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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운명을 가늠하는 선택 (창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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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가늠하는 선택 (창 13:1-13)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심리학자인[사토 도미오]가 쓴<선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선택이라는 제목 앞에<당신의 운명을 바꾸는 위대한>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각자 안에는 숨겨진 위대한 힘이 있는데 그것을<선택하는 능력>이라고 말하면서 이 능력을 깨닫고 활용하는 비결을 제시합니다.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만나는 선택의 순간들에 언제나 옳은 선택을 하며 사는 것일까? 그리고 순간의 선택은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를 생각하게 하며 살아가면서 만나게 될 선택의 순간에 현명한 선택을 해서 보다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길을 안내하는 책입니다.

무엇보다도 운명을 바꾸는 위대한 선택은 현재의 내 모습을 미래에 더 나은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선택 능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그 능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을 12가지를 우화와 함께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가장 위대한 힘은 자신의 사고방식이나 닥칠 일들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고 바람직한 가치관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각자가 자신이 가진 위대한 힘인 '선택'하는 능력을 깨닫고 좋은 방향으로 활용한다면 인생을 얼마든지 업그레이드 할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을 꼬집어 주는데 우리는 무의식중에 나쁜 선택을 하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졌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이를 어떻게 고쳐야 할지 심리학적 분석을 토대로 대응책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인생에는 선택을 해야 할 순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선택 이전에 우리는 너무나 많은 제한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선 경제적으로도 제한이 많습니다.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또 어떻게 보면 이미 가진 것도 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스운 말로 내가 먹은 것만이 내 것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먹으려고 가지고 있다가 먹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옷이 아무리 많아도 죽으면 한 벌뿐입니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제한을 받고 삽니다.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마음대로 오고 갈 수 없습니다. 정치적 한 정 안에서만 오 갈수 있을 뿐입니다. 그 외에도 문화적인 제한 등 얼마나 많은 제한 속에 삽니까?

그런데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인간만큼 자유로운 동물은 또 없습니다. 제한되긴 했지만 그 속에서 누리는 자유는 선택해야할 만큼 많은 자유입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큰일까지 주어진 환경에서 미래를 위해서까지 무한한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 앞에 이제 정말 중요한 것이 남아 있습니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선택의 결과는 책임으로 남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은 신중해애하고 고민이 따르는 것입니다. 내가 선택한 결과로 남는 책임은 내가 평생 동안 져야합니다. 때로는 이것이 운명이고, 결정적이고, 심판적일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기에 중간에 혹 내가 원하지 않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그 결과는 내가 감수해야합니다. 그래서 선택 앞에 인간은 언제나 갈등하고 고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대충 생각도 없이 내리는 결정 보다는 깊이 생각하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 올바른 선택이 될 확률이 많은 것입니다.

유명한 시성[괴테]가"태초에 갈등이 있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역사의 처음부터 인생에는 갈등이 존재했다는 말입니다. 그 말처럼 갈등은 어쩌면 우리의 삶에 불가피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의 직장, 우리의 사업장 심지어는 신앙 공동체인 교회에서도 갈등은 존재할 수가 있습니다. 유명한[스펄젼]목사님의 전기에 보면 어느 날 교회 생활에서 많은 상처를 받은 어떤 젊은 형제가 스펄젼 목사님을 찾아와서 세상에서 완벽한 교회를 하나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그때 스펄젼 목사님이 웃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형제여 형제가 만약 그런 완벽한 교회를 찾거든 나에게 꼭 일러주시오. 나도 그 교회의 멤버가 될 것이요. 그러나 만약 그런 교회를 찾거든 당신은 절대로 그 교회의 멤버가 되지 마십시오."그럽니다. 그래서"왜요?'하고 물었더니 스펄젼 목사님 말이"당신이 끼면 그날부터 그 교회의 완전은 깨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여 형성하는 공동체는 그 어디든지 언제든지 그런 불완전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도 갈등이 있고 믿는 사람들끼리도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죄 성이나 부패성이 언제든지 돌출 될 수도 있는 필연적 결과인 것입니다. 교회가 그럴 수 있냐고 믿는 사람들이 어째 저럴 수가 있냐고 주저앉아 버리지 마십시오. 우리 인생이란 갈등 앞에 주저앉아 버리는 삶을 배워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갈등과 더불어 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갈등은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웃과의 갈등, 가족 간의 갈등, 형제자매 간의 갈등, 친구와의 갈등 하루도 갈등이 없는 날이 없다고 봐야 옳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갈등이 올 때 어떻게 우리가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선택하고 어느 쪽을 선택해서 갈등을 최소화 시키느냐를 배워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인생의 가치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삼촌 아브라함과 조카 롯 사이에서 이런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갈등의 중심에는 서로 가진 재산이 많아져서 다투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사람이 너무 부자가 되면 마음이 강퍅하게 되는 것입니다. 뭐든지 적당히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 적정이란 인격이 안 망가지고, 신앙이 안 비뚤어질 정도면 안 될까싶습니다. 하여간 롯이란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이 롯은 본래 주체의식이 부족하고 종속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창12: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며 너와 네 친척이 고향을 떠나라는 말씀을 하실 때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고향을 떠납니다. 그때에 조카 롯이 따라 나서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롯은 하나님을 믿어서도 아니고, 자기 주관이 뚜렷해서도 아닙니다. 다만 삼촌이 좋았고 독립적인 의식이 없었던 사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이었던 롯에게 시간이 지나고 오늘 본문에 결정적인 시간이 왔습니다. 살림이 너무 커져서 도저히 두 집 살림을 할 수가 없어서 나누게 됩니다. 물론 종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난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만 어쨌든"이제 너는 나를 떠나 살아라."는 삼촌의 말에 따라 롯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순간입니다. 여기에 자유가 있고 독립이 있습니다. 그리고 허락이 있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결론적으로 롯은 이 순간 여기에서 잘했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을 훌륭하다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가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고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조카 롯에게 양보합니다. 여기에서 사랑이 중요하고 화목이 중요하기에 다소간의 물질이나 여건을 덜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브라함의 훌륭한 신앙을 봅니다. 높은 산에 롯을 데리고 올라가서"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 네가 동쪽을 택하면 내가 서쪽을 택하리라."이 운명적인 순간에 이제 롯이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 드리지만 누구에게나 선택의 순간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기준이 곧 그 사람의 철학이요 운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살펴보지 않더라도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의 선택 기준은 언제나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어디든지 갑니다. 그 가는 방향을 몰라도 갑니다. 성경에 나오는 그 어디를 보더라도 아브라함의 선택 기준은 오직 신앙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에 좋고 예배드리기에 적절한 곳이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롯의 기준입니다. 아브라함과는 전적으로 달랐습니다. 어떻게 다른지 볼까요? 먼저 본문을 보면 롯은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롯의 기준은 보는 대로 선택했습니다. 넉넉한 물을 보고 자원이 풍부한 것을 보고 이것을 택했습니다. 그 들을 바라보면서 롯의 생각은 얼마나 분주했겠습니까? 저 정도면 무엇도 할 수 있겠고, 얼마나 할 수 있겠고 나름대로의 자기 계산에 아마 머리가 아플 정도의 빠른 계산이 오고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현실적이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어쩌면 우리들의 대부분도 이럴 것입니다. 당장의 넉넉한 소유를 택하고, 눈에 보이는 현재를 택하고, 풍부한 물질을 택하는 것이 얼마나 현실 적입니까? 당장 우리들에게 너무나 필요한 조건들이 다 충족 되는 곳이 눈앞에 광활하게 펼쳐져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함정입니다. 너무 보이는 것이 좋을 때는 정작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생각도 못해보고 아예 들여다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대로 선택 할 때 그 안에 있는 것이 잘 보입니까? 아니 자세히 보려고 하기나 합니까? 실제로 잘 안됩니다. 사람은 보고 듣는 대로 변화하고 보는 대로 가고 보여 지는 대로 운명이 결정됩니다. 그러나 이에 따른 운명은 내가 결정하고 내가 가야한다는 사실까지도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그 속을, 내용을 깊이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소돔이 어떤 곳입니까? 죄가 관영한 곳이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런데도 썩어빠지고 죄가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를 보고 롯은 뭐라고 합니까?"여호와의 동산"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못 말립니다. 그런 눈으로 보니 마치 축복 받은 땅처럼 보인다는 종교적인 각색까지 하게 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신앙 아닌 것을 신앙적인 것인 양 착각하거나 각색하는 이런 행위는 정말 가증한 것입니다.

그리고 롯이 보여주는 돌이킬 수 없는 또 하나의 실수는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잘못 된 선택은 죄 속으로 한 걸음씩 깊이 빠져 들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롯은 아예 죄 구덩이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쯤에서 우리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옳은 것인지, 내 선택이 올바른지 그래서 이대로 죽어도 좋은지를 물어봐야 합니다. 내 운명이 이대로 괜찮은 것인지 바른 선택에서 바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향락대로 장막을 옮겨가며 감정에 끌려서 육체에 끌려서 스스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소돔으로 들어가고 있지는 않는지 이미 깊이 발목이 빠져 묻혀 있지는 않는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는 지금 무엇을 선택하며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선택의 순간마다 갈등하며 얻은 결론은 어느 쪽입니까? 아브라함처럼 신앙적인 것입니까? 아니면 언제나 현실적이고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에만 시선이 머물러서 그 안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잘 못 선택하고 살아가는 롯 쪽입니까?

선택은 자유이지만 그 선택에 따른 내 운명은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선택은 내가 잘못해 놓고 운명은 하나님께 맡기는 이런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내 운명을 가늠하는 선택에 신중을 기하고 믿음으로 나아가서 내 삶을 복되게 만들어 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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