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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놀라운 생존력 (행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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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놀라운 생존력 (행 8:1-8) 
   
  예수님은 제자들을 남겨두고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무슨 전략을 남겨 두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의외의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장차 세계 선교를 위해서 제자들에게 어떤 방법론을 가르치셨다던 가, 이런 식으로 하라고 말씀하셨다던 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그들에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떠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무슨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청사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인간적인 어떤 비전이나 야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들은 예수님 말씀하신 대로 성령이 오신다니까 그저 기다리고 믿고 기도했던 것뿐입니다. 그런데 오순절날 예수님 말씀하신대로 성령이 임하고 교회가 세워지면서 이 신앙이 퍼지기 시작하는데 어느 누구도 기대하지 못했던 속도와 폭발력을 가지고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사도행전이 기록해 놨는데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교회의 놀라운 유연성입니다. innovation이라는 말조차도 없었던 시대에 교회가 상당한 innovation을 보여주었고 또 하나는 적응력입니다. 특별히 열악한 환경일수록 적응력이 그 진가를 발휘했습니다. 사람도 지위가 높고 가진 것이 많고 자기의 형편이 흡족한 사람은 적응력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적응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적응을 하니까. 사람들이 자기에게 맞춰주니까. 누가 적응력을 배웁니까? 상황이 어려운 사람, 가난한 사람, 뭔가 문제를 해결해야 될 필요가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적응해야 될 필요가 있고 적응력을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엄청난 핍박 속에 탄생하고 성장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했던 것은 적응력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 믿음을 지킬까,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을까,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적대적인 환경, 어려운 환경 속에서 내 사명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령의 인도를 구하고 그리고 그것을 순종하고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서 역사하셨는데, 기독교 신앙이 그런 적대적인 환경에서 쇠하지 않고, 굴하지 않고 오히려 승리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우리에게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 있는 것이고 우리가 이 시대에 어떻게 하면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교회의 놀라운 생존력입니다. -생명력이라 하면 좀 더 보편적이고 좀 여유만만한 단어가 되지만- 생존력, 왜냐하면 누군가가 그들을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의 불을 끄려고 하기 때문에 교회가 끊임없이 그런 환경에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고 그리고 온유하고 선하고 하나님이 선하신 것처럼 그들도 악한 환경에서 같이 악하게 되지 않고 선하고 거룩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고 그러면서 믿음을 지키고 오히려 신앙을 부흥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은 생존력입니다. 생존력, 신앙이 갖고 있는 놀라운 생존력입니다. 누가 우리의 뺨을 칠 때 같이 치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누가 악으로 나를 대할 때 나도 악하게 하는 것 그건 훈련이 필요 없습니다.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너희에게 인사하는 사람에게만 인사하면 너희가 바리새인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너희가 이방인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이방인같이 하지 말라 기도하는 것이든, 의를 행하는 것이든 이방인과 같이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인으로 사는 것은 우리의 어떤 본능이나 우리의 타고난 천성이나 성격이나 인간의 본능과는 다른,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았더라면 할 수 없었던 일, 하지 않았을 일 이것을 가능하게 하고 또한 이것을 제시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군가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물고기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연어가 폭포를 뛰어 오르지 않습니까? -믿거나 말거나- 높은 폭포는 아니고 낮은 폭포를 뛰어 올라요. 아, 놀랍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는 나뭇가지나 이파리나 이런 것은 강물이 흐르는 대로 실려 가지만, 물고기, 살아있는 물고기는 반대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세상의 주류, 인간의 본능 이런 강물과 같이 흐르는 것에 휩쓸러 가지 않고 반대방향으로 저 높은 곳을 향해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가 이런 적응력, 또 놀라운 유연성, 생존력을 가질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느냐?
  첫째는 무엇보다도 성령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떠나가신 것은 의도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좀 더 세상에 계실 수도 있는데 사십 일 만에 승천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떠나가셨습니까? 예수님 말씀에 ‘내가 떠나지 아니하면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희를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니라’ 예수님과 성령은 바통 터치를 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떠나가시고 그 자리에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일을 이루셨지요. 이제는 성령이 일하실 차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안 계시지만 성령을 통해서 여전히 말씀하시고 여전히 당신의 교회를 인도하시고 여전히 우리에게 힘과 위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믿음의 전략을 미리 말씀하지 않았느냐 그것은 성령이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략이라는 것은 시대마다 지역마다 상황에 따라서 다를 수가 있는 것인데 일괄적으로 전략이나 계획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면 그때그때 필요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 저런 상황 그때그때마다 대응하는 방법이 책에 기록돼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 판에 기록돼 있습니다. 성령은 흐르는 물과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늘 새롭습니다. 다만 이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짐이 가벼워야 됩니다. 등산을 하는 사람은 몸이 가벼워야 되지요. 짐이 가벼워야 됩니다. 왜냐하면 위로 올라가야 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사람도 짐이 가벼워야 성령의 인도를 받기가 쉽습니다. 어떤 짐이 가벼워야 되느냐 전통이라는 짐, 소유라는 짐, 교만이라는 짐, 이것이 가벼워야 됩니다. 욕심이라는 짐 이것이 우리를 자꾸만 자꾸만 아래로 잡아당깁니다. 짐이 가벼워야 됩니다. 많은 종교가 비우기에 대해 초점을 맞추지만 성경은 채움을 말합니다. 충만을 말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또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지어다’ 우리가 비우는 것은 채우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비울 수만 있다면 하나님이 채우시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비우기에요. ‘너희가 너희 자신을 낮추면 하나님이 높이고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너희가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잃으면 생명을 구원하리라’, ‘천국에서 크고자 하는 자는 가장 작은 자가 되고 많은 자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이게 다 무엇입니까? 주님이 성령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고자 하시는데 이것을 우리가 받기 위해서는 먼저 비워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비움, 만약 예루살렘 교회가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면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일어났을 때 주저앉아버렸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초대교회입니다. 처음 세워진 교회에요. 첫날에 삼천 명이 회개한 교회입니다. 베드로와 열 한 사도가 시작한 교회입니다. 기적 중의 기적이 예루살렘에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일어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1절을 보면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당구 게임을 시작할 때 브레이크 샷 (Break Shot)이라고 처음에 공으로 딱 치면 모아 놨던 공들이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교인들 핍박이 닥치니까 당구공들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는데 그랬더니 어떻게 됩니까? 4절에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 예루살렘에 핍박이 일어났더니 사방에 복음이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손해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손해 보시지 않고 당신의 일도 손해 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명예나 자기의 기득권이나 자기의 자랑하던 것을 잃어버릴 수는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기득권이 있었던 사람은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손해를 보지 않고 오히려 더 커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놀라운 생존력의 비결 두 번째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말씀 배우는 일이 지극히 평범해 보이지만 여기에는 놀라운 위력이 있습니다. 이천년 전의 초대교회와 지금에 교회는 예배하는 방식에 많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마는 한 가지 끊어지지 않는 전통, 한 가지 끊어지지 않는 공통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주력한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 이것은 이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고 예수님이 오시는 날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하면 이와 같은 공적인 예배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목사가 설교하는 것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초대교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집에서 모이고, 두 세 사람이 모이고, 먼저 믿은 사람이 나중에 믿은 사람을 가르치는 이런 식으로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배웠습니다. 이 방법은 비용이 들지 않고 특별한 장소가 필요하지 않고 특별한 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어디서든 언제든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너희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나도 함께 하느니라’ 두 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으로 족합니다. 거기에 이미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신비한 믿음의 공동체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사투리 하는 분들을 보면 좀 의아하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다 똑같은 TV 프로를 보고, 뉴스를 듣고, 똑같은 음악을 듣고 인터넷과 영화를 보는 시대에 어떻게 아직도 사투리를 할 수 있을까. 궁금하게 생각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족들이 사투리를 하면 사투리를 배우게 됩니다. 그 말은 사방에서 표준말을 하더라도 나와 가까운 몇몇 사람이 사투리를 하면 나도 그 사투리를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불신자들의 바다 가운데 사는 것처럼 보여도 가까운 신앙인 몇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들과 내가 주기적으로 만나고 신앙을 말하고 같이 기도하고 서로 권면하면 그 신앙이 나에게 전달되고 내가 그 신앙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제국의 엄청난 핍박을 극복하고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요즘에 유행하는 소위 셀 그룹이든 G-12든 소그룹이든 이런 모든 것이 결국은 같은 데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것은 두 세 사람이 모여서 같이 기도하고 믿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너희는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세상 끝날 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은 누군가는 호응하게 돼 있습니다. 내가 기대하고 바랐던 사람이 아닐 수는 있지만 이 사람이 아니면 저 사람, 이 민족이 아니면 저 민족, 이 나라가 아니면 저 나라 누군가는 복음에 호응하게 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도 기존의 종교인들은 예수님을 거절했지만 갈릴리의 평범한 사람들이 감사함으로 예수님을 믿었고, 소위 의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지만 죄인들이 예수님을 환영했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했더니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오늘 본문에 있는 것처럼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일어났더니 사마리아가 복음의 문을 여는 것과 같습니다. 누군가는 호응하게 돼 있습니다. 성령은 바람처럼 역사하기 때문에 이 사람이 아니면 저 사람, 이 문이 닫히면 저 문을 여십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문이 닫히는 것은 그 문이 닫히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께서 다른 다섯, 여섯, 일곱, 더 좋은 문을 열어주신다는 사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만일 여러분이 어떤 것을 바라고 기대했는데 그것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으로 낙심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적어도 당신을 섬기고 영화롭게 하려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문이 닫히는 것을 그대로 끝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다른 것이 있어서 그것이 열리게 하십니다. 오히려 내가 바라보던 그 한 문이 닫혔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다른 문이 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브라함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요.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순종해서 나갔다고 했습니다. 갈 바를 알고 간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순종입니다. 만약 갈 바를 안다면 누구든지 갈 수 있지요. 그렇다면 순종은 어려운 것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순종이 어려운 이유는 갈 바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알려주시면 좋겠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의지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고 한 것처럼 갈 바를 모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갈 때에도 이삭이 묻지 않습니까.
  ‘아버지여 우리에게 불은 있는데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양은 어디 있습니까?’
  그때 아브라함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 산에 올라가면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정말로 자기 아들을 번제로 바쳐야 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다른 계획을 갖고 계신지 미리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미리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고 하나님은 나에게 지금까지 선한 것을 주시고 선한 일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알지는 못하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고 하나님이 나를 실망시키시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아들에게 대답한 것이
  ‘하나님의 산에서 하나님이 예비하시리라’
  여기에서 ‘여호와 이레’라는 이름이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비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더니 아브라함의 믿음의 고백대로 됐습니다. 그 산에서 하나님이 양 한 마리를 예비해 놓으시고 이삭 대신 그 양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불을 준비하고 말씀대로 순종해서 올라가기만 하면 됐습니다. 거기 올라갔더니 하나님이 다 예비해 놓고 계셨습니다. 다만 순종해서 올라가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순종은 끝까지 하는 것이 진짜 순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순종의 무늬는 있어요. 신앙의 무늬는 있어요. 신앙, 경건의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순종의 모습이 있어요. 그리고 때로는 순종의 언어도 알아요. 그러나 순종은 끝까지 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 인내하는 것, 끝까지 하는 것입니다. 경주도 끝까지 해야 금메달을 받을 수 있고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말씀에 ‘선한 일을 행하다 낙심치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언제 거둡니까?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거둘 때가옵니다. 당장 오지는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리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는 것처럼 무명의 수고하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지 않습니까. 그 흩어진 사람들, 이름을 말하지 않습니다. 많은 익명의 그리스도인들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 사도들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들만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은 모든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이 한동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언제 사람 낚는 어부가 될까, 언제 그 약속이 이루어질까, 궁금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는데 베드로가 오순절날 설교했더니 그 날 회개한 사람이 삼천 명이었어요. 베드로가 설교를 잘해서 그렇습니까? 말을 잘해서 그렇습니까? 카리스마가 있어서 그렇습니까? 조직이 잘 돼 있어서 그렇습니까? 프로그램, 시설이 좋아서 그렇습니까?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목말라 합니다. 진리를 찾습니다. 진짜를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향기가 나는 사람을 찾습니다. 우리가 불신앙과 죄가 만연한 이 시대에 순전한 믿음을 간직할 수만 있다면 우리도 하나님에게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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