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바벨탑 무너지는 소리 (창 11:1~9)

  • 잡초 잡초
  • 438
  • 0

첨부 1


바벨탑 무너지는 소리(창11:1~9)

  여러분,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한 마디로 답답합니다.  신문 보는 게 겁이 날 정도입니다. 매일 신문의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기사들을 보면 좋은 소식보다 나쁜 소식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렇다고 신문을 보지 않고 살 수도 없고 ... 정말 착잡할 때가 많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환경 등 어디 하나 성한 데가 없어 보입니다. 곳곳에서 거짓이 드러나고, 부정과 부패, 그리고 고통의 신음 소리가 깊어만 갑니다. 한 마디로 총체적 난맥상(總體的亂脈相)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왜 이렇게 혼란스러운 것일까요? 인생들이 왜 이런 혼잡스러운 것일까요? 그 근본적인 원인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자기 혼자서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결과입니다. 자신은 잘 살아보려고 하지만, 잘 해 보려고 하지만, 갈수록 세상을 망쳐놓는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난맥상을 해결하는 길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역하는 한, 이 세상과 각 개인의 인생은 결코 좋아질 수 없습니다. 겉보기에 인간의 문명이 발전하고, 인생이 부요해지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속은 기초 공사가 부실한 건물처럼 항시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부실한 건물에 화려한 외장을 하고, 이것저것 갖다 붙인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언젠가는 ‘성수대교’처럼, ‘삼풍백화점’처럼, ‘바벨탑’처럼 와장창 하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만일 그런 건물이 있다면 하루속히 철거하고 새로 세우는 것 외에는 달리 살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바벨탑 사건’을 살펴보면서 우리 인생의 건물은 안전한지 진단해 보기를 소원합니다. 혹시라도 우리 인생이, 우리가 행하는 일들이 바벨탑 같은 것이라면 자진 철거하고 하나님께 돌아가 새롭게 출발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럴 때 우리 인생에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승리가 있습니다.

[1] 바벨탑 사건 : 인본주의의 실패

  ① 사건 개요 :

  바벨탑 사건이 발생한 것은 노아 홍수가 끝난 지 약 350년 이상 지난 때였습니다. 시날 평지라 불리는 지역에서 있었던 사건인데, 시날 평지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위치한 비옥한 땅입니다.(메소포타미아 지역) 당시 그 땅의 지배자는 ‘니므롯’이었습니다. 창10:6~10 보면 니므롯의 인물 소개가 나오는데, 그는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의 후손으로 그 시대의 영웅이었습니다. 노아 홍수 후 인구가 증가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는데, 니므롯이 그들을 이끌고 시날 평지로 이동했던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그들이 동방으로 간 것은 물론 장소적인 이동이었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났음을 암시합니다.
  그들은 시날 평지에 모여 도시를 형성하고 하나님을 배제한 자기들만의 ‘인간 왕국’을 건설하려고 합니다. 그게 바로 바벨탑 사건의 시발입니다. 3절.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여기서 그들이 벽돌을 굽고 역청을 사용했다는 것은 당시 수준으로 획기적인 기술 혁신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한껏 뽐내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4절. “또 말하되 자, 성읍(city)과 탑(tower)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그들은 도시를 형성하고 그 한 가운데 탑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 탑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간의 능력을 자랑하는 상징적인 건축물이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의 탐사와 연구에 의하면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지구라트’(Ziggurat)라 불리는 탑들이 산재해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바벨탑은 지구라트의 전신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지구라트는 ‘하늘의 언덕’이란 뜻인데, 하늘 높이 층계 식으로 쌓은 건축물입니다. 그리고 특기할 것은 그 꼭대기에 우상의 신상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아마 바벨탑 위에도 우상 신상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벨탑을 쌓은 것은 하나님을 거역한 행위입니다. 건축물을 세우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역하는 의도를 갖고 했기에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벨탑을 쌓는 인간들을 향해 진노하시고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7절~9절.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7 자, 우리(=삼위일체 하나님)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 ” 하나님이 패역한 인간들을 흩어버리시고 언어를 혼잡케 하셨습니다. 그들이 함께 힘을 합쳐 하나님을 거역하지 못하도록 방지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 지역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는데, 무슨 뜻입니까? ‘혼잡’ ‘혼란’ ‘혼돈’(confusion, disorder, chaos)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본래 인간의 언어는 하나였습니다. 현대 언어학자들도 그렇게 주장합니다. 그런데 언어가 혼잡해지고 달라져서 인간이 의사소통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된 겁니다. 지금 우리가 외국어 때문에 힘들어하는 게 다 바벨탑 사건의 결과입니다. 우리나라 국민이 연간 영어 공부 위해 쓰는 비용이 1년에 15조원이라는 통계가 있는데, 정말 엄청납니다. 그 모든 게 하나님을 거역한 결과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알 수 있습니다.

  ② 인본주의의 특징 :

  바벨탑 사건이 보여주는 인간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인본주의(人本主義)입니다. 인본주의는 영어로 ‘Humanism'인데, 좋은 의미도 있죠. 인간답게 살고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 그런데 영적으로는 좋지 않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인간 중심으로 살아가는 ‘인간중심주의’입니다. 인간이 자기 인생에 대해, 인간 세상에 대해 주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살고, 자기 노력만 의지하고, 자기 영광만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죄의 뿌리입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게 된 계기가 바로 하나님을 무시한 인간중심주의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사단)이 인간을 유혹한 장면을 보십시오! 선악과를 따먹도록 충동질합니다. 선악과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관계를 의미하는 증표입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3:5 보니까, 뱀이 뭐라고 유혹합니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인간이 이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인간은 점점 더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고서 잘 사느냐 하면 천만의 말씀입니다. 절대로 잘 될 수가 없습니다.

  ③ 인본주의의 결과 :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 질서는 ‘하나님-인간-물질세계’의 위계질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살 때 인간은 이 질서 속에서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역하면서 인본주의로 살면 창조 질서가 파괴됩니다. 그래서 무질서와 혼돈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코스모스(cosmos)라는 말을 아시죠. ‘우주’라는 뜻인데, 본래는 ‘질서’ ‘조화’ 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또 카오스(chaos)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무질서’ ‘혼잡’ ‘혼돈’ 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코스모스’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카오스’가 된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 자기 뜻대로 살면 잘 될 것 같은데 사실은 죄를 짓게 됩니다. 좌로 우로 치우치기 마련입니다. 저마다 자기 뜻이 옳다고 주장하지만 다 치우치고 맙니다. 결국 범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인간이 무슨 짓인들 못합니까? 옆에서 감시하고, 붙잡아가고, 가두어도 온통 난리가 아닙니까? 자기가 노력하면 잘 될 것 같은데 무지한 인간의 노력의 끝은 허무입니다. 자기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지만 결국은 수치스러운 인생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14: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1:4,6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 ... )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알곡과 겨는 외관 상 거의 비슷합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면 알곡은 조금 흔들려도 그대로 있는 반면 겨는 바람에 날아가  버립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인생은 수학적으로 설명하면 마치 이와 같습니다. 아무리 곱하고 더하고 난리를 쳐도 밖에 괄호 치고 마이너스 붙이면 크게 마이너스가 됩니다. 이처럼 인간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면 갈수록 손해가 되고, 갈수록 망가집니다. 또 아무리 곱하고 더하고 발버둥을 쳐도 밖에 괄호 치고 0으로 곱하면 0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거시적으로 봐도 이런 원리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인류의 문화 문명이 굉장히 발전하는 것 같습니다. 그 혜택을 많이 누리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뒷편에는 부작용도 많습니다. 인간이 만든 핵은 무기가 되어 우리의 목숨을 위협합니다. 지구 온난화로 빙하가 녹고 있어서 큰 위기라고 합니다. 지난 여름 날씨가 어땠습니까? 미쳤죠. 사실은 인간이 미친 겁니다. 아무 때나 비가 왔습니다. 그래서 한반도가 아열대기후로 바뀌고 있다는 말조차 들립니다. 인간이 무지와 죄악으로 자연 환경을 파괴한 결과입니다. 현란한 문명의 뒤편에 짙게 드리운 멸망의 그림자입니다. 

  흔히 그런 말들을 합니다. 인간의 양심에 호소한다고, 인간들이 양심적으로 노력하면 인간 사회가 좋아질 수 있다고 말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인간의 양심은 썩어빠진 양심입니다. 미사여구에 불과합니다. 개인의 정도 차이가 있지만 십자가 보혈로 성령으로 거듭난 양심이 아닌 한 결코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키지 못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에피소드를 통해 그런 사실을 확인해 봅니다. 어느 훈련소에서 훈련병들이 퇴소하는 날이었습니다. 항상 퇴소식이 있는 날이면 부모들이 음식을 잔뜩 싸갖고 와서 위로하며 함께 먹습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후입니다. 그들이 앉았던 자리마다 쓰레기가 흘러넘칩니다. 분명히 근처에 쓰레기통이 설치되어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면 기간병들이 죽도록 고생합니다. 골머리를 앓던 훈련소 측에서 아이디어를 짜냈습니다. 면회객들이 앉았던 자리 주변에 광고문을 게시했습니다. “버리고 간 쓰레기는 여러분의 아들들이 치워야 합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깨끗하게 치워졌습니다.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입니까? 이게 인간의 양심입니다. 이런 양심으로는 인생에 소망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소망이 없습니다. 

[2] 크리스천의 삶 : 신본주의의 승리

  인간 세상에, 각자의 인생에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① 구원 -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

  하나님은 바벨탑 사건으로 진노하시고 인간을 흩어버리셨지만 인간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그 후 기록을 보면 셈족 가운데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어갑니다. 창12:3 “ ...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 ” 이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마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오직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하나님)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아와 관계를 회복하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인본주의를 포기하고 신본주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② 신본주의의 특징 :

  신본주의(神本主義)는 한 마디로 하나님 중심주의입니다.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인간 주권을 버리고,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뜻을 고집하지 않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삽니다. 자기의 노력의 허무함을 알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합니다. 자기 자랑 자기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주(主, The Lord)로 고백하며 사는 것입니다. 삶의 전 영역에서, 세상의 모든 분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전6:19~20 “19 ...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여기서 값을 주고 샀다는 것은 십자가 대속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피값으로 죄에서 구원받은 크리스천은 이제 신본주의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③ 신본주의의 결과 :

  인간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신본주의로 살면 모든 것이 회복됩니다. 창조질서가 회복됩니다. 무질서와 혼돈의 카오스(chaos)가 질서와 조화의 코스모스(cosmos)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의로운 삶이 펼쳐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으로 축복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함으로 존귀한 인생이 됩니다. 여기에 진정한 승리와 축복의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하나님)의 나라와 그(=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렇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모든 비극이 종결됩니다. 모든 게 회복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본주의의 승리입니다. 이런 원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간증이 있습니다. 옛날에 두 명의 사형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한 명은 처형일이 다가오자 간수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 몸을 미리 팔겠소. 대신 죽기 전에 맛있는 음식이나 실컷 먹도록 해 주시오.” 사형 집행 후 그의 시신은 의대 해부실습용으로 팔려갔습니다. 스스로 기증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이것은 정말 아닙니다. 그는 정말 불쌍한 인생을 살다 불쌍한 모습으로 인생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명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자기 인생을 회고하면서 하염없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나온 인생은 하나님 없이 제멋대로 살았던 바벨탑 인생이었습니다. 다행히 그는 감옥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새로운 소망이 생겼습니다. 천국의 소망, 그리고 남은 생애가 짧지만 찬송하고 기도하며 감방 동료들에게나마 사랑을 전하며 살아가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을 인도한 교회에서 새 교회당을 건축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가진 게 없지만 눈물을 담아 한푼 두푼 모아두었던 돈을 건축헌금으로 보냈습니다. 헌당식 때 그의 미담이 소개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 그 자리에 있던 기자가 감동을 받고 신문에 소개했습니다. 그 소식을 알게 된 교도소 당국이 건의해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습니다. 그 후 머지않아 모범수로 출옥했고 자유의 몸이 되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벨탑이 무너진 자리에 새 집을 지은 셈입니다. 

[3] 승리를 위한 해법 :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그러므로 바벨탑 같이 무너져가는 인생, 망해가는 세상에 유일한 승리의 해법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 이야기(눅15:11~24)를 상기해 보십시오! 탕자는 아버지를 배반하고 가출해서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망하고 말았습니다. 재산 다 탕진하고 흉년을 만나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먹지 못합니다. 그때 탕자는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눅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 ” 그러자 그의 인생에 대전환이 이뤄집니다. 새 옷을 입고, 가락지를 끼고, 살진 송아지를 먹고, 잔치가 벌어지고 ... 승리하는 인생, 축복된 인생, 존귀한 인생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거역하는 인간은 영적으로 가출한 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삽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호소를 들어보십시오. 호6:1~2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여러분! 곳곳에 바벨탑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개인도,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인류도 ... 하나님 없이 잘 살아보겠다고 큰 소리 치지만 곳곳에서 바벨탑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 말씀의 기초 위에 견고한 새 집, 영원한 금자탑을 세워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각자의 인생을 돌아봅시다. 혹시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은 아닌지 ... 그렇다면 자진 철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생의 새 집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 나라와 이 사회를 품고 기도합시다! 바벨탑이 무너지기 전에 이 백성이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그래서 곳곳에 바벨탑 무너지는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하는 메아리 소리가 흘러넘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