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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딤전 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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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본  문  :  디모데전서1:12-17

저는 성경을 처음 읽을 때에 생소하거나 어색한 말 때문에 국어사전을 옆에 놓고 읽은 적이 많습니다.  지금도 가끔은 국어사전이나 백과사전을 참조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폭행자’라는 말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말입니다.  ‘폭행자’라는 말은 난폭한 행동을 일삼는 자,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폭행이란 말은 속어로 강간이란 말을 완곡하게 부드럽게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자기를 폭행자라고 했는데, 그 본래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헬라어에서는 “휘브리테스”라고 하여 난폭한 사람, 오만한 사람, 다루기 힘든 사람, 반항적인 사람, 오만한 난폭자라는 말입니다.  폭행자라고 하였으나, 성폭행을 연상하면 안 되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폭행자라고 했으나, 성폭행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괴수”라는 말이 나옵니다.  괴수라고 하였으니, 괴상하게 생긴 짐승이 아닙니다. 괴수(魁首)란 말은 “못된 짓을 하는 무리의 우두머리, 주모자”라는 뜻입니다.  원래의 헬라어는 “프로토스”라고 하여 “프로”라는 말의 최상급으로 쓰이는 말인데, 그 뜻은 ‘처음에’, ‘최고의’라는 말입니다. 

  우리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알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우리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 ‘나쁜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말로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남을 말하기 전에 나부터 살펴보아야 하고,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기 전에 나의 나됨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잘난 맛에 살려고 합니다.  분명히 거짓이요, 잘못되었어도 우선 ‘아니라’고 발뺌부터 하고, 나중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서, 조금만 자랑거리가 생기면 ‘나 아니면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느냐’면서 자기를 들어내고 과대포장하려고 합니다.  “저 사람, 왜 이래?”라는 말이 목에서 올라올 때면 “그러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과연 남을 평할 만한 사람인가?  나의 능력은 무엇인가?  나는 완벽한 사람인가?  나보다 훌륭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자신을 나무라야 합니다. 

  성경 빌립보서2:3에서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하셨습니다.  인간관계에 있어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면 겸손해질 수 없습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사람이 성자요, 위인이요, 성숙한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믿기 전에는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였으며,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교회를 핍박할 때에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  사울은 초대교회의 제자들을 위협하였고, 살기가 넘쳤습니다.  살기(殺氣)란 죽이려고 하는 기색, 살벌한 기운을 말합니다.  사람이 누구를 죽이려고 하면 살기를 띄게 됩니다.  눈에 독기가 서리고, 얼굴에 살기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사람이 어떤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고, 또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마음이요, 짐승의 세계에서 살기를 원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란 사람은 그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방법이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잘못된 욕심인데, 그것을 교리나 신앙으로 포장하는 것이 무서운 일입니다.  민족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신앙이 되었을 때에는 살인도, 테러도 서슴지 않는 것을 봅니다.  바울은 철저한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유대인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고, 변함없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고후11:22에 보면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라고 합니다. 

  여기서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것을 확신하는 사람으로, 선민사상을 가진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말은 인종적으로 순수성을 말합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이었고, 바리새인의 아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23:6에 보면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고, 그는 바리새인의 아들이요, 자신도 바리새인으로,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빌립보서3:4 이하에 보면 자기도 육체를 신뢰할만한 사람이었으니,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사람이요,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을 알고, 이방을 아는 사람이요, 히브리어를 구사할 수 있으며, 헬라어를 구사하는 사람이요, 유대인으로 바리새인이었으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온 것은 바리새인으로 율법을 더욱 확실하게 공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이란 선생님의 문하생이 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왔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머무는 동안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는데도, 그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활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유대교에서 이단이 일어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이제 예수의 제자들을 잡아들이고, 예수 믿는 자들을 없애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바울이란 사울은 대제사장에게 일부러 찾아가서 공문을 달라고 졸랐습니다.  내가 다메섹으로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끌어올 터이니, 공문에 도장을 찍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의 기독교인들이라고 하면 남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녀를 막론하고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우선 결박하고, 예루살렘으로 압송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인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 얼마나 지독한 사람인 것입니까?  사람 잡아들이고 배교시키고, 아니면 죽이는 일에 목숨을 건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잘못된 신앙, 잘못된 가치관이었지만, 자기의 일에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자기가 예수 믿기 전에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기면서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사랑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말씀에 붙잡힌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명을 위하여 죽음을 불사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과 같은 열정의 사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당신의 일꾼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도 열정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하고, 우리 주님을 핍박하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종들로, 그리고 복음 전하는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생각해보면 다만 감사할 뿐입니다.  사울 같은 사람이 예수를 믿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은혜요, 놀라우신 축복이었습니다.

  그런 고백을 나에게 적용해보면,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요, 놀라우신 축복이었다고 같은 말로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 같은 사람은 당연히 구원받을만하고, 저런 사람이 예수 믿는 것은 보면 기적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15절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하셨습니다.  새번역에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믿음직하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입니다.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말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이 말씀은 믿음직하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를 능하게 하신 주님,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믿음과 사랑이 넘치게 하여 주신 하나님을 찬양해야겠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이 특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율법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이단을 척결하고 발본색원하여 기독교를 없애기 위해서는 뿌리째 뽑아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하면 이단자 예수, 거짓 메시아인 예수, 유대교회를 어지럽히는 그의 제자들, 그리고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 이단의 무리를 처단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140마일 쯤 된다고 합니다.  당시에 걸어서  하루 이틀에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라, 일주일 정도는 가야 하는 거리였습니다.  가다 자고, 쉬어가야 하는 먼 거리였습니다.  이 길이 사람을 살리러 가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잡아오고 죽이려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다메섹에 간 기독교인들은 사울을 피하여 피난 간 사람들인데, 사울이 뒤 따라 와서 잡아오려고 하였습니다.  사울이 그렇게 극성스럽고, 대단한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몇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 믿는 이들을 잡아 끌어오려고 하여 가고 있습니다.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주변에 엄청난 빛이 비추이면서 그는 땅에 쓰러졌습니다.  이 일은 일어난다는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사울이 땅에 엎드러져 있을 때에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지금 사울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확신하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제 다메섹에 거의 다 왔는데, 예수님이 가로막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지금도 변함없는 소신이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이들을 무조건 잡아들이고,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를 쓰러뜨리고 가는 길을 가로막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다급하게 책망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끝도 없는 경쟁 사회에서 승승장구하면서 번영의 길을 가고 있었는데, 그렇게 잘 나가는 중에 가로막히는 일이 있습니까?  우리 주님이 가로막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자녀를 통하여 가던 길을 막으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건강을 가지고, 사업을 가지고, 친구를 통하여 가로막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찾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세상적인 위기는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을 회복시키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지명하여 부르는 일꾼들입니다.

  사울은 땅에 쓰러진 중에도 정신을 차리고 지금 자기에게 말씀하는 이가 누구이며,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고 있는지 자세히 확인해야만 했습니다. 

  지금이 한낮이고, 정오였습니다.  지금 바울이 어떤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이 일이 자기 혼자 있을 때에 일어난 일도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자기 앞에 나타나신 분에게 물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그때에 들린 음성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는 거짓 메시아요, 예수가 살아났다는 말도 거짓이요, 기독교인들은 어리석은 백성들을 유혹하는 이단의 무리라고 단정하고 있었는데, 자기 앞에 나타나신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신 분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지금까지 사울이 예수 믿는 이들을 잡아들이고, 나사렛 이단의 무리를 박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하나님을 위하여 잘하는 일로 알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니 그 한 일들은 모두다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하는 것이요, 반항한 일이요,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보내신 아들을 박해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하시는 그 말씀에 사울의 마음은 물같이 녹아졌고, 맥없이 풀어졌고, 자신의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살려주시는 예수님, 그를 생명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영접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은 누구시며, 나는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을 발견한 사람이라야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우리 주님 예수님에게 사로 잡혔습니다.  포로 되었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하시면서 그를 죽였어도 사울은 할 말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생명을 주신 아들인데, 거짓 메시아라고, 이단의 괴수라고 박해하였으니, 하나님을 향하여 대항하고도 살아남겠다고 말하면 맞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예수를 죽어라고 미워하고 박해하였는데도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박해하는 사람은 주님이 처벌하시고, 징계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어도 되었습니다. 박해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경종을 울려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살려두시는 것은 엄청난 은혜였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복음이 되었습니다.

  사울이 예수를 알아간 것이 아니요, 스스로 회개하고 주님을 찾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사울을 회개시킨 것이요,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찾아가신 것입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자신이 행한 일이 얼마나 엄청난 죄악이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한 일인지 알았습니다.  주님을 발견하고 보니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해야 하는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을 붙잡았습니다.  사울에게서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라는 말도 원치 않았습니다.  사울을 포로로 잡아끌고 가고, 당신의 종으로 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울에게 주시는 은혜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울을 불렀습니다. 사울을 붙잡았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정말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예수님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물어보셨습니까?  그런 후에 여러분, 자신을 찾아야 합니다.  “나는 누구입니까?”라고 진솔하게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나의 사는 이유요, 죽을 수 있는 이유가 되십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만이 나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저의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17절 말씀입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할 사람들입니다.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를 억만 죄악에서 건져주신 그 은혜를 감사하면서 중심을 다하여 찬양하고 주님을 증거하고, 헌신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주님을 향한 열정이 있습니까? 주님을 위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다하는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도 일생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통하여 위대한 일을 하십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었고, 내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주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주님을 만나므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주님을 모셔 들였습니까?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주님과 동행하고 계십니까?  주님을 위하여 여러분의 삶을 온전히 위탁하십시오.  주님을 여러분의 최우선순위에 올려드리십시오. 

  주님을 만나시고, 모셔 들이고, 자신을 알고, 자신의 소명을 확신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며 찬양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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