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진리를 깨달음과 삶의 전환 (눅 5:1-11)

  • 잡초 잡초
  • 389
  • 0

첨부 1


진리를 깨달음과 삶의 전환 (눅 5:1-11)
 
우리 인생에는 이전까지 전혀 체험해보지 못했던 어떤 사실이나 사항을 발견함으로 말미암아 삶의 큰 전환을 이룰 때가 있습니다.
살아가다 어느 날 문득 예기치 못하게 삶의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 보통 그러한 때가 됩니다.
아이작 뉴턴이 사과나무아래에서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볼 때 왜 사과가 하늘로 날아가지 않고 땅으로 떨어질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만물은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늘에서 끄는 힘보다 땅에서 끄는 힘이 더 크기 때문에 하늘로 날아가지 않고 땅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함으로 말미암아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B.C.220년경 아르키메데스는 목욕탕에 들어가다가 자기 몸의 부피만큼 물이 밖으로 밀려나오는 것을 보고 부력의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이와 같은 과학적 발견뿐 아니라 인문학, 철학, 또 여러 분야의 발견과 발명들, 이러한 깨달음들은 우리 인류가 살아가는 삶에 큰 유익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살아가다보면 이런 과학, 철학, 인문학뿐 아니라 우리 인생의 진리를 깨달아가는 중요한 순간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 예수님께서 나와 상관이 없다가 우리들에게 문득 찾아와 어떤 상황과 여건을 통해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 우리 삶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 전혀 다른 방향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 인생이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주님이 주시는 진리를 발견하게 되면 우리 삶은 전혀 다른 은혜의 세계로 초청을 받아 새로운 삶의 전환을 이루게 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된 것도 우리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이 자리에 부름의 응답으로 온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마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처음 나오신 남자형제들이 있는데 어떻게 해서 오셨습니까?
잘 알고 있는 친지, 혹은 직장에 있는 분들, 혹은 가까이 사시는 분들, 혹은 멀리 살아도 마음으로 가까운 분들의 초청을 받아서 이 자리에 오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초청은 그들이 한 것이 아니라 목사가 좀 모시고 오라라고 초청을 한 겁니다. 또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목사에게 “사람들 데리고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어 드리고 같이 예배할 수 있도록 하라.” 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에 대한 초청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이고, 우리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고, 우리 목사나 아니면 여러분 주변에 있는 형제나 자매들은 그 일을 전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을 것이고, 여러분 마음에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 있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오신 것입니다.
"교회에 한 번 가시지요." “예배한번 같이 드립시다.” 하고 초청을 받았을 때
“잘 됐습니다. 내가 그렇지 않아도 교회에 가려고 생각했는데 오늘 너무너무 잘 됐습니다.” 하고 이 자리에 오신 분은 거의 없을 겁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혹시 이런 권면을 이전에도 많이 받아 보셨을 텐데 그냥 좀 가기 싫어서, 왠지 모르게 어색해서, 또 이러저러한 이유로 핑계하다가 이번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거절할 수 없어서 이 자리에 오신 분이 아마 대부분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마음에 원하는 마음이 있어서 오신 거지요. 그런데 피치 못할 사정이나 아니면 거절하지 못해서, 혹은 오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하는 그런 마음을 주장하신이가 누구냐 하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주장해서 ‘에이, 한 번 가주지 뭐. 한 번 가야 되겠다. 가고 싶었는데......’ 이런 마음을 주셔서 이 자리에 오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 예수를 믿는 믿음의 사람의 언어로 활용을 하면 하나님의 섭리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발로 걸어서 오신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이쪽으로 올 수 있는 기회와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것을 보면서 우리의 모든 삶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속에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성경을 보면 베드로가 어떻게 진리를 깨닫고 또 그 진리를 깨달음 가운데 그의 삶에 획기적인 전환의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베드로는 게네사렛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입니다. 그런데 그 어부, 전문적으로 물고기를 잡는 직업이 어부인 베드로가 게네사렛 호수에서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았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기후가 척박한 지역입니다. 그래서 물이 귀한 나라인데 이 게네사렛 호수 - 갈릴리 호수라고도 불리는데 이 호수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가지고 용수로 삼고 또 식수로 삼아서 그 나라의 사람들이 먹고 농사를 짓고 하는 분량이 얼마냐 하면 이스라엘 전체 땅의 약 3분의 1이 이 게네사렛 호수에서 나오는 물을 가지고 용수로 삼아서 먹기도 하고 농사를 짓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나라의 3분의 1을 이 호수가 살리고 있는 모습이니 이 호수가 나라의 젓줄과 같은 중요한 원천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호수지만 바다처럼 굉장히 큰 호수입니다. 그런데 이 호수에서 베드로는 날마다 물고기를 잡아서 먹고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물고기를 잡는데 낮에 잡나요? 밤에 잡나요? 어부들이.
낮에 물고기를 잡기도 하지만 여러분이 바닷가에 가서 혹시 밤에 주무셔보신 분이 계시면 아실 겁니다. 밤에 보면 바닷가에 마치 불야성을 이룬 것처럼 물고기 잡는 배들이 등을 켜고 환하게 바다에 널려져 있는 것을 봅니다. 어떤 때 아주 추운 겨울에 정말 너무너무 추워서 안에서 따뜻한데서 창문 밖으로 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추운날도 배가 떠 있는 거예요.
그때마다 이런 생각 들죠? 우리는 추워서 이 안에서 따뜻하게 있는데 어떻게 저렇게 추운 바다에서 차가운 파도와 더불어서 싸우면서 물고기를 잡을까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물고기를 잡아야 물고기를 팔아서 애들 학교 보내고, 또 먹을 것을 사고, 또 그들이 주거할 집을 따뜻하게 데우고, 또 그들의 삶을 영위하니까 그렇게 할 것입니다.

추운 바다, 차가운 파도에도 불구하고 어부들은 물고기를 밤에 잡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린 그 생각하면 사람들이 사는 게 참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디 추운겨울 바다에서 밤에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만 그렇게 힘들게 사는 것일까요? 우리 인생들 모두 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생각해 보면 각자 나름대로 안타까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가운데 이제 베드로가 밤에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밤이 새도록 힘을 들여서 그물질을 했는데 안타깝게 그날따라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살아가다보면 이런 날이 있겠지요. 베드로는 왠지 모르게 허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마음에 실망하고 허전해 있을 때 예수님이 갑자기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깊은데 그물을 내려라"

그런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베드로가 생각하기에 나는 직업적인 어부이고, 평생을 이 게네사렛 호수에서 물고기 잡아서 먹고 살던 사람인데 내가 오늘 밤이 새도록 그물질을 했으면 깊은 데는 안 던져봤고 얕은 데는 안 던져봤겠느냐? 그리고 고기가 많은 데를 내가 알지 않겠느냐? 그런데 괜히 생뚱스럽게 나와서 깊은데 그물을 던지라니 이게 무슨 말이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날따라 마음에 어떤 감동이 있었던 같습니다.
‘한 번 더 던져보는 거 그게 뭐 힘들겠는가? 뭐 여태까지도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그냥 한 번 더 던져보지.’ 하는 마음으로 던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깊은데 그물을 던졌습니다.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혔습니다. 자기 혼자 끌어 다녀서 담아서 배에 실을 수가 없어서 친구를 오라고 했습니다. 이 친구의 배가 신호를 받고 와서 그 고기를 다 건져서 한 배에 실을 수가 없어서 두 배에 나눠 실었습니다. 그러니 그 친구의 배가 그날 밤에는 고기를 많이 못 잡았던 것 같습니다. 두 배에 가득 물고기를 싣고 뭍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더니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합니다.
뭐라고 인사를 했냐면 “예수님 물고기 많이 잡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이것 팔아서 예수님께 뭔가 훌륭한 것, 원하시는 것 사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인사하지 않고 엉뚱하게 인사한 겁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아니 물고기 잡는 것하고 죄인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베드로는 그렇게 예수님께 고백하고 인사를 했던 것입니다.
무엇이냐 하면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는 과정 속에서 예수님은 물고기를 잘 잡게 해주신 분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물고기를 잡는 전문적인 기술을 가지고 나에게 물고기를 잡게 하신 분이 아니라 나라는 인간이 할 수 없는, 나라는 인간이 볼 수 없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그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때는 현상을 보고 현상을 파악하고 우리는 그 현상 속에서 어떤 일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하면 그 현상을 움직이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잖아요.
현상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해 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깊이 파악해 보니까 예수님은 물고기 잡는 기술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능력을 넘어서는, 신적인 영력이 계신 분이라는 것을 베드로는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의 그와 같은 신적인 권세 앞에 나를 생각해보니 나는 너무나 누추한 죄인으로서 내가 주님 앞에 서 있을 수 없습니다. 나를 떠나시옵소서. 하고 자기의 누추함을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냐면
"이제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베드로가 밤새도록 못 잡아서 안달을 했던,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많이 잡아서 가슴이 부풀었던 그 물고기를 버려두고 심지어는 물고기를 잡는 그물도 버려두고 배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 베드로 뿐 아니라 베드로 옆에 있던 안드레, 그가 불렀던 친구 야고보, 요한도 같이 예수님을 좇았어요.

그 시간부터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예수님께 3년 동안 가르침 받고, 예수님의 기적의 현장에서 기적을 목격했고, 기적의 떡을 먹고, 그것을 나누어주는 장면에 함께 있었고, 이제 예수님을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그들은 실망하여 뿔뿔이 흩어졌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다시 모으셨고 그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은 이 지상 끝까지 복음을 전할 것을 명령하셨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남은 그들은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한 끝에 오순절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체험하고 나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 땅 끝까지 전하는 일에 헌신하게 되었고, 그들은 그 일을 하다 순교하여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가슴속에는 그 복음이 전해지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 우리는 아름다운 믿음의 역사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장면은 그러니까 물고기를 잡는데 어떻게 많이 잡게 해 주었는가 하는 장면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택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는 이와 같은 부르심의 장면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 가운데 특별한 진리를 깨닫게 하는 순간을 주시고 그 진리를 깨닫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삶의 일대 전환을 이루게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예수님은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이와 같은 장면 속에서 우리는 첫 번째 우리가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때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즉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게 될 때 인간들은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는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밤이 새도록 물고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단 말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한계를 생각했을 겁니다. 나는 기술도 있고, 경험도 있고, 나는 노력도 했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으로서 가지고 있는 한계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얻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합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거둔 것이 없습니다. 왜 심은 대로 거두지 못합니까? 라고 생각할 때 또 한 가지 생각하는 것이 있지요?
‘아, 그럼 내가 거둘 만큼 심지 못했구나! 거둘 만큼 심지 못했구나! 내 능력이 무엇인가를 거둘 수 있을 만큼 심을 능력이 안 되는구나!‘ 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자신의 한계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노력하고 노력했는데 왜 결과가 없습니까? 이렇게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내 노력이 어떤 결과를 이룰 만한 능력 있는 노력이 못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거기서 능력의 한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깨달을 때 인간들은 좌절하지만 우리 인간들의 한계를 깨닫게 될 때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주님은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요즘 분당톨게이트 7시 되면 벌써 막히기 시작하나봅니다. 전에는 7시 30분 정도 됐는데 이제는 7시로 당겨지고 앞으로는 6시 30분으로 바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찍 일어난다고 일찍 들어옵니까?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어도 헛되도다' 하는 성경말씀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일찍 나가서 늦게 들어와도 손에 쥔 것 아무것도 없고 무거운 어깨로 벨을 누를 때 우리 인생의 어떤 한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모세는 우리 인생을 일컬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수고한 일, 슬픔을 극복한 일,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보니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수고했지만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인생이 이렇게 수고해도 아무것도 없는 한계에 도달했을 때 그것이 우리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인생 끝장이야. 너는 밤새도록 수고해도 고기도 못 잡으니까 어부 끝내.’ 이게 아니었단 말입니다.
무엇인가 우리 삶에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은혜의 국면을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왜 진리를 발견하게 될 때 인간은 이런 한계의 지경에 이르르게 하시는 것일까요?

인간은 조그만 여지만 있어도 주님께 나오지 않고 자신의 방법을 다 사용해 봅니다. 여러분 사람이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서 도망친다고 합시다. 뒤에 쫒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쪽 보니까 골목 끝입니다. 막다른 골목이라서 막혀져 있습니다.
그럼 사람이 끝까지 가봐야 소용없다. 여기서 차라리 돌아서서 항복하거나 아니면 싸워보자. 이렇게 할까요? 아닌 것 같아요. 끝까지는 도망쳐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도 여지가 있으면 우리는 끝까지 도망치고 우리 방법 다 사용합니다. 그러다 방법이 없을 때 주님 앞에 돌아오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의 한계 속에서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자신의 한계입니다. 그 가운데 주님이 물고기를 잡도록 해 주셨을 때 내 능력과 주님의 능력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면 부끄러워하거나 극단적으로 삶을 포기하고 좌절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인생은 근본적으로 애써도 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면에서는 그것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밤새도록 물고기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물고기를 잡는 장면을 통해서 베드로의 한계를 깨우쳐주시고 그것으로 베드로에게 새로운 국면을 열어주셔서 베드로는 그의 제자로 택하셔서 베드로가 이제는 물고기를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물고기를 쫓아다니지 않고 예수님 쫓아다녔고 사람에게 다니며 주의 복음을 전하게 되었어요. 만약에 베드로가 그 당시에 물고기를 잡는 일을 가지고 사람에게 그의 명성을 날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베드로는 당대에 물고기를 최고로 많이 잡는 사람, 부자가 된 사람, 이렇게 일컬어졌을지 모르지만 2000년이 지난 지금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때때로 우리가 한계를 발견했을 때-내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국면 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새로운 은혜로 하나님의 은총의 세계로 전환하라는 말씀으로 듣고 우리는 새로이 일어나 방향을 전환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살아가다 우리 자신의 한계를 보았습니까?
내가 해도 안 돼. 심는 대로 거둔다고 했는데 난 심어도 거둘 수가 없어.
불공평한 것이 아니라 내 능력이 심어도 날 만큼의 능력이 못 되는 거야. 내 한계가 그것이야. 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우리는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새로운 큰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의 삶을 이루는 세계로 전환해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는 언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까?
예수님의 능력을 발견할 때 우리는 우리 삶의 진리를 발견합니다. 주님의 능력을 발견한 이후에 우리는 주님에 대한 깨달음을 가지게 됩니다.
베드로는 한 마리도 물고기를 못 잡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 한 마디에 따라 물고기를 두 배에 가득하게 잡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님의 능력을 발견했던 겁니다.
주님이 무슨 능력이지요? 물고기 잡는 능력이 아니라 우리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계시다는 주님의 영적인 능력의 눈이 떠졌던 것입니다. 그러니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해 주신 주님 앞에 주님 주님은 천하에 최고의 어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에게는 진정한 지혜가 있었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가 알아내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우리 학교 다닐 때 배운 것 중의 하나가 독해력입니다.
우리 학교 다닐 때 어떤 지문을 하나 주고 그것을 읽게 한 다음에 이것의 주제는 무엇인가? 이런 거 많이 했잖아요. 그리고 1번, 2번, 3번, 4번,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것 하나 딱 고르면 대부분 틀렸습니다.
그래서 그런 문제 많이 풀어보면서 점차적으로 어떤 지문에 대한 독해를 해내는 능력을 배우게 되지 않습니까?
사람과 대화할 때도 그 사람이 무슨 말인가 빙빙 돌려서 하고 말을 하기는 하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아요. 그 때 독해력이 있는 사람은 저 사람이 하고 싶어 하는 말이 무엇이라는 것을 정확히 파악해 냅니다.
지금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 말을 차마 못 꺼내는 겁니다. 또 무엇인가 저 사람이 하는 얘기가 있는데, 주제는 있는데 그것을 저 사람이 간략하게 요약해서 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빙빙 돌아다녀요.
그렇지만 그걸 듣는 사람은 그 사람이 무슨 얘길 하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정확히 파악한단 말입니다.

오늘도 설교 말씀 듣고 가서 오늘 목사님은 예수님이 물고기 잘 잡는 어부라고 알고 가셨으면 이건 독해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예수님은 물고기 잡는 것을 통해서 우리 인간과 다른 능력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을 보여주시는 거야 그러니 베드로는 그것을 보고 우리 인간과는 다른 신적인 세계에 속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그가 고백하고 그 결과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어. 하면 이것은 올바른 독해가 됩니다.
엉뚱하게 본질을 놔두고 지업적인 말만 빙빙 돌아서 한단 말입니다.
얘기하면서 내가 하려고 하는 얘기는 이게 아닌데 하면서 자기가 마음에 있는 얘기를 제대로 설명 못하는 겁니다. 그것을 보고도 우리가 그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 독해력이 있는 겁니다.
물고기 잡는 예수님에게서 우리와 다른 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분이다 라는 것을 파악해 내는 게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특별한 독해적인 능력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발견하고 나니까 베드로의 마음이 달라졌던 것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물고기를 잡으며 살고 싶어 했는데 이제는 뭔가 내 마음에 다른 소원도 충분히 생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발견한 후라면 이제는 내가 살던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또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가치에 대한 문제를 늘 생각하게 됩니다. 어느 날 가치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생각을 하게 되면 그의 삶이 달라지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잠을 자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잘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돈을 한 번 여봐란 듯이 벌어보고 싶었습니다. 권력을 쥐고 싶었습니다. 원하는 자리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게 꿈이었습니다.
새로운 가치에 대해서 눈을 뜹니다.
돈 버는 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야.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이 전부는 아니야. 내가 인간답게 살아야지. 돈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려졌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추고가 있었습니다.
내가 돈을 벌어서 내가 선한 일을 하고 어떤 위대한 일을 하는 것도 좋아. 그런데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어차피 내 인생 한 번 마치게 될 텐데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야. 내가 이 세상 떠나면 어떻게 되는 거야? 내 인생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제 그에게는 영원한 영적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께 이런 인사를 하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여러분 내년 이맘때 이 자리에서 꼭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럼 여러분 "아멘" 하고 인사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인사 안하시는 분은 내년에 못 만나게 됩니다. 세상 떠날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내년에 이 자리에서 이맘때 꼭 만납시다. 할 때 자신있게 "아멘"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우린 내일 일을 몰라요.
내년 이맘때 우리가 살아있다고 누가 다 보장을 하겠습니까?
저희 교회 일 년에 장례가 200가정정도 됩니다. 이번 주에는 장례가 별로 없는데 보통 200가정정도가 장례가 있습니다.

저도 목사로서 장례를 참 많이 치룬 목사인데 장례에 갈 때마다 참 마음에 느껴지는 것이 많습니다.
처음에 제가 초반기에 교회에서 장례를 치를 때 우리성도들이 세상을 떠나면 그렇게 마음이 슬프고 눈물이 나서 장례를 집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장례를 집례 할 때 그렇게 눈물이 많이 안 나는 것 같아요. 목사가 익숙해지니 맹맹해졌구나! 이렇게 느끼십니까?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요즘은 장례를 많이 치르다 보니까 삶과 죽음의 간격이 좁아진 것 같습니다.
삶과 죽음이 그렇게 큰 간격이 있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어제까지 숨 쉬다 오늘 그냥 숨 안 쉬면 세상 떠난 겁니다.
그 간격이 굉장히 좁아집니다.
어떤 그 감정이 거기에 비해서 막 극렬히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제 숨 쉬고 오늘 숨 안 쉬면 또 세상 떠난 거구나!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살고 있는데 이쪽 세상에서 살고 있다가 저쪽 세상으로 가는구나! 하는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언젠가 뉴스보다가 이런 내용을 봤습니다.
우리나라 암센터 소장을 하시는 분인데 나와서 얘기하십니다. 요새 보니까 남자는 세 명 중의 한 명이 암으로 죽고 여성분들은 다섯 명중의 한명이 암으로 죽는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는데 나와서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암에 걸릴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압니까? 앞으로는 암에 걸릴 확률이 50%정도 될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연설명을 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부부 중에 한 명은 암에 걸리는 겁니다." 이렇게 얘기하시면서 얘기는 그걸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나 암에 걸렸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누구나 다 걸리는 것인데-부부 중에 한 사람은 걸리는 것인데 그냥 친한 친구처럼, 내게 있는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친구 대하듯이 잘 관리하며 함께 가다가 우리가 이 세상 마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서 “암에 걸렸다고 특별히 실망하거나 그러지 말고 잘 다스리며 관리하면서 친구처럼 살다 이렇게 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이렇게 얘기하면서 설명을 하더라고요.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참 내일을 알지 못하잖아요. 어느 날 멀쩡했던 사람이 의사선생님하고 얘기하더니 갑자기 생이 꼬부라져요. 건강하게 뛰어다녔는데 갑자기 기울기 시작합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내일 일을 알지 못 합니다.
<너희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 수 없음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가 병원에 심방을 해 봤더니-목사는 이렇게 방문하는 것을 심방이라고 말합니다.
어린이들만 있는 병동이 있더라고요. 암병동인데 애들만 있습니다. 가니까 조그만 갓난아이부터 조금 큰 애, 조금 큰 애들까지 전부 애들만 거기에 가득합니다.
언젠가 제가 참 가슴 아픈 일이 있었는데 낳은 지 얼마 안 된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가 세례를 주기 원해서 제가 병원에 갔습니다. 아이는 유리창으로 된 저쪽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이쪽으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울면서 그래도 세례를 베풀어달라고 해서 제가 그 아이를 보면서 그 앞에 유리 창 쪽에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아버지 머리에다 손을 얹고 물을 부으면서 세례를 베풀어드렸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아이에게 세례를 주는 마음으로.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집에 심방을 해 보니까 산모는 얼굴이 퉁퉁 부어서 누워있었습니다. 산후조리를 해야 하는데 아이는 죽었고 그 소식을 들었고 얼마나 눈물을 흘리고 몸도 얼굴도 마음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참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고 때로는 이런 진한한 슬픔을 겪게 된다.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 세상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그것은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이 세상 뒤에 무엇인가 분명한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우리는 생각합니다.
오늘 베드로는 이와 같은 우리 인생의 한계를 생각한 겁니다. 내가 그렇게 밤새도록 못 잡았는데, 한 마리도 물고기를 못 잡았는데 예수님은 말 한마디로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예수님의 능력은 우리의 능력과는 다르다.
예수님은 주님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주님의 그 은혜 앞에 나를 비춰보니 나는 너무나 누추해서 주님 앞에 있기가 부끄럽습니다. 주님 정말 나 같은 죄인에게서 주님께서 이렇게 떨어지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와 같이 얘기한 겁니다.
자신의 누추함을 설명한 겁니다. 예수님 없어지라는 말이 아니라.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겁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들은 따른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을 발견할 때 예수님의 그 능력 속에서 신적인 능력을 파악해 내는 겁니다. 그 때 우리는 진리를 발견하는 겁니다.


세 번째는 지금까지 추구하던 가치보다 더 고귀하고 아름다운 가치를 발견하게 되면 우리 인생은 진정한 새로운 삶의 전환을 이루게 됩니다.
왜 베드로가 그렇게 밤새도록 갖고 싶어 했던 물고기 많이 잡았는데 그 물고기 가지고 팔아서 잘 쓰지 왜 그 물고기도 버려두고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배도 버려두고 그물도 버려두고 또 심지어는 안드레, 요한, 야고보까지 예수님을 쫓았을까요?
그들이 이제까지 추구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아름다운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인들은 여러 번 따라했지만 한 번만 더 따라합시다.
자 따라서 합시다.
"상위가치, 하위가치"
사람들은 보통 하위가치의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정말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상위가치의 높은 가치를 발견합니다. 그것을 딱 붙잡았습니다. 그때부터 하위가치라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하위가치가 의미가 없어져서 상위가치를 붙잡고 이제 하위가치는 다 버리는 겁니다.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머니 가득 금덩어리가 있습니다. 누구한테 금덩어리를 받았습니다. 공짜로.
너무너무 기뻤습니다. 금덩어리 팔아서 나는 부자가 되고, 내가 하고 싶은 것 하고, 내가 사고 싶은 것 사고, 내가 누구에게 주고 싶은 것 주고 하면서 인심한번 써봐야 하겠다. 기쁜 마음으로 그는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서더니 눈이 이만해지면서 깜짝 놀라더니 갑자기 금덩어리를 다 밖으로 버리는 겁니다.
왜 그렇죠? 우리 교인들은 알아요. 대답하지 마시구요.
이 사람이 갑자기 본 것은 다이아몬드입니다. 거기에 이렇게 써있습니다.
마음대로 가지십시오.
다이아몬드가 금덩어리보다 더 비싸잖아요. 금덩어리를 다 버리는 겁니다.
이거 소용이 없어. 소용없어. 그리고 다이아몬드를 자기주머니에 가득 채워서 가지고 가서 팔아 쓰려고.
다이아몬드가 상위가치, 금덩어리가 하위가치, 상위가치를 위해서 하위가치는 헌신짝같이 버리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예수그리스도의 고상한 진리의 도를 깨닫고 나니 내가 이전에 누리던 나의 모든 자랑거리가 다 배설물처럼 여겨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위가치입니다. 상위가치를 생각하고 붙잡으면 하위가치는 의미가 없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진심으로 자기의 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니까 물고기, 물고기 잡는 배, 그물, 그것은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겨진 겁니다.

그러므로 그 삶에는 새로운 방향의 전환과 가치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된 겁니다.
우리 인생은 절대가치 속에 기뻐하지 않고 언제나 비교우위 속에 기뻐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잘 모르시겠지만 분당에 16년 전에 처음 입주할 때 저는 여기 처음 입주하던 그 주일에 여기 분당에 왔거든요.
1991년 9월 30일 월요일에 첫 번째로 입주를 했습니다. 교회는 그 주일 토요일 10월 5일에 첫 번째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10월 6일 주일에 첫 번째 주일예배를 드리고요. 그리고 성도들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제가 심방을 하면 목사가 은혜로운 말씀을 끼칠 것도 없습니다. 본인들이 다 알아서 은혜를 받더라고요.
"기도제목 있습니까? 기도해 드릴게요." 하면
"목사님 우리 너무너무 감사해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너무 좋은 집을 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해요. 나는 이제 집에 대한 소원은 다시없어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몇 달 있다가 심방을 가니까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다른 집도 가보고 또 구역예배도 드려보고 하더니 다르게 얘기를 합니다. 뭐라고 하냐면
"목사님, 우리 집이 조금만 더 넓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기껏 행복해 하더니 갑자기 몇 달 지나더니 행복이 조금 덜 행복해 지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절대가치를 가지고 행복해 하면 좋은데 비교적, 상대적, 이와 같은 것을 가지고 행복해 하니까 늘 마음에 차지를 않습니다.
조금 나아지면 또 더 나은 것, 또 나아지면 더 나아진 것, 늘 말씀드리지만 갖고 싶은 것 가지면 보장받고 싶어 합니다. 보장받고 싶어 하면 지루해 합니다. 권태를 느낍니다.

우리 삶에 영원한 인간적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절대가치를 발견하게 될 때 우리 삶은 달라지는 겁니다. 절대적인 상위가치를 발견할 때 우리 삶은 달라지는 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자기의 한계를 보고, 진리를 깨닫고, 이제 그의 삶에 방향전환을 이루게 된 겁니다.
인생의 선택과 전환은 매우 중요합니다. 새로운 선택을 통해서 인생의 전환을 이룰 기회가 주어졌을 때 선택과 전환하지 않으면 우리 인생의 기회는 오지 않습니다.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도 나는 내 인생의 새로운 재발견과 새로운 선택과 그것을 통해서 내가 있는 자리를 빛낼 수 있는, 또 뿐만 아니라 내 삶을 빛낼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빛낼 수 있는 이와 같은 은총과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모든 것 다 때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은혜의 때를 주시면 우리는 그 은혜의 때에 우리 삶에 올바른 선택과 은혜를 이루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동차 타고 가면 봄에는 파릇한 산의 모습, 여름이 되면 녹원의 울창한 모습, 가을이 되면 울긋불긋한 단풍의 모습, 겨울이 되면 눈 덮인 산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자동차 차창을 통해서 이렇게 보고 가는데 자동차 차창이 얼룩얼룩하고 덕지덕지 붙어있으면 밖의 풍경이 깨끗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동차 창문을 깨끗하게 닦으면 창문 밖의 풍경을 수려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죄악으로 말미암아 흐려지고 이끼가 많아지면 하나님의 아름다운 은혜의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의 죄를 씻어내고 마음의 창을 맑게 만드는 것.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죄를 사한다, 내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한다, 쉬운 말로 이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회개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는 회개를 하게 되면 우리 마음이 씻겨져 깨끗하게 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주의 뜻대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우리 마음을 맑게 닦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죄를 사하는 회개의 역사입니다.
그때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보이고 은혜의 역사가 보이게 되는 겁니다.

베드로는 오늘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주님의 능력을 보고 그 자신이 회개하며 하나님의 세계를 보게 된 것입니다.
오늘 제가 1부,2부 때도 보니까 저희 교회 처음 나오신 남자성도들이 꽤 되시는 것 같습니다. 요즘 시대에 남자어른이 교회에 새롭게 나온다는 것이 결코 흔한 일이 아닌데 여러분 이 자리에 나온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굉장히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것 같아요.
진심으로 반갑고 환영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해서 인간을 에덴 낙원동산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자신도 하나님 같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낙원에서 추방당했습니다. 하나님과 분리가 된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분리된 것을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분리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하나님께 갈수가 없었어요. 그러므로 영원한 죽음, 암흑의 세계에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쫒아내긴 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슴아파하며 무슨 생각을 하신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들의 죄를 위하여 죗값을 주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죄를 대신 씻어주시고 인간들이 예수님을 믿으며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내 죄의 대가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내가 그것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믿음의 도를 우리들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역사를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다시 하나님과 연결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것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의 삶을 살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날 하나님의 은혜의 낙원에 거하게 되는 은총의 삶을 살게 되는 거지요.

오늘 우리는 바로 그와 같은 모습에 우리 형제들을 초청하기 위해서 오늘 이와 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겁니다.
예수 믿는 것은 이 세상에서 어려운 문제 해결되고, 시험에 떨어진 아이들이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또 뿐만 아니라 안 되는 사업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만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물고기 못 잡던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는 과정을 통해서 '아, 주님은 물고기를 잡게 하는 분이구나! 내 사업을 성공시키는 분이구나! 아니면 내 아이들 합격시켜주시는 분이구나!' 라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아, 하나님은 정말 우리와는 다른 영적인 세계 속에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구나!' 하는 발견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바뀌어지는 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의 세계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귀한 형제들, 그리고 모든 성도님들, 바로 이러한 주님의 진리를 깨닫고 주님의 은혜 속에 우리의 삶의 방향을 전환하여 믿음의 역사를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