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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승리의 증인 (행 7:5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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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증인. 행전 7:54-60.

저는 목회하면서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는 닮고 싶은 인물이 있는데 하나님의 사람 조지 휫필드입니다. 이 분이 너무 주님의 일을 하다가 몸이 약해지니까 그를 아끼는 친구들이 "자네 건강 좀 챙기라구!" 그 때 그가 했던 말이 제가 읽던 책에 써 있었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는 내 몸을 잘 보존했다가 녹슬어 없어지기보다는 내 몸을 주를 위해 쓰다가 닳아서 없어지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지난주에 이어서 스테반을 계속 묵상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주님을 위해 살다가 세상 앞에 버림받는 것 같은 스테반의 마지막을 보지 않습니까? 여러분 간단히 생각해 보십시오. 왜 초대교회의 총 지휘관은 베드로가 아닙니까? 스데반이 아니지 않습니까? 왜, 사도가 아니고 집사 스데반이 먼저 죽느냐 이 말이요. 그것은 바로 이 사람이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지성인이요. 헬라파 유대인이요. 저 갈릴리 촌사람들이 아니고 헬라파 유대인이요 지성인인, 당시로 말하면 세계적인 문물에 능숙한 이 사람이요. 지성인이요. 이 사람이 예수를 믿고 복음을 전하게 될 때 같은 동료, 왕년에 같은 친구였던 헬라파 유대인들이 여기서 용납하지 못한 거예요. 마치 저들이 배신을 느끼는 거 같아요. 그래서 돌을 던져 법을 어기고 스데반을 때려죽이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볼 때에 지금 스데반을 죽이는 사람이 바로 엊그제까지 친구예요. 같은 헬라파 유대인들이에요. 그런 그들이 그를 개 끌 듯 성문 밖으로 끌고 가서 돌을 던집니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세상 앞에 목숨을 구걸하지도, 구차하게 애걸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나 두려워하는 죽음 앞에서 이처럼 당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지금 자신을 조롱하고 비난하며 돌을 던지는 자들 앞에서 56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여기 보십시오. 지금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에게 '보라'하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 '보라'는 말은 헬라어로 '이데테'(idete)인데 이는 명령을 나타내는 말일 수도 있고, 주위를 환기시키는 감탄사일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신약 성경에서 이 말은 오직 눈에 보이는 것을 가리킬 때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스테반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가 돌멩이가 날아오는 현장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있음을 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있음을 봤습니다.

그런데 자기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무엇이라 표현하고 있습니까? '인자' 왜 인자라고 불렀을까요? 스데반이 발견한 예수님은 완벽한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완벽한 인간이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 . 이 땅을 창조하셨으며,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귀신을 ?아 내시며, 또 죽은 자를 살리신 그 분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을 다스리실 위대한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그저 통치하시기만 하는 통치의 왕이실 뿐만 아니라, 저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지만 오늘도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시는 하나님! 인자였습니다. 내가 지금 고난받는 것, 내가 곧 돌에 맞아 죽을 터인데 저 돌을 맞는 고통이 얼마나 아픈 것인가를 친히 남김없이 다 아셔서 나를 이해해 주시는 인자 되신 하나님! 스데반은 마지막 죽는 순간에 그 인자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단어가 등장하는데, 그 인자 되신 예수님께서 '서 계셨다'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종종 보는 바로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여기에 '앉으셨다'는 것은 속죄의 사역을 다 마치셨다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보좌에 앉으신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하늘을 열어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목도하였는데, 예수님이 일어서 계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벵겔이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일어서셨는가?" 예수님은 스데반을 환영하기 위해 일어서셨다는 겁니다. 이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왜 서셨다고 표현합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는 겁니다. "스데반아, 어서 올라오너라!" 그의 순결을 보고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예수님은 앉아서 그를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그가 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돌아오는 그 순간 예수님은 보좌에서 벌떡 일어나 스데반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역시 이 땅을 떠나는 날, 우리가 천국에 막 들어가는 그 순간 주님께서 앉으셨던 보좌에서 일어나 우리를 맞으신다면 그것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막크 갈리(Mark Galli)라고 하는 사람은 기독교 2천년사에서 순교를 당한 사람들의 사적을 연구하는 학자입니다. 그분이 많은 순교자들을 연구한 다음 결론적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순교자들 하나하나를 뜯어보고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한 가지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였다." 그리고 더 놀라운 말씀을 했습니다. "그 순교자들은 죽음의 순간까지 하나님의 임재를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순교의 순간까지 하나님의 임재를 즐기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이 이해됩니까?

리더스 다이제스트라는 잡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 잡지가 아닙니다. 그 잡지 97년도 10월 호에는 오늘날처럼 기독교가 신앙 때문에 박해받은 일이 역사상 별로 없었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1900년대 20세기에 전 세계적으로 2억에서 2억5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혹독한 핍박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공산치하에서 고통 당한 사람들의 수가 얼마인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그리고 지금도 회교권에서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종교적인 핍박을 당해서 죽어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 수단이라는 나라는 인구의 1/5이 크리스챤입니다. 그런데 인구의 4/5에 해당하는 회교도들에게 핍박을 받아 누바라고 하는 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지난 10년 동안 청장년 남자들만 50만 명이 끌려가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캐롤라인 콕스(Caroline Cox)라고 하는 사람은 영국 상원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는 수단에서 핍박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지난 10년 동안 그곳을 17번이나 방문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다녀와서 쓴 글을 보니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핍박받는 교회 현장에 가면 항상 겸손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현상을 봅니다. 나로 하여금 한없이 낮아지게 만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핍박당하는 그들이 누리는 엄청난 영적 자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살아 움직이는 믿음이요, 기쁨이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약이 없어서 병들어 약도 쓰지 못하고 죽어 가면서도, 먹지 못해 뼈만 남아 있으면서도 그들의 가슴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 기쁨 앞에 나는 한없이 겸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 은혜와 이 비밀을 아십니까? 여기 스테반도 죽음 앞에서도 결코 약해지지 않고 자기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 자들에게 피를 토하듯 말씀을 외칩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의 마음이 찔렸다고 얘기합니다. 54절을 보세요.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 여기 '찔렸다' 헬라어로 '디에프리온토'라는 이 말을 직역하면 '화살이 과녁에 꽂혔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박혔습니다. 주의 말씀이 화살같이 그 마음에 꽂혔는데, 이 사람들의 반응은 놀랍게도 이를 갈았어요. 이를 갈 뿐만 아니라 그 다음절에 보니까 귀를 막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문제입니다. 싸울 때 보면 왜 싸우는가? 이유는 간단합니다. 귀를 막으니까 싸웁니다. 대부분의 싸움을 보십시오. 귀만 열면 싸울 일이 없어요. 남의 얘기를 좀 들으면 안 싸워요. 그런데 왜 싸웁니까? 내 얘기만 하려는 거예요. '니 얘기 들어봐야 아무 소용없다'하고 악을 쓰고 남의 얘기는 듣지 않으니까 거기서 싸움이 나고 살인이 발생하는 겁니다. 듣는 마음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의 귀를 열면 이해가 가요. 감동이 오는 겁니다. 악의! 찬 사람은 막바지에 이르러 귀를 막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천국에서 환영받지 못합니다. 오늘 이 산헤드린 이스라엘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 성경의 박사들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귀를 막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맥락인 사도행전 2장 37절에 보면 베드로가 설교를 하는데 똑같이 찔렸다는 단어가 나옵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찔렸어요. 자신들이 기다리던 그 예수가 바로 구원자이신 메시야임을 알 때, 그들의 가슴을 후비듯 통증이 일어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한 것입니까? 메시야를 죽인 것입니다. 그러니 절규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어찌할꼬" 하는 탄식이 쏟아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통회하는 자의 심령을 받아주십니다.

잘못을 지적 받았을 때 두 부류의 사람이 나타납니다. 한 부류는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허물을 발견하였을 때 그것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회개합니다. 반대로 다른 부류의 교만하고 거짓된 사람은 자기의 허물을 지적 받았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회개하기 보다 자기의 잘못을 지적한 사람을 미워합니다. 그 사람을 원수처럼 생각합니다. 그 사람에게 분노하고 공격합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로부터 자신의 죄를 지적 받았습니다 "당신이 바로 그 죄인입니다." 그 때 다윗의 태도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습니다. 다윗이 실수하고 잘못을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 때문입니다. 시119:33-35절에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여러분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말씀을 사모하여 마음으로 받습니까? 그 말씀을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습니까?

그리고 기도의 줄을 놓치지 않습니다. 여기 60절을 보세요.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무릎을 꿇었다고 본문은 얘기하지 않습니다. 언제 꿇은 겁니까? 뭇돌에 맞았어요. 이미 육신은 깨어지고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정신은 혼미해집니다. 이제 이대로 죽는구나 싶은 순간에, 끝이라고 판단되는 그 순간에 스데반이 무릎을 꿇었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군중의 고함소리와 온갖 저주, 그 수많은 돌 세례 속에서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귀한 모습입니까!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이것이 하루아침에 가능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번도 기도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자기 친구들이 돌을 던질 때에, 마지막 죽어 가는 순간에 무릎을 꿇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 때문에 가능했던 줄 믿습니다. 스데반은 늘 기도했습니다. 늘 언제 어디서든 기도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기쁠 때만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슬플 때도 그는 기도할 줄 알았습니다. 내 몸에 병이 찾아올 때, 누가 나를 저주할 때... 무슨 일을 당하든지 그는 기도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돌에 맞아 죽는 그 순간에도 그는 평소에 기도하던 모습대로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용서의 기도입니다. 사랑의 기도입니다. 참, 이 기도는 정말 힘든 기도가 아닙니까? 지금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향해 이런 기도가 과연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그레이엄 스테인즈 선교사는 인도의 중부 오리사 주에서 한센병자를 위해 30년 동안 헌신한 분입니다. 그런데 1999년 1월 인도의 마노하르푸 부근 바라파다에 있는 병원 밖에서 자동차에 타고 있던 그레이엄 선교사와 두 아들이 불에 타 죽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창과 화살, 막대기, 곤봉으로 무장한 힌두교도들이 차 문을 열지 못하게 막고 차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레이엄 선교사의 살인 사건이 일어난 뒤, 살인자를 재판에 회부하라는 국제적인 압력에 의해 인도 경찰이 24명 이상을 체포했습니다. 모두 힌두교 결사대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민족적, 종교적 신념으로 그런 잔인한 일을 저질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졸지에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부인 글래디스는 "불태워진 생명"이라는 책을 통해 그 사건 이후의 일들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차에 불을 질렀던 힌두교도들이 체포된 뒤에 힌두교 지도자들이 글래디스를 방문했습니다. 그녀의 아픔을 위로하고 사과하면서 살인자들에 대한 용서를 청했지만 그 일이 용서가 되겠습니까? 인도에서 30년 동안 한센병자들을 위해 헌신했는데 ! 그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아이들까지 죽였으니 당연히 고소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글래티스는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30년 동안 헌신했던 인도의 한센병자들을 위한 사역을 글래디스가 이어받았습니다. 가족들에게서 버림받은 병자들을 돌보고,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바구니 찌는 법을 가르쳐 주고, 그 자녀들을 무료로 교육시키는 재건 농장을 위해 일했습니다. 더욱이 그녀는 "나의 사명은 한센병자들을 계속 돕는 것이고, 남편이 헌신했던 사역을 계속하는 것이고, 한센병자들의 병원을 짓는 것이다."라고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글래디스는 자신의 용서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인도 오리사 주에서는 종교적인 자유가 선포되었습니다. 주 정부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인도의 헌법 안에서 개종에 대한 폭력을 철저하게 조사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인도는 압도적인 힌두교 나라이고 전체 인구 중에 그리스도인은 겨우 2%뿐입니다. 개종을 하면 심각하게 인권 위협을 받기 때문에, 누구든지 신앙을 바꿀 때에는 경찰을 지휘하는 치안 판사에게 보고하여 신변을 보호받도록 규정하는 그런 곳에서 일부지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그로 인한 폭력을 규제한 것은 엄청난 변화입니다. 억울한 사건을 당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용서했을 때 이런 열매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그리고 로마서 12장 21절 말씀에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그리고 베드로전서 3장 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우리가 세상에서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 된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악인이 너무나 많은 이 세상에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악인을 위해서 기도하는 우리의 모습을 세상 앞에 보여줌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해 찾아 나오도록 하려고 우리를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데반의 순교는 분명 고통이요 아픔이지만, 그의 순교는 아름다운 열매로 드러났습니다. 그는 정말 죽음의 자리에서 자신을 저주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가슴에 끌어안는 태신자로 세운 것입니다. 그의 순교의 피 값 위에 바울이라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이 세워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게 무더운 여름 속에서 달이 9월로 접어드니까 참 놀라운 것은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지 않습니까? 벌써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습니다. 저는 가을이 오면은 늘 제 마음속에 되뇌어지는 제가 좋아하는 시인 김현성 선생의 시가 생각이 납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은 누가 뭐래도 열매를 거두는 결실의 계절입니다. 그런데 이 비옥한 시간을 가꿀 수 있는, 내가 거두어 드릴 열매가 없다면, 그건 왜 그럴까요?

이제 우리는 또 하나의 열매를 위하여 태신자를 그 동안 기도하고 오늘 그 이름을 써서 내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생이 있습니다. 욕망에 노예가 되어 사는 사람과 하나님의 은혜의 밧줄에 묶여 믿음의 향기를 나타내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난번 신문에서 두 종류의 사람을 보았습니다. 30대의 젊은 두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은 학력을 위조해서 대학교수까지 된 신 모 씨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아프간에서 인질로 잡혀 있는데 풀려날 수 있는 기회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 이지영 자매입니다. 신 모씨는 억대 빚을 진 신용불량자이면서도 외제 차를 몰고 온통 명품으로 치장하며 살다가 결국 비참한 모습으로 도피 중입니다. 전형적인 욕망의 포로입니다. 이지영 자매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여 척박한 아프간에 가서 수년간 봉사했고, 이번에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다른 이에게 양보하였습니다. 전형적인 사랑의 포로입니다. 십자가 사랑을 체험한 자만이 이해가 되는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지금 어느 편입니까? 혹시 예수 믿고 천국을 소망한다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욕망에 끌려 다니는 욕망의 포로가 아닙니까? 아니면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사랑에 이끌려 사는 사랑의 포로입니까? 이 땅에서 좀 고생스럽더라도, 이 땅에서 좀 불편하시더라도 우리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갑시다. 주님과 교제하며 살고, 주의 말씀에 반응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분명 승리의 증인자로 세워질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땅위에 펼쳐질 하나님 나라 확장을 기대하면서 우리와 함께 할 믿음의 사람을 꿈꾸며 태신자를 세우고자 합니다. 그들과 함께 십자가의 사랑을 온 누리에 증거 하고 싶지 않습니까? 다시 한번 각자 자신을 돌아보고 결단함으로 남은 생애 아름답고 복된 인생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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