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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로마의 의미 (행 23: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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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의미 (행 23:19~30)

‘내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일할 때 사람들은 나를 성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내가 가난한 사람들 스스로 가난의 원인을 알도록 도우니까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했다.’ 참 씁쓸한 소리입니다. 평생을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살았고 가난한 사람과 함께 힘들고 어려운 생활을 같이한 브라질의 한 성자같은 사람이 나중에 고백한 말입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도 정당한가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저 ‘나’입니다. 우선 내 피부에 닿게, 내 입맛에 좋게 나를 위해주느냐 이것만 생각하는 초라한 인간 세태를 아주 잘 보여줍니다. 우선 나에게 도움이 되고 내 입맛에 맞고 나와 생각이 같으면 나의 친구로 여기고 그렇지 아니하면 가차없이 적으로 몰아붙이는 초라한 인간의 모습인데 남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의 가장 추한 모습, 그것은 모든 것의 한 가운데, 모든 인생의 중심축에 나를 놓은 사람입니다. 즉 자기중심주의자입니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이기주의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까지도 그렇다는 사실입니다. 재미있고 부끄러운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할머니 한 분이 손자와 함께 바닷가에서 놀고 있다 밀려오는 파도에 사랑하는 손자가 휩쓸려 떠내려 가버렸습니다. 할머니는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 돌려보내 주십시오.’ 기도가 끝나고 눈을 뜨니 기적적으로 파도가 다시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아이를 본 할머니는 너무 좋았습니다. 아이를 한참 살펴본 할머니는 다시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그런데 조금 전에 쓰고 있던 아이 모자가 없어졌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여러 번 위험한 고비를 당하였는데 그 때마다 그 위기를 면하였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바울은 어떻게 그 위기를 당하였고 누구 때문에 그 위기를 당했나 하는 사실입니다. 전혀 뜻밖에도 같은 민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로부터, 특별히 같은 하나님 여호와를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그 위기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항상 그러합니다. 옛날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든 그렇습니다. 언제나 적은 가까운데 있기 마련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의 생각이 자신들의 생각과 같은 줄 알았는데 이전과 달리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바울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옳고 그름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를 하나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 사람이 우리와 같은 편인지 아닌지만 생각했습니다. 바울의 위기는 사도 바울과 같은 부류라고 할 수밖에 없는 사람, 가까울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서 왔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매번 어떻게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으며 누가 바울을 도와주고 보호해 주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 민족이 원수라고 여기는 로마와 로마 군인들이었습니다. 바울이 맨 처음 예루살렘에 와서 성전에 들어갔을 때 바울을 붙잡은 사람은 유대 민족들 즉 자기 동족이며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로마 군인들과 함께 천부장이 왔는데 그 천부장이 살려주었습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로마 부대로 압송해 갔는데 그러던 중 바울이 해명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몰려든 군중들에게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 또다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문에 바울은 또다시 죽을 뻔 했는데 그때도 지켜준 사람은 로마 군인들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하게 되었는데 이 재판에서 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10절에 그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이렇게 해서 바울이 겨우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백성들을 지키고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을 지켜야 할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위기를 당하게 되었고 지켜주는 사람은 로마 군인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또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도저히 죽일 수 없게 되자 모략을 세웠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고 동맹한 사람들이 사십 여명 모였을 즈음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가서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물어보려는 척하면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암살단이 준비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누가 지켜 줍니까? 이 소식이 천부장에게 전해지자 천부장이 백부장에게 당신네들 두 사람이 책임을 지라고 명하면서 군대를 보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게 되면 아무래도 언젠가는 변을 당하게 될 테니 그를 멀리 보내자고 결정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로마 군인들이 그렇게 많지 않고 좀 멀리 있는 해변가의 가이사랴에는 큰 로마 군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쪽으로 보내기로 했는데 몇 명을 보냈습니까? 23절에는 그 숫자를 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 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기병 칠십 명과 창병 이백 명을 준비하라.. 사백 칠십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로마 군인들의 숫자는 육백 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육백 명 중에 사백칠십 명을 차출해서 사도 바울을 보호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를 사랑해야 할 동족들은 그를 죽이려고 덤벼들고, 자신들의 계획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자 꾀를 내어 암살하려고 온갖 수를 다 부리고 있는데 도무지 도와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로마 군인들은 그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에게 원수라고 하는 로마와 로마 군인이 과연 바울에게도 원수인가 하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에게도 항상 이런 로마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생 살다보면 이런 일이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대 민족에게 있어서 로마는 침략자입니다. 압박자이고 수탈자이고 원수입니다. 이 당시 이미 이스라엘이 로마에게 피압박 민족으로 살고 있는 것이 백 년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삼십육 년임에도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습니까? 이때로부터도 이스라엘은 로마에게 오백 년을 더 침탈당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원수 같겠습니까? 이런 로마가 바울에게 있어서는 보호자요 방패였습니다. 그를 섬기며 도와주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챙기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처럼’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바울을 이렇게 챙기시고 도와주셨습니다. 다들 로마를 원수라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네가 바울을 도와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바울을 도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이것이 예수믿는 사람들이요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눈을 들어 잘 보십시오. 하나님이 계시는데 누가 여러분을 힘들게 하겠습니까? 그 원수 같은 로마가 바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도구였고 하나님께는 충성스런 종이었던 것입니다.

로마는 하나님에게는 귀한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징벌하고 책망하는 일도 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야단치고 회초리로 때리는 일을 로마를 통해서 하십니다. 잘못하고 죄를 짓고 악한 일을 하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징벌하는 도구로 쓰셨습니다. 과거에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을 때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로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라는 나라를 통하여 징벌하셨지만 그들은 아무리 징벌을 주셔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을 완전히 없애버렸습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에 비해 좀 덜했던 유다도 차차 북이스라엘을 닮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조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내가 거룩해도 끝까지 거룩한 것이 아니고 지금 내가 경건해도 끝까지 경건한 것은 아닙니다. 남 유다가 점점 더 북쪽을 닮아 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보내셨습니다. 그럼에도 남유다는 끝까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 유다는 없애시지는 않으셨지만 흩어 버리신 후 17년 동안 고통받게 하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남 유다를 책망하시고 징계하시는 도구로 쓰셨습니다.

아프간에 잡혀있던 19명이 다 살아서 돌아온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제부터 세상은 기독교와 교회에 대해서 많은 공격을 할 것입니다. 책망과 질타도 많이 할 것입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어떻게 하든 기독교와 예수를 전도하려고 하는데 방해하려는 어둠의 세력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어떻게 하든 한국 교회와 기독교를 위축시키려고 하는 악의 세력이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근본적으로 아예 한국 교회가 더 이상 선교하지 않는 교회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아주 분명한 음성도 우리는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옛날에 이집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말씀 하신 것, 앗수르를 통하여 북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것, 바벨론을 통하여 남유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아프간을 통해서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특별히 선교에 관한 것을 들어야 합니다. 선교는 해야 합니다. 그러나 너희들이 선교를 한다고 하는데 정말로 선교를 하느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도 지난번에 이디오피아에 갔었고 며칠 있으면 캄보디아에 갈 것입니다. 이디오피아, 카자흐스탄 ,키르키즈스탄, 티벳, 중국 등 하고 여러 곳에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음성이 있습니다. 정말로 선교를 하고 있는가, 선교를 바로 하고 있는가 하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선교를 한다면 정말로 복음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멸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선교를 하는가 아니면 다른 누구를 위해서 선교를 하고 있는가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로마를 이스라엘의 범죄를 응징하고 징벌하시는 도구로 쓰셨습니다. 전혀 로마의 잘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쓰신 것입니다. 또 한편 하나님께서는 로마를 당신의 사랑하는 종 바울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챙기는 도구로 쓰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원수같은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면 여러분들에게는 엄청난 도움이 되고 힘이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악당 같은 것이 나에게는 천사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손만 보시면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들에게는 못 쓰시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천부장이 얼마나 귀하며 큰 사람입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 한 사람을 위해서 틈만 나면 뛰어오고 챙겨주는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대통령을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습니까? 야당을 그렇게 할 수 없겠습니까? 장관이나 검찰을 쓰지 않을 것 같습니까? 재벌들도 여러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 하나하나 챙겨주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쓰실 수 있습니다. 우리라는 존재, 기독교인이라는 존재가 그렇습니다. 당신의 사랑하시는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끼시지 않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또 하나님께서는 로마를 당신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도구로 쓰신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난번에는 예루살렘에 보내시더니 다음에는 로마라고 말씀하시는데 로마를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로마라는 배를 통해서 보병 이백 명, 기마병 칠십 명, 창병 이백 명이 호위하여 보내셨습니다. 대통령도 이런 호위를 받지 못할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빠트릴 수 없는 것은 로마의 도로입니다. 당시 로마의 도로가 정말로 좋았습니다. 물론 로마는 이 도로를 군사용으로 만들었지만 하나님께서 로마 사람들이 죽어라고 만들어 놓은 군사용 도로를 당신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쓰셨습니다. 이 로마의 도로 때문에 기독교가 얼마나 빨리 퍼져 나갔는지 모릅니다. 미국이 무얼 하고 중국이 뭘 만들고 일본이 뭘 해도 다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붙드시게 되면 다 우리를 위한 도구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심지어 북한도 그렇고 이번의 아프간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슴 아픈 일이고 어쩌면 돈이 많이 들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일들을 당신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당신의 도구로 쓰십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들의 모든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인 일, 가정의 일에 로마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 일들도 있고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들도 있고 억울한 누명을 덮어씌운 사람도 있습니다. 살다보면 부도가 날 수 있고 무서운 병에도 걸릴 수 있습니다. 억울한 일들도 있고 사고가 날 수도 있습니다. 철전지 원수같은 사람에게 사기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IMF 같은 국가적 재난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모든 것을 당신의 도구로 쓰실 수 있습니다. 기대를 하고 한번 쳐다보십시오.

때로는 우리가 잘못을 했을 때 우리에게 다른 길을 가르쳐 주시고 우리를 징계하고 책망하는 일도 하십니다. 잘못했으면 야단을 맞아야 합니다. 그래야 바로 갑니다. 그렇게 해야 망하지 않습니다. 망해도 조금 망하고 맙니다. 당할 때는 당해야 합니다. 때로는 그런 일을 통해서, 그것을 통해서 나를 일어서게 합니다. 스스로 도무지 일어서지 못하던 사람이 자기를 죽일 것 같은 일 때문에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경험해 보신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배가 좌초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죽고 한 사람만 남았습니다. 아주 신앙이 독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다 부서진 배가 파도에 밀려서 무인도에 도착했을 때 이 사람은 혼자 살아남아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광명을 비추어 주시옵소서. 나를 인도하시옵소서.’ 살기 위해서 조그만 오두막 집을 하나 지었습니다. 다 부서진 배에서 절박하게 쓸 수 있는 물건들을 건질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집에 불이 나고 말았습니다. 오두막집은 다시 지을 수 있지만 그 물건들은 다시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절망 속에서 겨우 살아나려고 했는데 다시 절망 중의 절망으로 빠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실망과 좌절 속에서 겨우겨우 잠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아침 일찍 구조선이 와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좌초지종을 묻자 그들은 당신이 우리를 오라고 연기를 내지 않았느냐고 대답합니다. 여러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래도 불났다고 울겠습니까?

이스라엘에게 이집트가 그랬습니다. 요셉이 죽고 난 뒤에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힘들게 하는 원수 같은 나라였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 이집트를 어떻게 쓰셨습니까? 자칫 이스라엘이 세속화가 되고 세상 나라와 똑같은 민족이 될 뻔한 것을 막아주셨습니다. 신학적으로 이집트를 하나님의 자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궁은 아무 병원균이 들어가지 못하는 무균지역입니다. 이스라엘의 씨를 자궁 속에 넣어서 전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한 민족이 되도록 하나님이 잘 키워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원수 같은 나라이지만 하나님은 인큐베이터, 어머니의 자궁 역할을 하도록 쓰셨습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로마와 같은 존재를 많이 만나게 됩니다. 힘든 일이 많이 생길 수 있습니다. 어렵게 하는 사람들, 참으로 원수같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도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장은 힘들고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해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만져 주기만 하면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보낸 로마가 될 수 있고 나를 키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챙겨주신 이집트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얼마든지 큰소리 치고 당당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부디 당당 하십시오. 자신있게 사십시오, 행복하고 기쁘게 사십시오. 우리 하나님을 의지하고 좀 멋지게 사십시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모든 것을 보호자로 그리고 우리를 챙겨주는 도구로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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