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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알곡과 가라지 비유 (마 13: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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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곡과 가라지 비유 (마 13:24-30)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역사적으로 교회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정의합니다. ‘하나의’,  ‘거룩하고’,  ‘사도적이며’,  ‘보편적인’ 교회 입니다. 각각의 의미가 있지만 오늘 같이 나누고자 하는 것은 두 번째 정의인 ‘거룩한’ 교회입니다. 교회는 거룩합니다. 거룩한 그리스도의 피 위에 새롭게 된 교회이기에 거룩합니다. 지금도 성령님께서 다스리시고 인도하시기에 거룩합니다. 장차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것이기에 교회는 거룩합니다.

그러나 실상 교회가 정말 거룩한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제 모습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기적이고 쉽게 죄에 빠지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들 중에는 의인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못하고 세속적이며 이익을 좇아 사는 죄인들도 많습니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한국교회가 거룩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교회는 분명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하나님 말씀과 역사 전통은 교회를 거룩하다고 정의하고 있을까요? 이것은 인간 편에서 내릴 수 있는 정의가 아닙니다. 교회는 인간적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공동체라는 점에서 거룩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이 교회에 머물기 때문에 교회는 거룩합니다. 죄인은 죄인인데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 받은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교회 교부들은 교회를 ‘순결한 창녀’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죄가 많고 더럽지만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신부가 신랑을 버릴지라도 신랑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교회는 거룩합니다. 지금은 보잘것없지만 하나님의 기대와 사랑이 교회를 향하고 있기에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로 끊임없이 쇄신되어 나갈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거룩함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을 떠나 여전히 우리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교회는 아름답지 못합니다.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이 그런 교회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인이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원수가 그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 싹이 나고 자랄 때는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한참 자라서 결실할 즈음이 되니까 그 가라지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종들이 주인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좋은 씨를 뿌렸는데 어째서 가라지가 생겼을까요? 주인님 이 가라지들을 뽑아낼까요?” 그러자 주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럴 것 없다.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 상할까 염려된다. 추수 때까지 그냥 놔두어라. 추수 때에 추수꾼들을 시켜 가라지는 묶어 불에 사르고 알곡은 곡간에 들일 것이다.”

주님은 이것이 천국비유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곧 지상의 천국인 교회의 실상입니다. 교회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섞여 있습니다. 교회는 깨끗하고 거룩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역사의 종말 때까지 이렇게 불순물이 함께 공존하는 그런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비유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주님은 교회가 거룩하지 못한 공동체임을 인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어떤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보려는 사람들은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가끔 보면 그리스도인들의 성숙하지 못하거나 죄 된 모습에 실망하여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거룩함은 하나님 은총의 거룩함이지 사람의 거룩함이 아닙니다. 세상에 성자들만 모인 그런 공동체는 없습니다. 자기 마음에 흡족한 사람들끼리만 모인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한 교회에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섞여 있고, 그 게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서 실망감을 느끼거나 상처를 받기 쉬운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주님도 교회가 그럴 것이라고 오늘 말씀에서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을 보면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며 교회 생활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마치 건축현장과 같습니다. 건물이 완성되기까지 공사현장은 더럽고 시끄럽습니다. 아직 부족한 것들이 많아 불편합니다. 그러나 그 설계도는 이미 완성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그리스도의 신부의 집입니다. 이 집은 최후의 종말 때에 가서야 완성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설계도의 위대함 때문에 지금 이곳의 불편함을 견딥니다.

저는 교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 또한 이런 불순물이 섞여 있는 존재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완벽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자신이 성자나 되기나 한 것처럼 자기 스스로를 괴롭게 합니다. 자기 부족한 모습, 자기 실수, 자기의 무능력을 도무지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태도로 죄 많은 이 세상을 산다면 우리는 정신병원에 들어가기 딱 맞을 것입니다.

완벽주의적인 경향의 사람들은 자신을 용서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게으른 것을 용서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 무능력한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결벽증적인 사람들의 문제는 자기중심적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아요. 자기가 만든 잣대로 스스로를 재단하고 괴롭게 합니다. 하나님의 잣대는 크고 너그럽습니다. 그 하나님의 평가만이 영원하고 절대적입니다.

또 이런 사람들은 지나치게 세상을 죄에 오염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벽증적인 경향입니다. 모든 게 깨끗하고 모든 게 제자리에 있어야 안심합니다. 결벽증이 심한 어떤 분은 세상이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하다고 하면서 쌀마저 락스로 씻어 먹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타락했다 할지라도 원래 작품이 너무 위대하고 탁월하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의 빛이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죄보다는 여전히 의가 더 많습니다. 악인도 많지만 의인도 많습니다. 사람 안에는 어둠이 있지만 그 어둠은 단지 빛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사람 안에는 더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움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 가라지는 정확히는 ‘독보리’라 불리는 종류입니다. 밀과 독보리는 모양이 비슷해서 처음 자랄 때는 구분이 잘 안갑니다. 그러다 어느 정도 크면 구별이 되는데 이 때 문제는 독보리의 뿌리가 알곡의 뿌리와 서로 엉킨 상태로 있다는 점입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이 상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도 독보리와 같은 것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칫 이 독초를 뽑으려다가 우리 자신도 다칠 수 있습니다. 뽑지 마세요. 그냥 죽는 날까지 함께 친구처럼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힘은 약화시킬 수 있지만 완전히 죽일 수는 없습니다. 내 안에 너무 깊숙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쓴 뿌리는 아마 자기가 싫어하는 성격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이기적이며 자기 이익에 빠른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태생적으로 게으른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육체의 정욕이 강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약화시킬 수는 있지만 완전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만약 이런 독초들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고 인간이 성자들처럼 자유한 경지가 될 수 있다면 구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부족하고 완전할 수 없어서 대신 하나님께서 우리 부족함을 메우어 주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스스로를 지나치게 자학하지 마십시오. 부족하고 못난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십시오. 주님도 우리 인생을 그렇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너무 편하고 좋은 것은 그분은 우리에게 높은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냥 그대로 우리를 받아주신다는 점입니다.

둘째,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가라지는 다 자라기까지는 알곡과 판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오죽했으면 그 이름을 ‘독보리’라 했겠습니까? 보리와 너무 흡사합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그렇습니다. 어떤 분들은 겉으로 보기에 마치 가라지처럼 보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이유가 교회에서 무언가 사업상 이익이나 자기 인생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일 수 있습니다. 무언가 딴 욕심을 가지고 오거나 호기심 때문에 그렇거나 아니면 체면 때문에 오는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 오래 다니면서도 겉돌기만 합니다. 예배 드릴 때 기둥 뒤에 숨어서 드리다가 축도 끝나자마자 바람처럼 사라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실상은 알곡일 경우가 있습니다. 겉은 그렇게 보이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진실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전적으로 무신론자 일 수만은 없습니다. 그 안에 진정으로 진리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언젠가는 진리의 길에 들어설 것입니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허무주의자처럼 행세하지만 그것이 고독한 영혼의 몸부림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언젠가는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 능력으로는 알곡과 가라지라고 명확히 구분할 수 없습니다. 또 이 알곡과 가라지에 대한 판단은 최종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단지 사랑하는 것 뿐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도스토에프스키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존재케 하신 것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뜻하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기대의 시선으로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랑이 알곡을 발견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교회에 충성하며 거룩하며 교회에서 인정받는 높은 직분을 받았지만 실상은 그들이 가라지일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물론 가라지도 알곡처럼 보입니다. 처음에는 알곡처럼 굉장히 신실해 보입니다. 그러나 결국 교회의 거룩함을 파괴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이 많습니다. 그 많은 비판의 대부분은 일반 평신도가 잘못되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 좋고 높은 직분에 있는 목사나 장로 권사들의 잘못이 큽니다. 교회를 사기업처럼 자기 왕국화 하고 그 권력을 세습하기도 합니다. 세상을 섬기고 변화시키기보다는 자기 몸집 불리기와 세속화에 철저히 물들었습니다. 교회의 직분 얻는 것처럼 마치 물질 거래처럼 만들어버렸습니다. 재정을 불투명하게 운용합니다. 많은 수의 교회에서 재정문제에서 깨끗하지 못합니다. 대형교회 중에서 예산 결산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교회는 거의 없습니다.

인간은 결코 성자가 아닙니다. 재정 운용과정이 불투명하면 인간의 욕심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제도화와 투명화가 필요한 것은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제도로 통제해야 인간의 악이 발현되지 않습니다. 죄에 오래 노출되다 보면 우리도 어느 새 가라지가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눈 앞에 눈먼 돈이 있는데 여기에 혹하지 않을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싫어하는 이유는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의 잘못이 큽니다. 우리가 가라지가 된 것입니다. 

또 한국교회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우리가 오히려 가라지일 수도 있습니다. 내 안에 자라고 있는 독초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잡초를 나무라는 것과 같다할 것입니다. 유대교를 망하게 했던 것은 무엇보다 율법을 사랑했던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내 안에 독초는 못보고 다른 사람들은 가라지라 정죄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자기 자신만을 판단할 뿐입니다. 내 자신이 알곡인지 가라지인지 끊임없이 반성하는 것입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다 보면 재미있는 것이 많습니다. 그 중 거북이나 악어 등 파충류의 암수 결정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파충류는 대부분 알이 형성될 때 암컷과 수컷이 결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알이 부화하는 과정에서 부화 온도에 따라 암수가 결정됩니다. 악어의 경우는 33도씨 이상이 되면 대부분 수컷이 되고 30도씨 이하에서는 암컷이 됩니다. 33-30도씨 사이에서는 수컷과 암컷이 골고루 나옵니다. 거북이는 반대로 모래 온도가 낮으면 수컷이 되고 그 온도가 높으면 암컷이 됩니다.

우리가 알곡이 되고 가라지가 되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생적으로 의인과 죄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정입니다. 내가 죄에 많이 노출되어 있고 죄를 많이 저지르다 보면 우리도 어느 새 가라지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하나님 말씀을 좇아 살기로 결단하고 성령의 은혜 아래서 끊임없이 반성하고 정화의 과정을 간다면 그 결국은 알곡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 또한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처음이 옳기 때문에 나중도 옳을 것이라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개혁하지 않으면 우리도 어느새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가라지가 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내가 옛날에 열심히 했기 때문에 지금도 그 은혜가 남아 있을 것이라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첫사랑의 체험을 가지고 끝까지 그때만을 그리워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날마다 새롭습니다. 날마다 새로이 부어주시는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느새 가라지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셋째, 그렇지만 결국 알곡은 구원받고 가라지는 심판받는다는 낙관적 가치관이 필요합니다.

저는 알곡과 가라지 비유를 보며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끌어가는 방식이기도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알곡에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혼탁해도 하나님은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이 불쌍해서도 그렇겠지만 더 결정적인 이유는 그 안에 있는 의인들이 다칠까봐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을 심판하려다 의인까지 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는 과정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이 관영한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심판하시겠다고 하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다름 아닌 알곡인 의인을 아끼는 마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의인 50명이 그 소돔과 고모라 성에 있어도 그 성을 심판하실 작정이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에 대해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창18:26)고 말씀하십니다. 의인 50 명 그들이 바로 알곡입니다. 이 알곡 때문에 주님은 소돔 성의 죄악이 하늘에 달하지만 용서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계속 하나님을 설득하여 의인 열 명까지 낮춥니다. 그렇지만 소돔성은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소돔성에 알곡과 같은 의인 10 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가 서고 망하는 것은 죄인의 수가 많아서가 아닙니다. 의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심판을 명하면서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렘5:1) 알곡과 같은 한 사람 의인만 있어도 심판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요즘은 저도 이 하나님의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악인에 대한 심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알곡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때는 악이 눈에 뻔히 보여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덮어 놓으실 때가 있습니다. 젊었을 때 저는 정의가 최고인줄 알았습니다. 악을 드러내고 심판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알곡과 가라지의 경계가 애매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것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고 그 판단의 권리는 주님에게만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알곡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목표를 알곡에 맞추어야 하지 가라지에 맞추어서는 안 됩니다. 가라지는 결국 심판받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알곡이 얼마나 있느냐입니다. 알곡을 생산하고 알곡을 보호하는 일이 더 소중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전력을 투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런 마음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안다면 우리는 현재의 불의에 대해서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의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가라지가 득세하는 것 같지만 단지 한 때일 뿐입니다. 주님은 30절에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30) 알곡과 가라지 비유를 해석하시면서 40-42절에서 또 분명히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40-42)

신앙인들은 낙관론자들입니다. 악이 득세하는 것 같지만 그들은 바람에 난 겨처럼 덧없음을 압니다. 그들은 결국은 뜨거운 풀무 불에 던져져 사라질 운명임을 압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길에 서지 않고 그들의 꾀를 좇지 않고 그들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결코 역사의 어둠에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희망을 봅니다. 그들에게는 심판이 예정되어 있고 우리에게는 영원한 승리와 행복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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