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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생활의 최고봉 (마 5:43 -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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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의 최고봉 (마 5:43 - 48)

크리스천 번역자가 빅톨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현대감각으로 번역하여
    기적의 원동력이란 제목으로 발간되어 나왔습니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인 장발장은 배가 고파 빵 한 조각을 훔쳤다가
          19년 형을 언도 받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나왔을 때 어느 누구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지만,
<미리엘> 주교만은 그에게 호의를 베풉니다.
그러나 장발장은 그런 주교의 집에서 은촛대를 훔쳐 달아납니다.
도망을 가던 장발장은 순경에 체포되어 다시 미리엘 주교 앞으로 끌려갑니다.
순경이 주교에게 은촛대를 도둑맞지 않았느냐고 묻자,
    미리엘은 자신이 장발장에게 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둘 다 주었는데 왜 하나만 가지고 갔느냐?`며
      나머지 은촛대까지 내어줍니다.
장발장이 욕망에 따라 행동한 것과 달리
미리엘 주교의 행동은 다른 어떤 것에 기준을 두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기적의 원동력이 무엇입니까?
장발장이 새사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밝아진 것은
      바로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명절을 맞이하면 많은 친지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친지 가운데서는
    네게 호의와 친절을 베푸는 좋은 분들도 있지만
    그 반대로 뭔가 호감이 가지 아니한다든지
      아니면 내게 피해를 주고 나를 무시하는
          반갑잖은 친지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오늘 산상수훈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내게 더 소중한 사람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미국 윌로우 크릭 교회 <빌 하이벨스> 목사는
산상수훈을 ‘세상을 뒤집어 놓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말씀은 그리스도인의 대인관계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방법으로
  가족과 이웃의 관계를 회복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대인관계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1. 세상 사람들의 대인관계의 원리는 무엇입니까?(43절)

산상보훈의 예수님의 가르침의 특징 가운데 한 가지가
계속해서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긍정적인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부정적인 차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까지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이러한 가르침을 받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이러한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마태복음 5장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실례를 다섯 가지로 일깨워주셨습니다.
첫째 예는 살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둘째 예는 간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셋째 예는 이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넷째 예는 맹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다섯째 예는 보상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여섯째 예로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웃 사랑에 대한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받은 유전에 따라서 백성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이러한 가르침을 레19:18에 나타난 성경적인 원리와 서로 비교해 볼 때,
  그들은 두 가지 원리를 모두 무시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레19:18에
[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
그러니 없는 말씀을 임의대로 집어넣었습니다.
    또 그들은 자기들의 편의를 위해서 중요한 말씀을 빼버렸습니다.
첫째, 그들은 사랑의 대상을 제한시켰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다는 원리를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이웃만 사랑하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가르침을 부각시키기 위해
    성경에도 없는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을 임의대로 덧붙였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구약성경을 찾아보아도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사랑의 대상을 제한해서
      자기의 이웃만 사랑하라고 그릇되게 가르친 것입니다.
눅10장에 보면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와서 시험적으로 질문을 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사는 서기관의 별명입니다.
서기관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손으로 베끼는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들은 손으로 율법을 베끼다보니까
자동적으로 율법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을 다른 말로 율법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율법사는 예수님에게 이러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이 질문은 무엇을 의도합니까?
  그는 자기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따로 있고,
  자기가 미워해야 할 원수가 따로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예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답변으로 주신 것이
    바로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아무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웃만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고 잘못 가르쳤습니다.
그런 잘못된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서
  그 당시 사람들은 끼리끼리만 사랑했습니다.
유대인인 자기 동족들만 사랑해야 할 이웃이라고 생각하고,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의 경우에는 무조건 미워해야 할 원수로 취급을 했습니다.
특별히 그들은 자기들을 억압하고 있는 로마 사람들을 지극히 미워했습니다.
또한 본시는 자기들의 동족이었던 사마리아 사람들까지 미워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몸속에
      이방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은 이방인의 편에 서서 일하는 사람,
  예컨대 세리와 같은 사람들도 이웃의 개념에서 제외시켜 버렸습니다.
아울러 율법을 고의적으로 범하는 사람들,
예컨대 창기와 같은 여자들도 사랑해야 할 이웃의 개념에서 제외시켰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온통 미움이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사라지고 그들의 마음 속에는 계속해서 증오심만 쌓여 갔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강퍅해졌겠습니까?
    악해질 때로 악해지고 말았습니다.
둘째, 그들은 레19:18에 없는 말씀을 덧붙였을 뿐만 아니고,
    꼭 있어야 할 중요한 말씀을 고의적으로 빼버렸습니다.
레19:18에서는 분명히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말씀은 빼버리고
      그저 단순히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만 가르쳤습니다.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사람들에게 보이기를 좋아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서 영광 받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잔칫집에 가서도 언제나 상좌에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충분히 자기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자기와 같이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세리, 창지, 죄인, 이방인과 나와 같을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래서 내 몸과 같이는 생략해 버린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떻습니까?
2. 특히 악한 사람들에 대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인관계의 원리는  무엇입니까?(44절)

44절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먼저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선대하는 우리의 이웃도 사랑해야 하지만,
우리를 원수로 취급하고 핍박하는 사람까지도 우리는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사랑의 대상에는 아무런 제한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랑의 구체적인 방법의 첫 번째로
먼저 기도하라고 합니다.
44절 하반부. [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누가 우리를 핍박한다고 해서 미워하거나 저주하지 말고,
    그를 위해서 먼저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평안이 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바뀝니다.
누가 우리를 핍박하면
    우리도 본능적으로는 그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우리의 마음이 바뀝니다.
그를 이해할 수 있고, 긍휼히 여길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깁니다.
왜? 원수나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먼저 기도하라고 할까요?
이것은 악인을 먼저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입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수학을 배울 때 미적분부터 배우는 것이 아니라
    덧셈 뺄셈부터 배우듯이 용서하고 사랑하는 법을 정말 배우고 싶다면
    좀 더 가까운 사람부터 좀 더 쉬운 대상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있는 껄그러운 사람, 미운 사람, 못된 사람, 별난 사람부터
    먼저 용서하고 사랑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였던 찰스 스펄젼 목사님은
    “기도는 긍휼의 선봉이다.”
기도가 앞서가면 반드시 그 뒤에는 긍휼이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위해서 축복하는 기도를 하게 되면
    그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절로 우리의 마음속에 생기게 마련입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미운 생각이 듭니까?
그를 위해서 진정으로 축복하면서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의 마음이 바뀌고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왜? 원수와 핍박하는 사람들
  즉 악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랑하며 기도해야 합니까?

3. 왜 악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랑하며 기도해야 할까요?(45-47절)

예수님은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할 이유를
우리에게 두 가지로 일깨워주셨습니다.

1)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아버지를 본받아야 합니다.
45절 [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의 구분이 없이
      또한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의 구분이 없이,
때에 따라서 햇빛을 내려주시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도 불의한 사람에게도 햇빛과 비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언젠가는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하나님 아버지의 너그러우심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은 미워하고 원수로 여긴다면,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자녀로서 떳떳한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2) 둘째, 우리는 천국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46∼47절 [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어떠한 수준입니까?
자기들이 원수처럼 취급하면서 미워했던
      세리나 이방인의 의의 수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런 의를 가지고 천국의 백성이 되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천국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는 당연히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는 나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이웃도 사랑해야 하지만,
    우리의 원수까지라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선교사였던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선교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를 받는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그가 한 번은 자기와 함께
  중국 선교에 힘쓸 동역자들을 모집하기 위해서 잠시 귀국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서 여러 명이 중국 선교사로 지원을 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과연 그들에게 중국 선교사로서의 사명감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이러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러분은 왜 중국에 선교사로 가려고 하십니까?`
그 질문에 따라서 그들은 차례대로 한 사람씩 답변을 했습니다.
`저는 중국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곳에 선교사로 가려고 합니다.`
`저는 중국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합니다.`
`저는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고 하신
    지상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선교사로 지원했습니다.`
그들은 각자가 생각하는 대로 이렇게 저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는 가만히 듣고 있기만 할 뿐,
    그 모든 것이 자기가 원하는 대답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가 미흡해 하는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면서,
    지원자 가운데 한 사람이 그에게 되물었습니다.
`그러면 선교사님은 왜 중국에 선교사로 가셨습니까?`
그때 허드슨 테일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 대한 저의 사랑이 저를 그곳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의 말대로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과 중국 사람들을 진실로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중국 사람의 옷을 입고,
    중국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면서,
    중국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 번은 그가 자그마한 나룻배 한 척을 온종일 세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배를 타고서 강변에 있는 이 마을 저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 마을에서 전도를 마치고,
  강 저편에 있는 다른 마을로 가기 위해서 배에 올라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뒤에서 나타난 어떤 거만한 중국인 부자 한 사람이
    자기가 그 배를 타야 된다면서, 허드슨 테일러를 옆으로 밀쳐 버렸습니다.
그 바람에 허드슨 테일러는 진흙에 미끄러져서 엉덩방아를 찧었습니다.
      그의 옷은 진흙이 묻어서 더러워졌습니다.
그런데도 그 중국인 부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배에 올라타려고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뱃사공은 그 부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죄송하지만 저는 이 배에 당신을 태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배는 당신이 밀쳐버린 저분이 세를 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분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 영국의 선교사님이십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중국인 부자는 깜짝 놀라면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과연 거기에는 중국인의 옷을 입었지만
    분명한 영국의 신사 한 분이 빙그레 웃으면서 서 있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진흙으로 신발과 옷을 다 버렸지만
    조금도 화를 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당황해하는
  중국인 부자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아하니 몹시도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지요?
비록 이 배가 좁기는 하지만 같이 타더라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와 함께 타시지요.`
같이 배를 타고 가면서 중국인 부자는
    너무나도 미안한 듯이 허드슨 테일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저같이 무례한 사람에게 전연 화를 내지 않고,
      이런 친절을 베풀어주실 수가 있습니까?`
그때 허드슨 테일러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저도 제 힘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를 그렇게 하도록 만드신답니다.`
그러면서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인 부자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설명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사랑에 깊은 감화를 받은 중국인 부자는
    자기 마음의 문을 열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김 목사 당신은 정말 원수까지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느냐?
못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최고봉이라면
        오르려고 쳐다보고 나아가 시도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뭔가 우리가 할 수 있기 때문에 악인들까지 사랑하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4. 나는 왜 악인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십니까?(46-47절)

왜? 서기관 바리새인들, 아니 그들뿐만이 아니라
  예수 믿는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마저도
  끼리끼리는 좋아하는데 악인들은 여전히 미워합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도 46-47절에
끼리끼리 사랑하고 문안하면
너희들이 죄인 취급하는 세리나 이방인들 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 있느냐?

왜? 어떤 사람은 용서가 안 되고 왜 사랑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같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한 가지를 빼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답입니다. 여기에 용서와 사랑의 핵심이 있습니다.
한번 다시 묵상해 보세요.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이웃의 껄끄러운 사람까지도 사랑해야겠다고 생각하시거든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목사님 그렇게 악한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자기 자신이
    굉장히 선하고 착하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이 드십니까?
사도 바울은 신앙생활 오래 하면 할수록
    자기는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악하다고 해도 그것은 드러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내 속에는 드러나지 아니한
나 혼자만 알고 있는 온갖 추잡한 생각과 마음이 도사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나 자신 만큼은 사랑으로 대하기 때문에
    나 자신이 그렇게 추한대도 나 자신을 사랑하듯이
마찬가지로 악인의 악이 미운 것이지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깨달으면서
    제 마음에 생수가 흘러넘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악인에게 호감을 가져라 는 말이 아닙니다.
악인을 의인처럼 여기라는 말도 아닙니다.
잔인한 행동이나 배신 행위대해 못 본체 하고 그냥 지나치라는 말이 아닙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과연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시험해 볼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신정아 스캔들이 신정아 게이트로 변해서 누가 엮여져 나올까?
    온 나라의 세간의 관심이 여기에 쏠려 있습니다.
그래서 뉴스를 대할 때 마다
    좀 더 쇼킹한 사건이 터져 나오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뉴스에 검찰이 밤샘 조사를 했더니
    사실 무근이라 무죄를 판명되었다 고 하는 보도가 나오면
나는 야 참 다행이다 싶습니까?
아니면 검찰이 권력의 시녀노릇 하는구먼, 하고
    세상에 믿을 사람 아무도 없구먼, 합니까?
만약 두 번째 경우라면
    마귀가 되는 것에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깨닫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신정아 구속영장 취소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뭔가 또 석연찮은 데가 있구먼, 싶었지
        그 참 다행이야, 이런 마음이 안 들었거든요.   
그런데 이런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귀가 주는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검은 것이 좀 더 검기를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나중에는 흰 것도 검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만 옳고 세상은 다 틀려 보이는 증오에 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려고 시도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쉽지 않지만 계속 시도하다 보면
      진정한 원수 혹은 핍박하는 악인들까지도
        위하여 기도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될 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48절에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

5.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닮아가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48절)

오늘 말씀의 결론은 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
이 말씀은 5:21-47절의 요약입니다. 결론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닮아갈 때만이 우리가 온전해 질 줄 믿습니다.
‘온전하다’(텔레이오스)말은 성경에서 ‘흠이 없다’는 뜻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완전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의 순전한 기독교란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못생긴 남자가 있습니다.
눈도 작고, 머리카락 없는 못 생긴 사람입니다.
고심 끝에 잘 생긴 사람의 가면을 만들어 쓰고 다녔습니다.
가면 쓴 생활을 10년 넘게 했더니
    나중에 가면을 쓰지 않았는데도
    남자의 얼굴이 그 가면의 얼굴로 변해 있었습니다.
    가면에 눌려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위장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루이스는 이것을 복음의 본질과 연결시킵니다.
그러니 사실 미운 사람 밉다고 하지 말고
        안고와도 곱다고 생각하며 기도하면 고운 얼굴로 다가오듯이
어떻게 원수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며 사랑할 수 있나 하지 말고
    기도하며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돐이 지나지 않는 갓난아기는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런데 아기를 키우는 엄마는 아기가 마치 알아듣는 것처럼 말합니다.
‘젖 많이 먹었니? 배불러?  기분 좋아?
못 알아들어도 알아듣는 것같이 계속 말해 줄때,
  비로소 아이가 말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닮아가는 방법인 것입니다.

한 어린아이가 부모님의 말에 잘 따릅니다.
부모님이 물 떠오라면 물 떠오고, 가게에 가서 뭘 좀 사오라면 사오고
이런 사소한 명령은 모두 잘 듣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가장 절박하게 요구한
    결정적인 말은 안 듣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이 아이가 부모님의 말에 순종한 것입니까? 불순종한 것입니까?
결과적으로 불순종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사소한 다른 많은 명령들은 잘 따릅니다.
그러나 계명 중에 가장 크고 첫째와 둘째가 되는
    사랑하라는 계명을 외면한다면 이것은 순종이 아니요. 불순종입니다.
아버지의 온전하심에 나아가기 위해
      계속 시도하는 사랑의 순종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세상을 뒤집는 방법에
          능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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