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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관심은 어떤 관심일까요? (눅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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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관심은 어떤 관심일까요? (눅 15:1-7)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한마디로 말하면 “내 욕망이외의 모든 것에 무관심하기로 작정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은 자신의 욕망과 편리외에는 아무 관심없이 살면서도, 역설적으로는 이 세상은 아무도 내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있다는 현실 때문에 처절한 외로움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 세상 아무도 너에게 관심이 없어도 나만은 너에게 관심이 있다”라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와 내 이웃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어떤 관심일까요?

1.개인적인 관심입니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극도의 개인주의의 시대이면서도 오히려 개인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라는 인간이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숫자로 기억되어야 하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402동 503호집 사람, 4954자동차 주인, 063-857-5606 전화번호를 쓰고, 주민등록 번호 끝자리 0000000, 이 숫자들은 다 “최창훈”이라는 존재를 나타내는 숫자들입니다.
그런데 만일 제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다든지, 전화를 바꾼다든지, 제가 세상을 떠나든지 하면 이 모든 숫자는 저와는 아무 상관없는 숫자가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 속에서도 우리를 끝까지 잊지 않으시고, 우리를 숫자가 아닌 이름으로 부르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우리를 구원하고자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지금 본문에서 “아흔 아홉마리의 양을 두고 잃은 양 하나를 찾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무 양이나 하나 찾아 대체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4절을 보면 앞에 “그”라는 정관사를 붙여 “잃은 양”을 찾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설교로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느날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이 가기를 꺼려하던 사마리아 길을 가신 이유는 수가성의 한 여인을 찾기 위해서였고, 그가 어느날 여리고 길에서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셨던 이유는 삭개오라는 한사람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이토록 철저하게 개인적인 관심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사람을 만나실 때에도 민족의 반역자가 아닌 친구 삭개오로, 썩은 냄새를 풍기는 죽은 시체가 아닌 살아 있는 친구 나사로로, 욕심부리다 귀신들린 더러운 여인 막달라 마리아가 아닌 사랑하는 친구 마리아라고, 각 자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지금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이웃들에게 우리이상의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우리이상의 사랑을 갖고 사랑하십니다.
그는 우리가 구원하고자 하는 이웃들이 구원받는 것을 우리 이상으로 보고 싶어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관심은 철저하게 개인적이라는 것입니다.


2.집중적인 관심입니다.

4절을 보면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여기 “찾는다”는 단어가 중복되어 사용된 것은, “반드시 찾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예수님의 집념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는 것은 예수님의 존재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을 아침에도 찾고, 점심에도 찾고, 밤에도 찾고, 우리에서 찾고, 골목에서 찾고, 거리에서 찾고, 들에서 찾고, 동네에서 찾고, 시장에서 찾고, 직장에서 찾고, 어제도 찾았고, 오늘도 찾고, 내일도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관심 때문에 어느날 저와 여러분이 예수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 한사람을 찾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고, 친구를 보내셨고, 목사님을 보내셨고, 선교사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령으로 내 마음을 두드리며 찾아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은 나를 찾는 일이셨기 때문입니다.
눅19:10절을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야망은 나 같은 죄인 한영혼을 찾아 구원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건축을 하면 성도들이 위축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보다도 가장 위축을 받는 자는 담임목사입니다.
최근에 저는 개인기도 시간에 성전건축을 위해 기도하던 중, 갑자기 얼마 전에 읽었던 구세군 창설자인 윌리암 부츠의 이야기가 생각나면서 마음에 큰 평화를 경험한 일이 있었습니다.
윌리암 부츠는 그가 하는 구령사역과 복지사역이 확장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초청을 받았습니다.
이때 그의 참모들은 여왕의 도움을 받을 기회라고 기뻐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윌리암 부츠를 만나 그가 경영하는 복지사업의 업적을 칭찬하면서 “내가 도와줄 일이 있겠는가?”라는 말했습니다.
이때 그는 여왕에게 “전도자에게 잃어버린 영혼의 구원말고 무엇을 구할 일이 있겠습니까? 더 많은 영혼을 제가 구원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여왕을 만나고 나온 그에게 참모들이 그 좋은 찬스에서 “왜 여왕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느냐”고 질책하며 묻자 그는 말하기를 “우리가 주님의 유일한 관심을 이행한다면 나머지는 그분이 책임지시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과 우리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가장 큰 관심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의 집중적인 관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혼 구원하는 일에 집중하면 나머지 우리교회의 필요한 모든 것은 주님이 채우실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집중적 관심에 우리교회의 관심도 집중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해피데이 1028를 눈앞에 두고, “한 영혼을 두 팔로” 섬기기를 결단하며 전도에 집중하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모든 관심이 이 일에 집중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에게 관심은 무엇일까요?
잃은 자식을 찾는 한가지 관심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먹는 시간에도, 일하는 시간에도, 자는 시간에도 자식을 찾는 일에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밝히는 목자의 관심이요, 예수님의 관심이요, 하나님의 관심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지속적인 관심입니다.

본문 내용의 결론은 “목자가 드디어 양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이야기가 끝납니까? 아닙니다.
5절을 보면 “찾은 후 즐거워하며 목자는 이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 와 잃은 양을 찾은 감사의 잔치”를 열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에 매주마다 여러분의 전도를 통해 불신자뿐만 아니라, 전에 믿다가 낙심한 많은 낙심한 자들이 주께 돌아오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 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외면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그들이 낙심했을까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어쩌면 먼저 믿은 우리들의 그들을 향한 관심이 일회용 관심, 혹은 짧은 관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무책임, 무관심의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본문에 말씀하시는 목자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저는 지난 주 이 말씀을 묵상하며 어깨에 양을 메고 두 다리를 잡고 돌아오며 목자는 사랑스런 음성으로 아마 그 양을 향해 “난 이제 너를 놓을 수 없어. 넌 내꺼야. 내 집을 절대로 떠나지 않게 할거야”라고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목자의 집요하고 지속적인 관심, 이것이 하나님의 관심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품을 떠난 낙심한 자들이 돌아올 때까지 다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예수님이 말씀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당시의 바리새인들 때문이었습니다.
1-2절을 읽겠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예배에서 어떤 기도를 하고 있었는지 아십니까?
눅18:11을 보면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신들이 세리나 죄인들과 같은 삶을 살지 않고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뽐내고 자랑하며 고백”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책임을 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인들이 돌아오면 받아는 주겠지만 그들이 돌아오도록 그렇게 찾아 나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예배는 자신이 선민이라는 자만심이 고백되는 예배였고, 영혼의 구원의 기쁨이 없는 예배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예배와 기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믿지 않는 이웃들을 초청하고, 그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고 기뻐서 얼싸안고 춤추고 기뻐하는 잔치여야합니다.
  그것이 하늘나라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오늘 우리의 진정한 예배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저는 그런 기쁨을 우리교회의 예배 안에서 회복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 하나님의 관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들을 찾기 위해 세워진 하나님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양들은 종종 마을 공동체의 소유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마을 사람들은 양이 실종되었을 때, 공동의 노력으로 찾았고 그 양을 찾으면 잔치를 벌려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연합하여 우리의 잃어버린 이웃들을 찾아 해피데이 10월 28일에 있을 새생명 축제를 위해 먼저 태신자를 작정하고 지속적으로 전도하여 교회로 초청합시다
그들은 과거에 교회를 다니다가 낙심한 이웃들일수도 있습니다.
교회와 상관없이 인생을 살아온 이웃들일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가족과 친지들일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같은 아파트 이웃들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집에 우유, 식품 배달하는 이웃들 일수도 있습니다.
거래처의 이웃들일 수도 있습니다.
나이가 많으신 동네 양로원에 놀러오시는 어르신 이웃들 일수 있습니다.
학교 선후배가 우리의 이웃들 일수도 있습니다.
이 시간 그들 가운데 당신의 마음에 지금 부담으로 다가오는 이웃들이 누구인지 기도해 보십시오.
그가 바로 당신과 내가 찾아야 할 바로 그 양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주님의 심정으로 그 잃은 양을 찾아 천국을 유업으로 받게 하는 축복의 통로인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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