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막 9:2-8)

  • 잡초 잡초
  • 537
  • 0

첨부 1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막 9:2-8)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신비로운 한 사건에 관한 것입니다. 때는 공생애의 후기로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기 아홉 달 전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몬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지 한 주간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를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변화산을 갈릴리에 있는 다볼 산이라고 하나, 요즘은 팔레스틴 북부의 헐몬 산이라는 견해가 더 유력합니다. 그 이유는, 당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갈릴리가 아닌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있었고, 다볼산은 해발 588미터의 비교적 낮은 산인데 비해 헐몬산은 2814미터의 높은 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이해하는데 어느 산이냐가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변화하신 시점에 관해서 마태와 마가는 둘 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와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셨다’고 증언하나 누가는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고 했습니다(눅 9:). 세 증인의 말이 다 맞지만, 누가가 훨씬 구체적입니다. 누가는 세 제자가 곤하여 졸다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 곧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때에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 같이 희어졌습니다. 더구나 구약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인물인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말씀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았고 그의 죽음은 신비에 쌓여 있습니다. 엘리야는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었던 예언자로서 불말이 끄는 불수레를 타고 승천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영광중에 나타나서 예수님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세 분이 나눈 대화의 내용이 무엇이었을까요? 누가는 증언하기를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였다’고 하였습니다(눅 9:30,31).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실 것에 관해서 말씀을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세 제자는 그 영광스러운 광경에 넋을 잃고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가 말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이에 대하여 마가는 말하기를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고 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에서 베드로는 변화산의 경험에 대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고 했습니다. 세 제자가 놀라고 두려워하는데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님과 자기들뿐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본문에 근거하여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함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범죄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요 3:17).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마귀의 종 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되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하십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제자 빌립이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합당한 것이요, 그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한 귀결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산 위에서 변형되신 예수님을 뵙고 두려워하는 세 제자에게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내 생각대로 살자 하면 안 됩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은 주님의 보혈로 사신 바가 되었으므로 더 이상 자기 뜻대로 살면 안 되며,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고 하신 대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의 고집과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타락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제 뜻을 좇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뱀의 말을 곧이듣고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허황된 욕심을 품고서 금하신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타락했습니다. 이처럼 죄는 불순종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귀는 항상 예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열려 있어야 함을 아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한다면 그 때는 마귀의 말에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듣지 않고 마귀의 말도 듣지 않고 중립적인 위치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배척하는 사람은 마귀의 말을 듣기 때문에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된 성도님들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음성에 귀 기울여 들으심으로 예수 안에 있는 풍성한 생명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야에 대하여 예언하기를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고 하였습니다. 시편 23편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고기를 얻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털을 얻기 위해서 양을 키웠습니다. 그러므로 목자와 양들은 오래 동안 함께 지냈습니다. 불성실한 목자인 삯꾼이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대부분의 목자들은 성실하게 양들을 보살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기 위해 사울 왕을 면담하면서 자기가 양을 칠 때 맹수가 새끼를 물어가면 끝까지 쫓아가서 맹수를 쳐 죽이고 양을 찾아왔다고 하였는데, 이는 비단 다윗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성실한 목자라면 누구나 그같이 하였다고 합니다. 양들의 안위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려는 정신이 없이는 목자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9장 36절에 이르기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의 심정으로 인생들을 대하셨음을 말해 줍니다. 양은 목자의 보살핌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듯이, 우리는 주님의 보살핌 아래서만 안전을 보장받고 생명을 누릴 수 있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마귀의 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양은 소처럼 힘이 센 것도 아니고 말처럼 빨리 달릴 수도 없고 사자처럼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도 없습니다. 그저 순하디 순해서 자기를 방어할 능력이 없는 것이 양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목자 잃은 양과 같습니다. 그런데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자기의 양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주님의 양이 된 성도들이 할 일이 있으니 그것은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28)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고 하셨습니다.

양은 적을 방어할 능력이 없지만, 한 가지 탁월한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어두운 밤에는 자기 목자인지 아닌지 눈으로 분간이 되지 않지만 그 음성을 들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제 목자가 아니면 따라 가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집니다. 성도들은 우리 영혼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만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되지, 만약에 마귀의 음성에 귀 기울이면 무서운 파멸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하신 말씀대로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우리가 마땅히 행할 바를 지시 받기 위함입니다.

산 위에서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목격한 제자들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의 머릿속에 불현듯 여기 장막을 짓고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다가가서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것은 무슨 이기심에서 나온 발상이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그가 자기들을 위해서 초막을 짓겠다고 하지 않은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하여 초막을 짓겠다고 자청했습니다. 눈부신 영광 가운데 나타난 세 분을 위해서 풀과 나뭇가지를 엮어서 만든 초막이 어울릴 리가 만무합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자기의 제안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연약한 인간의 한계입니다.

때로 우리는 자기를 완벽주의자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완벽이라는 말은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람은 완벽을 추구할 뿐이지 완벽에 도달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적에 보여준 결단에 감탄합니다. “나를 따르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베드로와 안드레는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좇았습니다. 마태는 세관에 사표를 던지고 즉시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영적인 성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다만 주님께서 유대의 왕이 되셔서 다스릴 줄로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왕이 되시면 저들은 높은 지위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노중에서 누가 더 높으냐고 다투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주의 나라에서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주소서” 라고 부탁했습니다. 삼년이 넘도록 주님을 따라 다니면서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 때까지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어째서 그 같은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그것은 저들이 그릇된 선입견에 사로 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저희가 모였을 때에 제자들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까지 제자들은 유대 나라의 회복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주시고 주님의 뜻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자기들의 뜻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한 다락방에 모여서 성령 받기 위해서 열흘 동안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리했더니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도행전 2장 3절 이하에 보니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 결과 성령을 받았고, 이 땅에 교회가 세워졌으며, 복음이 세계 방방곡곡으로 전파되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대로 살아도 별 탈이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제 생각대로 살면 아무 선한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이는 전자는 육신에 속한 사람들이나 후자는 영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영적 원리에 의해서 살아야 형통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자기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한다면 그 영광의 순간에 초막 짓기를 구했던 베드로처럼 어리석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써 오순절 날 성령 받은 사도들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쓰임 받는 일꾼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네 번째 이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기 위함입니다.

산 위의 영광스러운 광경은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음으로 사라졌습니다. 그 때,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세 제자가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거기에는 모세도 엘리야도 빛난 구름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이 말씀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에 속합니다. 모세는 율법을 전해 주었고, 엘리야는 선지자들을 대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와 엘리야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들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지, 그들이 그리스도는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려줍니다. 만약에 모세의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 하면 율법 때문에 망하게 됩니다. 또 선지자들의 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해박한 성경 지식이 아무 유익도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해야지 세상에 한 눈 팔면 신앙의 길에서 이탈하고 맙니다. 데마는 한 때 사도 바울을 도와서 열심히 일했던 사람이었으나 언제부턴가 예수님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세상을 바라보다가 그만 세상을 사랑하게 되어 사명을 저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나갔습니다. 오늘날도 데마와 같은 신자들을 볼 때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만 바라보아야지 사람을 바라보면 안 됩니다. 우리 주위에는 한 때 교회 생활을 했으나 시험에 들어서 신앙을 저버린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사람을 보고 시험에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신앙이 애초부터 잘못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물론, 우리가 연약하여 시험에 전혀 들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렇더라도 우리 주님을 등지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으로 인해서 시험이 다가오면 그럴수록 더욱 더 깨어서 주님께 더 가까이 하는 것이 바른 믿음을 가진 성도의 자세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할 때 마음눈이 밝아져서 예수님을 바로 볼 수 있게 됩니다. 크로스비 여사는 생후 6주 만에 장님이 되었지만 열심히 성경을 읽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습니다. 그의 주옥같은 신앙시가 우리 찬송가에도 여러 편 실려 있습니다. 찬송가 204장에서 그는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도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눈에 세상과 예수님이 겹쳐 보이면 안 됩니다.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쾌락이 예수님과 겹쳐서 보여서도 안 됩니다. 오직 우리를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우리는 인류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으리만치 복잡하고 경쟁이 심한 시대를 살아갑니다. 우리의 관심을 빼앗는 일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때일수록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귀를 기울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눈을 들어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믿는 믿음 위에서 늘 생명이 충만한 삶을 영위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