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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 (마 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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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 (마 6:5-8)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주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설교하셨습니다. 유대인 교인들을 대상으로 설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을 염두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간혹 말씀 중에 이방인을 언급하실 때는 있었지만 이방인처럼 기도하지 말라든가 이방인처럼 되지 말라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설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소위 전도설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하셨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본보기가 되었을 텐데 예수님은 이미 믿는 사람들, 이미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유대교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들 중에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의심하는 사람을 예수님이 어떻게 설득하셨느냐? 예수님은 어떤 이론으로 그들을 설득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들을 믿게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이 사용하신 성령의 은사, 병 고침, 이적과 기사,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증거가 나타났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예컨대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과 대화하실 때에도 ‘너에게 다섯 남편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남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너에게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이 한 말씀에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구심의 단계에서 믿음의 단계로 단번에 점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방식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우리 자신이 믿음을 갖게 된 계기가 누가 우리를 설득해서라기보다는 우리가 뭔가 신앙적인 경험을 했기 때문에 믿음을 갖게 된 것이 아닙니까? 뭔가 하나님의 능력이든 하나님의 은혜든 사랑을 경험하는 바가 있을 때 우리가 불신의 단계에서 믿음의 단계로 움직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초등학생이 운동장에서 핸드폰을 잃어버리고 집으로 왔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가 호통을 쳤습니다, 빨리 가서 찾아오라고. 그래서 이 아이가 학교 운동장으로 가면서 염려하는 것입니다. 누가 가져갔으면 어떻게 할까, 빈손으로 집에 가면 크게 야단맞을 텐데, 그래서 운동장으로 가면서 마음속으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핸드폰을 찾게 해 주세요. 그런데 운동장에 가 봤더니 원래 두었던 장소에 핸드폰이 있더랍니다. 그래서 핸드폰을 들고 집에 와서는 엄마에게 ‘엄마, 아무래도 김영준 목사님의 회사와 관계가 있었던 거 같아.’ 그 말은 교회와 관계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 준 것 같다, 그런데 그런 표현을 모르니까 김영준 목사님 회사와 상관이 있는 것 같다고 얘기를 했는데 이런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믿음의 능력을 실감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전도하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됩니다. 우리가 논리와 이론으로 누구를 설득해서 믿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사람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경험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경험해야 됩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다는 것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확실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임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기도해야 됩니다. ‘저 사람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성령이 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을 알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가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을 의심할 때가 있었는데 어느 고등학교 학생이 저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당신은 지금 의심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말해 준 것이 저로 하여금 하나님은 진짜라는 것을 실감하게 만들고 저의 믿음이 회복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고등학생이 한 것은 저를 위해 기도하면서 성령이 주시는 예언을 한 것입니다. 사람이 알 수 없는 숨겨져 있는 것을 성령이 드러내 주시고 그 은사를 사용했을 때 사람의 이론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의심을 저로 하여금 아, 정말로 하나님이 계시구나. 정말로 성령이 계시구나. 정말로 성령이 우리의 숨은 것을 들여다보시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꺼져가는 믿음을 다시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 주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면 굳이 논리로 따져서 논리로 누구를 설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을 신뢰할만한 근거를 제공하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야 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야 되고 그리고 한 걸음 나아가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느낄 수 있어야 됩니다. 아, 저 분은 내가 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분 같다. 저 분은 우리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 하나님이 저 사람과 함께 하신다, 이걸 사람들이 느낄 때 우리를 존경하게 될 것이고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설사 우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존경은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절대적인 신본주의자였습니다. 신본주의자라는 말은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셨고, 순종하셨고, 하나님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믿음으로 사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휴머니스트였습니다. 그 말은 사람들을 위하시고 사람들을 위해서 사셨다는 얘기입니다. 일반적으로 종교인들이 풍기는 인상은 엄하고 보수적이고 재미가 없고 남의 잘못을 지적하기 좋아하고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뭔가 인간적이지 못한 냄새를 풍기지 않습니까? 종교인 했을 때 우리가 마음에 떠올리는 것은 검정색 옷을 입는 청교도인 입니다. 본인은 경건할지 모르지만 별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그런 부류의 사람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절대적인 신본주의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셨지만 그것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사람들을 사랑하게 만들고 사람들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다가가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죄인이든 병자든 천대받는 여자들이든 예수님은 사람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도 있지만 예수님이 병자들을 찾아가시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예수님이 사람들을 맞이하시고 환영하시고 사랑하시고 섬기셨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친다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치시고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대표적인 말씀이 ‘사람이 안식일을 위한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다’ 사람을 위하는 신앙, 사람을 위하시는 하나님을 예수님께서는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이전까지는 사람들이 들어보지 못한 비밀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잘 드러낸 것이 예수님의 병 고침과 기적들이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행적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주로 말씀을 통해서 드러나지, 예수님의 행적은 신화일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고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서 드러나는 중요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자들이 병이 나을 때 병만 낫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모든 종교인들은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이쪽에서 저쪽을 건너다보고 추측합니다. 하나님은 이럴 것이다, 하나님은 저럴 것이다 하나님에게 다가가려면 이렇게 해야 된다, 저렇게 해야 된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 사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계신 천국을 건너다보고 추측합니다. 저쪽에 갈 수는 없으니까. 가 본 적도 없으니까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다보고 추측하고 그것을 근거로 만든 것이 대다수의 인간의 종교인데 예수님은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너오셨어요. 하나님 계신 곳에서 사람들이 사는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쪽에서 오신 분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하신 말씀들은 추측이라든가 어떤 연구라든가 수행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만이 알 수 있는 진리를 직접 우리에게 전하신 것입니다. 정말로 천국의 inside information - 내부 정보를 우리에게 전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한이 없지만 대표적인 말씀을 들자면 탕자의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는 탕자가 돌아오게 된 경위를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 그러니까 이 탕자의 비유는 회개하는 인간의 모습을 말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계시의 말씀인데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 이외에는 알 수 없는 것이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 죄인이 돌아올 때 멀리서 보고 측은히 여기고 달려가서 부둥켜안고 입을 맞추고 가장 좋은 옷을 내다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신을 신기고 잔치를 베풀어 주는 하나님의 모습을 전해준 선지자가 예수님 이전에 누가 있었습니까? 예수님 이후에 누가 그것을 말할 수 있었습니까? 이것은 예수님만이 말씀하실 수 있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 이외에는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 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예는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라 너희 중에 아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고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자가 있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너희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인데 이것도 이제껏 사람들이 알 수 없었던 비밀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알지만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몰라요. 확신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확신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선하심도 확신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의도도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주 평이하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우리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하물며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 이외에는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성품에 대한 놀라운 계시의 말씀이에요.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을 들 수 있는데 6절에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말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계십니다. 은밀히 계십니다. 은밀하게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조용하고 비밀스럽고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안 계시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러나 계십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은밀한 중에 계신다, 이런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무엇이냐? 우리의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골방은 우리 내면의 은밀한 공간을 말하는 것이고 우리 중심의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공개되는 것이 아니고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이라든가 예식이라든가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우리 내면의 진실, 영성,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류할 수 있는데 우리의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보신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6절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하나님은 은밀하게 계시지만 우리가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면 그것을 보시고 그리고 갚으신다고 했습니다. 갚으신다는 말은 은밀하게 계신 하나님이 드러난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고 그분의 능력이 드러나고 그분의 응답이 나타난다는 얘기입니다. 이러한 골방이 없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골방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정말로 은밀한 중에 계시는 분일뿐입니다. 조용하고 안 보이고 안 느껴집니다. 우리의 영성을 개발한다는 말은 골방을 만든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내면에 우리만이 들어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밀실, 나의 비밀을 개발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문을 닫으라고 했습니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지만 결국 이것은 하나님과 나만의 관계라는 얘기입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알 수 있는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을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에요. 우리의 믿음을 사람이 평가할 수 없어요. 사람이 그것을 판단할 수 없어요. 사람이 알 수가 없어요. 결국 우리의 믿음을 판단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얘기인데 남이 참견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여기에 대해서 좋은 예화를 찾으려고 했는데 못 찾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골방이 있는 사람들은 문을 닫았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결국은 우리 자신의 경험을 가지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바쁘지요. 바쁩니다. 그러나 바쁜 것뿐만 아니라 게으릅니다. 그리고 진실이라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나의 진실, 부담스럽습니다. 가급적이면 그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의 진실을 피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마주하려면 내 자신을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직 회개하지 못한 죄, 내가 아직 인정하지 못한 나의 모순, 의무, 사명, 이런 것을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에 하나님 대면하는 것을 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이런 것을 숨길 수가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숨길 수 있지만 하나님에게는 숨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중요한 것을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중요한 것부터 생각하시는 분이에요.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 마디 말씀을 하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골방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집에 어떤 방을 만들어야 된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우리의 진실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의 본질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겉에 드러나는 문제가 아니고 속에 있는 남이 보기 힘든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고 내가 알 수 있는 하나님과 나만의 비밀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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