐 아니면 함께 살겠다고 도우며 살겠다고 노력하는 거냐? 저는 오늘 우리가 들을 말씀이 이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 죽는데 너무 신경 쓰지 마시구요 삽시다. 기쁘게 한번 삽시다. 즐겁게 축제 하며 사십시다. 살아서 나를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주님의 말씀을 믿으면 삶이 붙어 있는 한 한번 좋아서 기뻐서 축복 속에 살아갑시다.

근데 사는 것은 나사로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나사로가 살았더니 누이들이 와서 동네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불러놓고 함께 축제를 벌입시다. 신앙이란 뭐냐 하니까 저한테 구원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 진실로 감사합니다.

이제는 즐기겠습니다. 이제는 베풀겠습니다. 이제는 뭔가 위해서 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뜻입니다. 산사람은 베풀어야 합니다. 산사람은 즐거워해야 합니다.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 믿는 목적이 뭐냐고 물으면 모든 신조나 신앙 고백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이 말을 잘못 해석하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하나님께 드린 영광이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정당행위로 될 수 있습니다. 나사로 얘기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나사로는 죽었다 살아나서 너무나 감사하는 말씀이 하나님께 영광을. 제가 산 것은 저의 기쁨이지만 하나님껜 영광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드린 영광이 뭡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드리는 겁니까? 일을 하면서 생각하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그 말을 오늘 예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자녀들을 돌보아 주십니다.

자녀들은 아버지에 대한 보답을 영광 돌리는 방식으로 합니다. 여러분도 자식 두셨지요. 자식들 보고 아버지의 진실 된 어머니의 진실 된 도움과 사랑을 받았으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라.

자식들 말이 우리 부모님의 영광을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겁니까? 고마움에 대해서 아부하는 것을 여러분 영광 받은 걸로 생각하십니까? 아버지 어머니를 비판 하는 것을 영광 받은 걸로 생각하십니까?

최대의 부모의 영광은 자식이 잘 되는 겁니다. 자식이 못되면서 아버지한테 와서 영광을 돌립니다. 가식입니다. 자식이 자기 삶을 유지하지 못하면서 아버지 고맙습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그것은 가식입니다. 너무 아부 입니다. 그리고 무례합니다.

진실 된 영광은 진실 된 부모에 대한 예의는 진실 된 공경은 아버지 어머니가 주신 사랑에 힘입어 저는 이렇게 행복합니다. 자식의 행복을 보고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시지 자식의 불행을 보면서 어떤 아버지 어머니가 영광을 받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옳은 일이지만 우리 이렇게 결단 하십시다.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서 성실하게 살아가야 하나님이 영광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실하게 살아야 하나님이 영광 받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 중에 성탄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한테 구세주로 오셨는데 누가복음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가 오셔서 우리는 너무나 기쁩니다. 이 기쁘다는 말은 하나님께는 영광이고 영광 받으신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이 내 영광은 바로 그대들에게 있는 구원과 사랑과 정의와 자유와 신앙과 모든 것을 합한 평화이니라.

세상이 불편하고 평화가 없는데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평화를 누릴 때 영광을 받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들이 행복하고 평화를 누리면 저 부모는 영광을 받습니다.

오늘 나사로와 두 누이 마르다, 마리아는 모여서 이렇게 얘기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런 엄청난 축복을 주셨구나. 우리가 잘한 행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와 계획 속에 이 일을 주셨구나 하고 감사했습니다.

나사로와 마리아 마르다의 고백입니다. 우리의 행실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준 게 아니고 하나님이 본래부터 살려주시려고 계획하셨고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구나. 이것을 우리가 신학적으로 예정론이라 이름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멸망시키려고 계획하셨거나 구원하시려고 계획하셨다고 믿으시면 그 믿음에 대한 고백을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예정론은 하나님이 우리를 미리부터 계획하신 것은 제가 죽음에서 살고 보니, 고난에서 살고 보니, 모든 악을 이기고 제가 승리하고 보니, 그때 비로소 제가 느끼고 감격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본래부터 나를 예정하셨구나. 그 예정은 본래부터 운명처럼 주어진 게 아니라 제가 감사와 찬양의 축제를 할 때 나오는 결과의 산물입니다. 옛날 신학하신 분 전 세계 흩어졌던 모든 예정론을 믿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므로 제가 잘하든 못하든 하나님의 예정에 맡깁시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예정은 그러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마치 제 자녀들의 복과 축복이 있을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듯이 하나님의 예정은 제가 감사할 수 있을 때, 진실로 하나님께 감사의 축제를 드릴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예정이 확인될 뿐입니다. 예정을 운명으로 바꾸지 마십시다.

인도에 가보면 힌두 문화가 되겠지만 인도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를 얘기합니다. 세상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세상을 올바로 살고 가치 있게 사느냐. 삶의 규칙, 삶의 철학, 삶의 원리를 우리가 잘 들어서 아실 겁니다.

따르마. 그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자기 자유의지를 가졌고 우리가 살아야 되는 따르마가 훌륭해야 인간사는 행복 있고 복됩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따르마 라고 하는 자기 자율의지의 소산만이 아니라 자기 전생이 만들어놓은 업보가 있습니다. 그 업보를 카르마 이렇게 말합니다. 두 축입니다.

따르마로 인생을 살아가십시다. 동시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적 삶이 있는데 전생이 만들어 놓은 업보 카르마가 있습니다. 인도에 가면 따르마와 카르마가 50대50입니까 물으면 사람들 생각에 카르마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전생의 업보. 오늘 예수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따르마는 우리에게도 있다. 이 세상에서 주어진 삶을 최대한 확실하고 분명하게 살아가십시다. 카르마는 없다. 카르마는 전생의 업보가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카르마는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하나님의 은혜인 카르마하고 우리가 해야 할 따르마하고 합해야 할 것이 우리 신앙 고백이다. 우리는 그래서 전생의 업보 때문에 우린 구원받는 게 아니고 운명이 아니고 이제 하나님은 스스로의 삶을 즐기고 축제를 벌이는 사람들에게 본래부터 하나님의 계획과 은총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는 응답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이 땅에서 우리가 받은 은총을 감사한 마음으로 가져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떡 줄 사람 생각도 안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

서양 사람들은 이 말을 이렇게 하는 것 같습니다. 알이 부화하기 전에 병아리 세지 마라. 떡 줄 사람인 하나님은 제가 미리 예정됐다고 김칫국물 마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은 지금 떡을 만들라.

하나님이 주신 은총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아주 감사하게 살면서 감사의 축제를 드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떡을 주신다. 하나님의 영광은 운명처럼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아주 참되고 복되게 살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는 진실로 복되게 살기를 저는 바랍니다. 그럼 하나님은 그렇게 살 때 그렇게 찬양할 때 내가 너를 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겠다고 우리한테 말씀하십니다.

찬양하는 삶, 감사하는 삶속에 하나님의 은사를 경험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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