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구원의 하나님 (시 3:1-3)

  • 잡초 잡초
  • 291
  • 0

첨부 1


구원의 하나님 (시 3:1-3)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표현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닛시, 이레, 샤파와 같은 것들입니다. 여호와 닛시, 여호와 이레, 여호와 샤파라고 하는데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앞서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 치료해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 모든 표현을 하나로 정리하면 그것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을 한 마디로 표현하고 정의한다면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성경 66권에 기록되어 있는 정말 수도 없이 많은 말씀들을 한 문장이 아닌 한 단어로 정리한다면 그 또한 구원입니다. 말씀의 의도가 구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시든지 우리를 구원해 내고야 마시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도는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교회를 상징하는 표로서 십자가를 내 겁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두말 할 것 없이 구원입니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시고, 우리 기독교가 구원의 종교라는 말씀 속에는 전제 되어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고난과 역경 그리고 실패와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죽음과 고통 그리고 실패와 좌절로 가득 차 있지 않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그러하고 우리가 그와 같은 세상 속에서 죽게 되었으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께 이렇게 탄원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대적이 많은 곳,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은 곳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세상의 문제는 고난이 많은 것만이 아닙니다. 그 고난의 때로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절망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3편은 다윗이 반란을 당하여 피난 가면서 쓴 시편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치는 자가 많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윗을 치는 자가 많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 자기를 반역한 자가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피난은 원수에게 반역을 당하여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에게 반역을 당하여 생명을 부지 하겠다고 피난을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하여 사람들은 다윗에 대하여 절망적이었습니다. 다시는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당연한 판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은 그와 같은 사람들의 생각을 본문 2절에서 하나님께 아뢰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이와 같은 일을 당할 수 있는 곳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수도 없이 당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고난은 죄가 없어도 당할 수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죄인만 고난을 당한다면 이해가 됩니다. 물론 세상에 죄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자신이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에 대하여는 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죄가 없는데도 고통은 당하는 것은 세상 때문입니다. 세상에 죄가 관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류가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전체가 죄로 오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죄의 삯인 사망으로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 말 할 것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불교적인 용어이지만 고해(苦海)입니다. 얼마나 세상을 사는 것이 고통스럽다면 세상을 고통의 바다라고 표현을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상에서 실패하고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는 것과 같은 고난을 당하고  죽음의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에서 당하는 말도 못할 고난과 역경과 좌절 속에서도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고 흥분하지 아니하고, 분노하지 아니하고 얼마든지 나에게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고난이 줄어듭니다.

저에게도 힘든 일이 있습니다. 많습니다. 저에게도 문제가 수도 없이 생깁니다. 그러나 저는 저에게 힘든 일이 생기고 문제가 생기는 일을 당연한 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울 때에 좀처럼 흥분하지 않습니다.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고 세상엔 언제나 문제가 있는 것이고 사람은 누구나 다 부족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문제를 당하게 되면 흥분부터 합니다. 분노부터 합니다. 절망부터 합니다. 그것은 문제보다 더 큰 문제입니다. 흥분하면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분노하고 절망하면 점점 더 문제 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됩니다. 결국 문제를 풀지 못합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보편적인 문제입니다.

흥분만 하지 않아도, 분노만 하지 않아도, 절망만 하지 않아도 세상 문제의 절반은 해결한 것입니다. 저도 사람에게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힘들 때가 있습니다. 잠시는 분노하고 잠시는 흥분하고 그러지만 제가 언제나 내리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사람이 그렇지 뭐. 그럴 수 있지 뭐. 나는 안 그런가 뭐’

문제하고만 싸우기도 벅찬데 새로운 문제까지 만들면 도저히 이길 수 없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에 문제가 있는 것이 뭐가 문젭니까? 타락하고 범죄한 세상에서 살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가라고 절망하고 분노하고 흥분하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일부러 자초하여 문제를 만들 것은 없으나 문제를 만나게 되면 올 것이 온 것 뿐이라 생각하시고 냉정을 유지하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자세가 될 것입니다.

흥분하면 하나님께 대해서까지도 분노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나에게 이러실 수 가 있어?’ ‘하나님이 계시긴 계신거야?’ 그렇게 되면 문제는 더 꼬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은 책임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문제는 다 우리 때문입니다.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를 풀어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고 하시는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하고 분노하고 흥분한다면 도저히 문제는 풀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을 문제를 만드신 분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모든 문제를 풀어 주시려고 언제나 우리 곁에, 문제 곁에 계시는 분으로 이해하는 것이 믿음이고 그 믿음이 결국 문제를 해결하고 그 믿음이 결국 우리를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바로 그 믿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여 몽진을 가고 있을 때 다윗을 향하여 이제 저는 더 이상 하나님의 도움을 얻지 못할 사람이라는 절망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솔직히 자신에 대하여 희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이 압살롬을 피하여 몽진을 갈 때 맨 발로 머리를 숙이고 울면서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다윗이 처한 삶의 자리였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습니다. 다윗의 믿음이 놀랍습니다. 시편 3편은 제가 다윗의 시편 중 가장 좋아하는 시편 중에 하나입니다. 다음과 같은 표현이 너무 기가 막힙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3절) 맨발로 머리도 들지 못한 채 울면서 가면서도, 사람들의 절망적인 수군거림을 들으면서도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그리고 계속되는 말이 정말 대단합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 하리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꺽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편의 정말 대단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다윗이 이와 같은 어려움을 당하게 된 까닭이 세상 때문이 아니라 다윗 자기 자신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들에게 반역을 당하여 망신을 당하고 피난을 가게 된 까닭이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는 죄를 지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도 그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기 죄를 모르는 뻔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시편 51편을 보면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후 그것을 책망하는 선지자 나단 앞에서 하나님께 자복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개의 시중에 단연 최고의 시라고 할 수 있는 시편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 3편을 보면 다윗은 참 뻔뻔해 보입니다. 자기 죄를 모르고 마치 자기 죄를 모르는 사람처럼 당당합니다.

저 같으면 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해 내려가면서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라고 못합니다. 저 같으면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라고 못합니다. 죄를 지어 하나님께 맞으면서 자기를 주의 백성이라고 감히 하나님께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회개는 회개고 믿음은 믿음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율법적인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자식이기 때문에 율법을 주시는 것이지만 율법을 지켜야만 자식으로 인정하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율법을 어기면 징계하시고 채찍질 하시지만 자녀이기 때문에 징계하시고 채찍질 하시는 것이지 율법을 어김으로 자식이 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채찍질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지금 죄를 지어 하나님께 맞고 있지만 자기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받아야 할 마땅한 복 구원의 복을 하나님께 당당히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우리의 소망은 죄인까지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죄인 중에 죄인이라고 할 수 있는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실 수 있느냐라고 사람들이 수군거릴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참 기가 막힙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사람에게 의원이 필요 있느니라. 인자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을 살다면 수도 없이 많은 문제를 만납니다. 어려움을 만납니다. 때로는 죽을 것만 같고, 차라리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해 보일 때도 많습니다.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적인 자리에 처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구원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구원은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버려도, 세상은, 사람은, 친구는, 혹시 부모는 우리를 버릴 수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 세상의 유일하신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구원하시겠다고 벼르고 계시는데 칼을 갈고 계시는데, 세상과 사탄을 향하여 소리치고 계십니다. 거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편의 결국을 압니다. 결국 다윗의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다윗의 믿음대로 다윗의 머리를 들어주셨고 다윗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을 믿으면 다윗처럼 우리의 머리를 들어주시고 우리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다윗의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설교 중 여러 번 반복하였던 예화를 말씀드리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박찬호 선수가 메이져 리그에서 5승인가 3승인가를 올렸을 때 아이들이 녹화 해 준 테잎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박찬호 선수가 승리한 게임이었는데 초반에 컨디션이 좋지 못했습니다. 볼 컨트럴이 되지 않아 많은 공을 던져야만 했으며, 만루 핀치에 몰리기도 하고 어느 회였는가는 홈런을 맞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을 중계 방송하는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절망적인 맨트와 해설을 남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천하태평이었습니다. 저는 박찬호 선수가 이긴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긴 게임인데 초반에 만루 핀치 좀 당하면 어떱니까? 홈런 봄 맞았다고 절망할 것 있습니까?

저는 그 녹화 게임을 보면서 저것이 마치 우리의 인생과 같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나의 인생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내 인생의 9회 말에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 얻었는데, 결국 승리할 것인데 사는 동안 핀치에 좀 몰리면 어떻습니까? 만루 홈런 좀 맞으면 어떻습니까?  제가 뻔히 박찬호 선수가 이긴 것을 알면서도 녹화 테잎을 보다가 컨디션이 좋지 못하여 좀 몰린다고 흥분하고 절망하고 낙심하여 텔레비전을 꺼버렸다면 저는 미친 사람아닙니까? 제 정신인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려운 일만 생기면 죽는다고 낙심하고 흥분하고 절망하는 여러분 정상이십니까?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나 우리 곁에서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하든지 거기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으심이로다. 천만 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언제나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으로 언제나 세상에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