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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사랑 (눅 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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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랑 (눅 7:11-17)

영국의 유명한 성경주석가인 매튜 헨리 목사는 지금부터 약 300년 전의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은 눈물의 골짜기이며 곡하는 장소다.”

나는 직책상 장례식장에 자주 출입하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을 한 가지 발견하게 되는데 노인이 죽은 상가에는 눈물이 말라 있고, 젊은이가 죽은 상가에서는 통곡과 함께 피눈물이 흐른다는 것이다. 모든 죽음은 슬픈 것이지만 어떤 사람이 죽었느냐에 따라 눈물의 양과 질이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 여인이 바로 피눈물의 주인공이다. 남편 없이 사는 것만도 서러운데 젊은 아들이 갑작스럽게 죽고 말았다. 그 아들은 과부의 유일한 낙이자 소망이었다. 괴로워도 아들을 보면 위로가 되고 살 용기가 생기곤 했을 것이다.
“내가 너 때문에 산다.”

분신과도 같은 아들의 죽음은 이 여인의 삶을 순식간에 인생의 가장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웃들의 위로가 별로 도움이 안된다. 그리고 별로 할 말도 없다.

장례 행렬이 조용히 침묵 속에 나인성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그 성을 향하여 들어가시다가 이 장례 행렬을 만나게 되었다.

(눅 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예수께서 시신을 묶은 관에 손을 얹으시고, 죽은 청년을 향하여 말씀하셨다.

(눅 7:14)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어떻게 됐을까요? 시신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곳에 모여 있던 많은 사람들의 입이 벌어졌을 것이다.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눅 7: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그리고 순식간에 이 소문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이것이 오늘 사건의 줄거리이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몇 가지의 중요한 교훈의 메시지가 있다.


1.인간 존재의 비애를 깨닫게 한다.

아담 이래 시작된 인간의 비애는 끊임이 없다. 아담의 범죄 이후 얻은 두 아들 중 둘째 아벨을 잃었을 때 그 어미 하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것도 자신의 속에서 나온 큰 아들이 동생을 죽인 그 사건을 보고 통곡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인간 속에 죄와 죽음이 들어온 이후 인간의 비애는 인간 속에 항상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라는 여인도 인간의 비애를 뼛속 깊이 체험한 사람이다. 유대지방에 가뭄이 들자 남편을 따라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지방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남편을 잃었다. 그리고 얼마 후 두 아들을 결혼시켰다. 그런데 두 아들을 순서대로 잃고 말았다. 한 집안에 과부들만 셋 남은 기구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나오미는 빈손으로 고향으로 돌아온다. 사람들은 위로하며 그를 맞이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룻 1: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나오미란 이름의 뜻은 “기쁨, 희락”이란 뜻이고, “마라”란 말은 “괴로움”이란 뜻이다.
이 인간의 비애는 권력자인 왕이라고 피해가지 않는다. 다윗왕의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었을 때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삼하 18: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우리는 언제든지 이 과부 여인과 같은 일을 당할 수 있다. 나오미나 다윗왕과 같은 그런 입장에 놓일 수가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슬픔과 고통이 우리를 피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비애다. 시편 기자가 이렇게 노래했다.

(시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2.인간 존재의 연약함을 깨닫게 된다.

(눅 7: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이 말씀에 보면 그 장례 행렬에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다할지라도 그 여인이 당한 슬픔과 고통을 덜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 아들이 죽는 순간 그 어미의 삶도 멈춘 것이나 다름 없다. 아들이 삶의 유일한 소망이었던 과부에게 아들 없는 삶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어떤 위로의 말도 그 여인의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지난 주 토요일 아프간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배형규목사의 장례식이 분당 샘물교회당에서 있었다. 신문에 오열하는 박은조목사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 분은 이 모든 일에 책임을 안고 교회 앞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사직서가 배형규 목사를 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담임목사로서 유족들의 슬픔과 고통을 덜어줄 방법이 없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인 것을 깨달았기에 더더욱 절규했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참으로 약하고 무력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슬픔을 당한 유족들을 향하여 뭔가 위로해 주고 싶고 슬픔을 덜어주고 싶지만 도움이 되질 않는다. 기껏 할 수 있는 말이, “세월이 지나면 괜찮아질거예요.”

그렇기에 자식이 먼저 가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 않는가! 그 슬픔 그 아픔을 다른 사람이 덜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럴 때 더욱 더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게 된다.


3.만남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만약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여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장례는 그대로 진행되었을 것이고 젊은 아들은 흙 속에 묻혔을 것이다. 그 여인의 사는 동안 그녀의 눈에서 눈물 마를 날이 없었을 것이다.

가장 불행한 순간 예수님을 만난 것은 그 여인에게 일생일대의 행운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목적지는 나인성이었다. 마치 그 여인을 만날 계획이라도 세우신 것처럼 나인성을 향하여 나가셨다.
(눅 7: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찾아 가신 것이다. 예수님은 나인성의 과부뿐만 아니라 오늘날 고달픈 인생길을 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찾아 오신다. 만나 주시기 위하여... 그럼 그 분은 어떤 분이신가?

1)위로자
인간의 동정은 단순한 동정으로 끝나고 아무런 도움도 베풀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제가 목회자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더욱 절감하는 것이다.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하고,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고통받고 싶은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위로는 효력 있는 위로다. 예수님은 울고 있는 그 과부를 보실 때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고 그 여인을 향하여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울지 말라”고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은 그 여인의 슬픔을 멈추게 할 수 있는 효력 있는 위로의 말씀이었다. 때때로 우리는 사람의 위로가 필요하다. 그러나 너무 기대하지는 말라. 예수님 그 분 만이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실 수 있다.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

2)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분
(눅 7: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은 자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명령할 수 있는가? 16절에서 모여 있던 무리들이 이렇게 외쳤다.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구약시대의 큰 선지자인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엘리야보다 엘리사보다 더 큰 선지자이시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생명의 주관자가 되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체휼하신 분이신 동시에 사람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참 하나님이시다.

3)참사랑의 주인공이 되시는 분
(눅 7: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오늘의 말씀은 과부 여인의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내린 결론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라는 것이다.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것을 통해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 돌보심은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나타난 것이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팔레스틴 유대땅, 그리고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 기간도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반의 짧은 기간이 아니다.

이 세상에 숨쉬고 있는 모든 인생들을 향하신 돌보심이다. 그리고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주님은 슬픔과 탄식 속에서 방황하는 인생들을 만나 주시기 위해 찾아오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솔로몬왕의 고백처럼 인생은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인생들이 목숨 걸고 얻기 위해 쫒아다니는 재물과 명예와 권력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여러분의 분주함을 잠시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기 바란다. 무엇 때문에 그리도 분주하게 다니고 있는가? 어느 날 갑자기 닥아온 인생의 불행 앞에 우리는 당황하게 될 것이고 깊은 고통과 슬픔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원망하고 절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낙심치 말아야 할 것은 나인성 과부를 만나주신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만나주신다는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만남은 중요하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인생의 진로가 달라진다. 좋은 친구를 만나고, 좋은 스승을 만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그러나 형식적인 만남에는 진정한 우정이 발생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이용하기 위해서 만나는 사람도 있다. 사업을 위해서, 건강을 위해서, 안전과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소원성취를 위해서 만난다. 그러한 만남은 공허해질 뿐이다.

그분은 우리 인생길에 참다운 동반자요 위로자가 되신다. 뿐만아니라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인도자요 우리 인생길의 스승이 되신다.

그분 만이 나를 향하여, “울지 말라” “일어나라”고 말씀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참사랑의 주님을 깊이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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