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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이 필요해요 (막 5:1~8,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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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필요해요 (막 5:1~8, 16~20)

사람에겐 무엇이 필요할까? 그러면 대답이 모두 다를 것이다. 가령 배고픈 사람에겐 빵이라고 할 것이고 아픈 사람에겐 치료하는 약이라고 할 것이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한이 된 사람에겐 집과 돈이라 할 것이고 결혼을 못한 사람에겐 배우자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필요는 사람에게 있어서 소망이 채워지는 순간 다른 것으로 변한다는데 있다. 이는 본래 육체에 관한 욕구가 지니는 특징이기에 어찌할 수 없다.

주님도 사람에게는 빵이 필요하고 먹을 것, 입을 것이 필요할 줄 알고 계셨다. 그러나 마4:4의 말씀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셨으니 사람에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일러주셨다. 사람은 빵만 필요로 하는 존재 그 이상이다.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하는 영적 존재이다. 인간에게 이 말씀이 필요하다는 이 선언을 외면하고 살면 그만큼 인생은 불평한다.

분명 빵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인데도 이것을 부인하는 자들은 하나님에게 대항하고 덤벼든다. 오히려 말씀을 들으러 가는 신앙을 핍박하고 가로막고 방해하므로 심령도, 가정도 황폐화된다. 사실 인생의 문제는 영적 문제가 해결된다면 욕구의 문제도 해결된다. 말씀을 먹어 배부르면 그 영적 기쁨이 땅의 소욕에 대한 절제와 삶의 만족으로 이어지게 한다.

그러므로 삶이란 주님이 사람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이 성육하신 말씀이다. 사람으로 오신 주님을 대면하더라도 인생의 모든 것이 달라진다.

막5:2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라고 했다. 그는 새 사람이 되었다. 예수님을 만나므로 인생의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아주 분명하게 사람에게 주님이 왜 필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첫째, 사람은 귀신의 문제에 대해 무능하다. (막5:3~5)

그러므로 주님이 필요하다.

막5:3~4을 보면 더러운 귀신 들린 거라사인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무덤 사이에 거처지를 정했다. 무덤은 정상인이 사는 곳이 아니다. 그 귀신 들린 사람은 얼마나 큰 괴력을 가지고 있는지 아무나 쇠사슬로 멜 수 없었다. 아니 막5:4을 보면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메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다고 하였다. 이 힘은 분명코 이 사람에게 역사하는 귀신의 힘이다. 이 사람은 막5:5을 보니까 밤낮 무덤에서, 산에서 늘 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하였다.

무서운 일이다. 돌을 들어 자기 몸을 가해하는 이 사람을 통제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이 말씀처럼 사람들은 귀신의 문제에 무능하였다. 무덤에 사는 거처지도 옮기지 못했고 늘 소리 지르는 것도 막지 못했다. 고작 통제의 방법으로 생각한 사슬과 고랑도 귀신의 힘 앞에 종이처럼 끊겨 나갔다. 피가 나고 깨져서 상처 투성이가 되는 인생을 방관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람은 귀신 앞에 무능하다. 귀신의 역사 앞에 사람의 방법도, 심리학도, 과학도 무능하다. 그러나 여기 거라사인이 주님을 만났을 때 저는 달라졌다. 주님 앞에서 그는 달려와 절을 하였다.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며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게 하소서.” 라고 하였다.

막5:8 주님이 거라사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하신 말씀 한 마디에 저는 돼지 떼를 집으로 삼고 거라사인의 몸에서 떠나가게 되었다.

아! 정말 말씀이신 주님이 필요하다. 영적 문제에 대하여 쇠고랑, 쇠사슬로도 해결 안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모습, 사람의 무능을 인정하고 주님이 필요로 함을 고백하자. 이 시대 속에서 어둔 악령, 사람을 황페화시키는 귀신을 제어하고 그 권세를 짓밟는 승리는 예수님이 주신 권세의 힘뿐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필요한 것이다.


둘째, 사람은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해 어리석다. (막5:13~17)

그러므로 주님이 필요하다.

막5:13~15을 보면 거라사인에게 들어갔던 다수의 귀신은 그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간다. 2,000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바다로 내리 뛰어 몰사하고 귀신 들렸던 거라시인은 정신이 온전하여 앉아있게 된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통제가 안되는 힘으로 밤낮 소리 지르던 사람이 온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막5:17을 보면 저희가 예수님께 간구하여 거라사 지경에서 떠나갈 것을 요청한다.

사람들은 왜 예수를 떠나가라고 하는가? 사람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예수의 존귀함을 몰랐기 때문이며 사람의 가치관이 어두워져서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2,000마리 돼지 떼의 죽음, 그 죽음이 한 사람을 살려냈다. 다수의 귀신들을 몰아내는 주님의 이 일은 찬사와 영광을 받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한 사람보다 돼지 2,000마리의 몰사됨을 더 우려하고 더 마음 아파했다.

돈? 중요한 것이다. 먹고 사는데 필요한 2,000마리 돼지?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것을 알지 못하기에 돼지에게 더 미련을 둔다. 이처럼 사람은 똑똑한 것 같으나 명철이 어두워졌다. 그래서 사람보다 짐승을 더 사랑하고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해 길을 잃고 있다.

이미 안방에서 강아지 한 마리는 가족들보다 더 중요한 사랑의 대상이다. 강아지 목욕시키기, 강아지 품에 안고 지내기, 강아지 병원에 데려가기, 강아지 장난감 사주기 등 사람은 외로워서 사랑할 대상이 없어서라고 말은 하지만 강아지가 사람보다 더 사랑해야 할 대상은 아니다.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잘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람들은 정말 가치 우선 순위에 있어서 무능하다.

그러나 주님은 돼지보다 사람이 우선이셨다. 돼지 2,000마리를 죽여서라도 사람을 살려내는 것이 우선이셨다. 돈보다 사람이 우선임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가치에 대해 길을 잘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필요하다. 주님이 만나져야 한다. 주님은 거라사인을 살려내어 온전하게 만드는 일에 모든 우선 순위를 두시고 친히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다. 주님이 필요하다. 삶을 지혜롭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셋째,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오해한다. (막5:18~20)

그러므로 주님이 필요하다.

오해란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혼돈하게 하는 안경이다. 해야 할 일을 하지 말아야 할 일로 혼돈할 때 삶의 어떻게는 달라지는 것이다. 삶의 소명이 달라지고 목표가 달라질 때 시간과 재능이 얼마나 헛되게 소진되겠는가?

막5:18~20을 보면 나음 받은 사람은 주님과 함께 머물기를 간구한다. 온전하게 만들어주신 주님, 치료 받았으니 마땅히 그분 곁에 머물러야 하는 것 아닌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올바른 헌신인 듯 하다. 그러나 막5:19을 보라.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로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다. 고침 받은 이 사람의 사명은 다른 것에 있었다. 온전한 사람이 되었으므로 일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주님을 함께 따르는 삶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 집의 친속들에게 고하는 삶을 요구하신다. 세상 속에 들어가 전파하는 삶을 요구하신다.

이렇게보면 주님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을 지도해 주고 계신다. 사람은 대개 자기의 삶과 헌신이 옳다고 주장하고 우긴다. 그러나 주님의 계획과 마음은 다른 곳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을 만나야 제대로 된 삶에로 헌신하고 일할 수 있다. 이 시대 우리는 오해를 많이 한다. 주님에게 묻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움직이지 않고 내게 좋을대로 행하기 때문이다. 조금만 은혜를 받으면 우리는 대개 목사가 되려고 한다. 그리고 가족, 친속, 마을, 주변 이웃들 속에 들어가 일해야 하는 전도, 전파의 사역을 중요시 여기지 않으려 한다. 물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는 두 가지 모두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내 중심적으로 오해하는 삶의 헌신은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을 따르려 한다. 이런 실수가 우리의 삶 속에 계속되면 모든 인생이 낭비되고 의미없이 소멸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위치에서 살아야 하는지 바로 선택하기 위해 주님이 필요하다.

영국의 노예 해방을 위해 제도적 법을 통과시킨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그는 사실 종교 개혁자 이상의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이다. 그는 젊은 시절 은혜를 받고 목사가 되려 하였다. 당시 주님의 은혜를 조금만 경험하면 성직자의 길을 가는 것이 사회적 분위기였던 때에 윌버포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주님과의 진지한 대화 속에서 삶의 헌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해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가가 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노예 인생을 해방시키는 노예 해방법을 통과시키는 주님의 일군이 되었다.

사람은 어리석다. 주어진 인생은 주님을 만나면 낭비하지 않는데 주님을 만나지 못하므로 낭비하는 인생이 된다.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대로 영적 존재인 귀신에 대해 무능하고 사랑해야 할 가치에 대해 무지하고 삶의 헌신에 때에 잘못된 오해를 한다. 이것이 똑똑하다는 사람의 어리석은 모습이다 그래서 렘9: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을 자랑할지니 하나님을 아는 것 자랑하라.”라고 하였다. 지혜있는 자는 지혜를 자랑하지 말고, 용사는 용맹을 자랑하지 말고 부자는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였다.

정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참된 인생, 보람있는 인생, 능력있는 인생, 자유한 인생이 되려면 황폐하게 버려지는 쓰레기 같은 인생이 되지 않으려면 사람은 주님을 만나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으로 서야 한다.

아! 정말 주님이 필요한 것은 나와 여러분이다. 아니 주님을 만난 것, 주님을 알고 주님을 믿는 것을 기뻐하라.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과 의논하는 것을 자랑하고 감사하라. 우리는 인생의 길, 진정한 인생의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였다. 주님이 길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인생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우리는 그 길을 찾은 것이다. 아직 인생의 가장 필요한 것을 몰랐다면 “주님, 내 영혼에게 오시고 만나주소서!” 라고 기도하라.

나를 더럽게 만드는 영적 귀신을 주의 말씀으로 쫓아내고 온전한 사람으로 회복되어야 할 사람이 나임을 고백하자. 사람을 회복시키는 해답이라고 거라사인이 증거한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자.

주님, 저에겐 당신이 필요해요, 제 자식에겐 주님이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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