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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오리라 (행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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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리라 (행 1:6~11)

성경은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로 시작되었고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하는 재림에 대한 말씀으로 끝납니다. 창조는 재림으로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 기록입니다. 예루살렘에 가시면 “승천 교회”라는 건물이 산 위에 있는데 그 교회당 건물은 사방으로 벽만 되어 있고 지붕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승천하셨다는 것을 기념해서 지붕 없는 교회당을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부활의 주님이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은 다시 오시겠다는 재림 약속입니다. 이것으로서 초림 예수의 지상에서의 인간 구원 사역이 끝나고 이후로는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의 역사로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6절에 “저희가 모였을 때”, 9절에 “저희가 보는데서 올리워가셨다”는 사실적 기록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설명을 바울 선생이 후에 고린도전서 15장에 하고 있는데 주님이 승천하시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숫자를 밝혔습니다. 500여 형제라고 했습니다. 이때는 부활의 소식이 알 만한 사람에게는 거의 알려졌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숫자가 그 자리에 모여 있었습니다. 바울이 예수를 믿은 것은 그 후의 일입니다.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당시 예수님이 승천하신 현장을 목격한 형제들이 아직도 태반이나 살아남아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500여 명 중에 단 한 사람도 나가서 거짓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적 증언은 아무리 핍박이 심해도 진리로 남아서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역사의 현장에는 언제나 목격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의 증언을 통해서 세상이 알지 못했던 역사가 밝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약속해주신 재림은 과연 있을 것인가? 기독교인들은 오늘 천사가 남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 이 말씀 하나를 영혼의 약속으로 품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 왔으며 또, 이로 인한 부작용도 기독교 역사에는 수없이 일어났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과 같은 첨단 과학시대를 사는 21세기 사람들에게 재림의 약속은 어떤 믿음의 방향을 가져오게 될 것인가? 오늘 우리가 이것을 한번 생각을 해보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우리가 가장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이렇게 우리가 생각해 볼 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에서 나타난 예언과 성취가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설교는 자신의 재림의 때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초림 예수는 다시 오는 자기 자신의 재림에 대해서 설교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올 때를 초점으로 해서 초림 예수의 설교가 이어졌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을 때에 인자가 오리라.”라고 말씀하셨고,  “노아 때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다 멸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그때와 같이 알지 못하는 시간에 내가 다시 오게 될 것이다.” 이미 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셨다가 다시 오시는 시간에 대한 초점을 맞추어서 종말론적 설교를 하셨다는 것이 예수님 설교의 특징입니다.

제자들이 제일 궁금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이것을 자꾸 물어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가장 많이 설교하신 재림 때에 대한 말씀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가? 이것에 대한 믿음은 예수님 자신이 예언하신 일들이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종합 검토해보면 큰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이런 것을 몇 가지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에서 예수님은 어느 날 예언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지금 이렇게 열심히 나를 따르지만 때가 되면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 도망을 갈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하나의 예언입니다. 그때에 제자들은 죽음의 맹세를 했습니다. “내가 죽을지언정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 어떻게 그런 일을 말씀하시나이까?” 분명히 그렇게 아주 힘주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니까 열두 명 가운데 한사람 정도는 예수님 곁에 있어야 되는데 모조리 도망을 갔는지 신기할 정도로 예수님 말씀대로 다 되었죠? “내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을 것이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하나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개인적으로 하신 말씀도 기억해보면 더욱 확실합니다.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게 될 것이다.” 가룟 유다는 현장에서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입니다. 전부 나는 아니라고 강력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니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돈 받고 팔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개인적인 것이나 어떤 면에서 민족적인 것이나 당시 다 이루어집니다. 수제자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더욱 확실하죠? 베드로가 “나는 절대로 그렇게 안하겠습니다.” 라고 너무 강조를 하니까 예수님이 “오늘 밤”이라고 시간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밤 세 번 네가 나를 강력 부인할 것이다.” 그 말씀을 하신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베드로는 철저하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역사가 좀 흘러간 다음에 이루어진 예언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느 날 예수님에게 자랑을 했습니다. 이 성전은 46년 동안 공사를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웅장한 건물이 되었겠습니까? 주님은 그때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때가 되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아니, 46년간 공사한 웅장한 성전을 누가 무너뜨린 답니까?” AD70년에 로마군에 의해 예수님 말씀대로 다 무너졌는데 한쪽 벽만 남아서 “통곡의 벽”입니다. 아무도 믿지 않은 예언이 다 그대로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절대로 믿지 못하는 예언이 있었습니다. “내가 3일 만에 살아날 것이다.” 그러면 12명 가운데 적어도 한 두 사람은 “말씀이 맞을지 몰라. 그러므로 우리가 3일 동안 기다려 봐야 돼!” 이렇게 말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제자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다 도망을 가고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28장에 천사가 여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그가 말한 대로 되어졌다.” 예수님이 설교하실 때 아주 강하게 악센트를 주워 하신 말씀! “천지가 없어져도 내 말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룰 것이다. 내 말에 대해 사람들이 철학적으로 비판을 하건 합리적으로 비판을 하건 과학적으로 비판을 하건 아무 상관이 없다. 내 말한 대로 그대로 다 될 것이다. 세상은 지금 그렇게 가고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예수님이 가장 많이 힘을 주어 말씀하신 자신의 재림 약속은 어떻게 될 것인가? 기독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종교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초림 예수는 고난의 종으로 오셨습니다. 말구유에서의 탄생, 노동자 생활, 핍박의 십자가 죽음 모두다 고통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내가 다시 올 때는 영광으로 올 거야!” 천사장의 나팔 소리를 들으며 구름을 타고 영광스러운 예수의 재림을 조명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성경에 예수님의 재림 약속은 320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이 예수를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사람들이 믿든지 안 믿든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그렇게 많이 본 제자들도 3일 만에 살아난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다시 온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에 대해서 교회 다니는 사람조차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우리가 읽는 성경을 구약과 신약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옛 약속과 새로운 약속이라는 뜻으로 구약, 신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Old testament”는 “오래된 언약”이요 “New testament”는 “새로운 약속”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의 책이란 것입니다. 이 약속을 믿는 자는 복이 되고 믿지 못하는 자는 재앙이 됩니다. 그런데 그대로 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귀소 본능적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미래지향적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구도 다 똑같습니다. 내가 오늘 매우 고난스러운 일을 참고 견디고 있습니다. 왜 참고 견딥니까? 미래의 행복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고난은 나에게 행복을 약속해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학생들도 열심히 공부하죠? 공부하기 참 싫은데 밤을 새워서 공부해야 됩니다. 왜 합니까? 미래의 약속이 나에게 이 공부를 통해서 온다는 것을 믿는 그 믿음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 미래 지향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2000년 전 베들레헴에 오셨는가? 약속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약속의 이 신실성을 보려면 구약성경에 더 확실합니다. 하나님이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믿고 따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식이 없는데 “네 자녀가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다.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말의 매력이 사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일을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자연과학적으로 보면 사라는 아기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성경에도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하나님을 향하여 웃었다고 했습니다. 왜 웃었느냐? ‘아니, 자연과학적으로 아기 낳을 수 있는 능력이 다 없어진지가 언제인데 이렇게 다 늙은 할머니더러 아기를 낳으라니, 웃기는 일 아닌가?’ 그래서 웃었다고 했습니다.

여기 갈보리교회에 나오신 70이상 되신 할머니들에게 “당신 내년 이맘때 아들 낳을 것이요” 말해보세요. 그 말이 얼마나 웃기는 말이겠습니까? 로마서 9장 9절에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믿거나 말거나 누가 뭐라고 비판하거나 말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말씀하시는 대로 그냥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삭을 낳았고 그의 후손이 그렇게 많아져서 공교롭게도 유대인은 온 세계에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에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자.” 기독교는 언약의 종교, 약속의 종교입니다. 언약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출애굽을 해서 가나안 땅을 갈 때 그 가나안 땅을 뭐라고 부릅니까? 약속의 땅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여건으로 봐서는 그 땅을 차지할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반드시 성취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차라리 돌아가서 그냥 종살이 하는 게 낫겠다고 얼마나 반란을 많이 일으키고, 또 가나안을 향하는 과정에 곤란한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그러거나 말거나 원망을 하든지 말든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번 작정하신 것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동물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에게 약속을 받았으며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향해 약속에 대한 인격적 관계를 이루고 계시다는 겁니다.

나이가 많아지면 약속을 잘 안 지키게 됩니다. 왜 그러는가 하면 잊어버려서 그렇습니다. 뇌세포가 많이 죽게 되고 기억력이 쇠퇴해서 자꾸 잊어버리는 게 노인의 특징입니다. 저는 어느 교회나 노인들을 위한 모임을 풍성하게 했는데 노인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우기기를 잘합니다. 그냥 고집스럽게 다른 것을 도무지 믿지 않고 고집을 부립니다. 기억을 잊어버려 알고 있는 것만 말하기 때문에 계속 우깁니다. 그래서 제가 경험한 교회의 노인 공동체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부분이 돈을 꿔주고 받는 일입니다. 이것 때문에 무척 골치가 아픕니다. 꿔 가고도 안 꿔갔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왜? 꾼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꾸어준 돈을 받고 나서도 왜 안주느냐고 말을 합니다. 받은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느 교회에 부흥회를 하러 갔는데 토요일 저녁에 교인이 많이 왔습니다. 한 천여 명 모인 것 같습니다. 교회에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목사님이 흥분을 하셔서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이 목사님은 벌써 십여 년 전에 은퇴하셔야 될 연령이신데 목회를 계속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설교를 마치고 뒤에 앉아있고 목사님이 광고를 하시는데 “여러분, 이렇게 많이 오셔서 부흥회 성황리에 이루어지니 감사합니다. 부흥회는 내일도 계속 됩니다. 내일 아침 12시에 예배를 드리니까 다 오십시오.”

그런데 교회 주일 예배 시간은 11시입니다. 그러니까 그 앞에 있던 집사님이 ‘이거 큰일 났다!’ 순간적으로 나와서 말참견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내일 주일 예배 11시입니다.” “누가 아니래요?” “지금 12시라고 광고하셨습니다.” “내가 언제 그랬어요?” 아니, 금방 하신 말도 착각하신 겁니다. 금방 한 말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약속을 해놓고도 잊어버려서 못 지킬 때가 많고, 어떤 때는 지킬 수가 없어서 못 지키고, 불리해지니까 일부러 안 지키고… 이것이 인간관계입니다. 인간관계가 그렇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맞춰서 살아야지 일일이 따지면 화가 나서 못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다 지켜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주의 재림에 대해서 잘 믿지 않는 건가? 이유가 있습니다. 너무 시간이 오래가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때가 2000년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깜깜하게 소식이 없습니다. 언제 오실 것인가? 이렇게 사람들이 생각을 하고 무디어 집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시간 개념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2000년이라고 하는 시간이 인간 편에서 보면 너무 오래된 시간같이 생각되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이틀 밖에 안 됩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 시간의 개념의 차이! 이러한 시간 개념은 내 자신 안에서도 얼마든지 우리가 경험합니다.

나 자신 안에서도 어떤 때는 너무나 시간이 길고 어떤 때는 너무 짧습니다. 시간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태곳적부터 지금까지 세월이 빠르다고 하는데 빠르긴 뭐가 빠릅니까? 언제나 똑같지요. 하루 24시간 365일 항상 똑같지, 언제 빨리 가고 언제 늦게 갑니까? 시간은 빠르거나 긴 것이 아니고 항상 그냥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느끼는 차이로 어떤 때는 ‘왜 시간이 이렇게 안 가는가?’ 어떤 때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다 되었어?’ 사랑하는 친구들을 만나면 밤을 꼬박 새워도 즐겁지요? 그러나 하기 싫은 공부를 한다든지, 미운 사람과 괴로운 대화를 나눈다든지 하면 30분이 30년 같습니다. 시간 개념은 내 안에서도 얼마든지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10대나 20대일 때 세월이 빠르다는 말을 하셨습니까? 절대로 세월이 빠르지 않았습니다. ‘언제 내가 동네 아저씨처럼 성장하나?’ 이런 생각만 했지, 그때는 우리가 세월이 느리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50대, 60대가 되니까 ‘아! 세월이 이렇게 빠르구나!’하고 느끼게 됩니다. 제가 먼저 있던 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한 달 전에 교회 건물 전체를 트리로 장식하는 것을 전문업체가 맡겼습니다. 얼마나 반짝이게 아름답게 장식하는지 모릅니다. 교회 주변에 동네 사람들도 와서 너무 아름답다고 교회에서 해마다 크리스마스 장식을 해줘서 마을이 다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 큰 건물을 전부 반짝이게 해놓으니까 사실 돈도 많이 들고 전기료도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때 하자고 해서 했습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가 지났습니다. “목사님! 언제 뗄까요?” “그냥 두지. 크리스마스 금방 돌아오니까!” 그래서 한 해는 안 뗀 적 있습니다. 시간 개념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마음으로 시간을 봐야 합니다. 만약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오신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형벌을 받겠습니까? 주님도 이 분야를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 위하여 복음을 땅 끝까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때 인자가 오리라.” 이것만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한 영혼이라도 더!” 한 영혼의 구원이 가시적 세상의 물질세계 천하보다도 더 귀하다고 정의하셨기 때문입니다. 한이 없으신 하나님의 인내 마음 때문에 우리는 사실 구원의 대상이 된 것 아닙니까?

오늘 말씀에 아주 분명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땅 끝이 남아있으면 아직 주님의 재림의 때가 아닙니다. 우리 삶에는 두 가지 길이 항상 있습니다. 오늘 당장 처리해야 되는 일이 있습니다. 일하는 직장에 나가고 때가 되면 밥을 먹고 밤이면 잠을 자고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참여하고 시장을 가고 세탁을 하고…. 이런 것들은 시간을 놓치지 말고 그때그때 지혜스럽게 처리를 합니다. 이것을 현실이라고 합니다. 현실이라는 것을 시간적 혹은 철학적으로 풀이하면 어제의 끝이며 내일의 시작 지점을 현실이라고 합니다. 또, 이 시간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풀이를 하면 흔들리는 물체의 측정입니다. 그래서 시계추를 만들어서 계속 똑같이 흔들어줌으로 시간을 재는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현실을 살면서도 현실 하나만 가지고는 현실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현실을 이해하려면 어제를 보아야 합니다. 어제의 꿈이 오늘 이루어진 것을 현실이라고 합니다. 아울러 오늘 현실에서 지금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라도 핑계할 수 없이 미래 지향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데, 그러면 인간의 미래, 즉 궁극적 마지막 꿈이 무엇인가?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해서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사는 것이 인간의 꿈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미래 지향적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인간이 걸어온 길을 보면 세 가지 반복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타락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반드시 타락과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이 구원의 빛을 다시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회개라는 과정으로 회복이 됩니다. 그래서 타락과 회개와 구원이 계속 반복됩니다.

여러분의 개인적 삶의 역사 순회도 똑같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순회 과정이 언제 완전하게 성취되고 끝이 오는가? 이것이 종말론적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가 그때다.” 이렇게 성경은 결론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배 시간에도 다 똑같이 고백을 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초림 예수는 고통의 핍박을 받으시고 인간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으나 재림 예수는 심판의 주로 오시는데 여기 산 자와 죽은 자가 무슨 말입니까? 그때는 죽은 자들도 부활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구원의 부활로, 마귀의 자녀들은 심판의 부활로 부활합니다. 그때 살아남아있는 지상의 사람들은 첫째 사망을 경험하지 아니하고 그냥 휴거한다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7절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렇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말든지 무슨 철학적, 과학적, 합리적 이론을 갖다 대고 무슨 비판을 하든지 말든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일점일획이라도 변하지 아니하고 예수님 생존에 다 성취되었고 예수님 후에 말씀하신 것도 다 이루어졌고 지금은 재림 하나만이 남아있습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것이다.” 오늘 말씀의 마지막 장면!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여기에 대해서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은 그대로 진행됩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과 생활할 때 예수님에게 많은 실망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더 빛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곁에 계실 때보다 더한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면서 제자의 역할을 잘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 복음의 기초를 놓게 됩니다.

영국에 유명한 작가 조지 버나드 쇼를 기억하실 겁니다. 마지막 죽을 때 한말을 기억하십니까? “내 인생 갈팡질팡하다가 이 꼴이 될 줄 알았지. 이게 뭐야? 내 묘비에 이 말 새겨 줘!” 그렇게 말하고 죽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말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약속의 종교입니다.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다시 오겠다.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다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 진리의 특성! 미래지향적 삶의 철학!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행복! 우리 그렇게 기대함으로 모두 다 삶이 풍성하여 지시기를 축원합니다.

「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신앙 고백합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오늘 말씀을 우리들에게 약속하시고 주님이 승천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고 살아갑니다. 말씀을 신앙고백 하는 자가 우리 주변에 우리를 통해서 더 많아질 수 있는 축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우리 삶 가운데서 마지막 이 소망을 가슴에 안고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많은 크리스찬의 고난들을 다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게 하여 주시고, 이 한 주간에도 승리하는 삶이 주님으로부터 주어지게 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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