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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하나님, 한 믿음, 한 소망 (엡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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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하나님, 한 믿음, 한 소망 (엡 4:1-6) 
   
    제가 휴가차 캐나다 밴쿠버에 갔을 때 몇 가지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살기가 좋다는 것입니다. 환경이 좋고, 경제적으로 안정돼 있고 또 하나는 사람들이 신사적이다, 교통법규를 잘 지키고 또 남을 배려할 줄 알고. 그러면서 제가 느낀 것은 이런 환경에서 살다보면 사람이 신앙을 필요로 하게 될까? 하나님이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살기가 좋아지면 사람들이 구태여 하나님에게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만약에 현대 의학이 모든 질병을 정복하는 날이 온다면, 또 완전한 복지제도가 이루어져서 가난이 사라지게 된다면 그때가 되면 여전히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까? 또 선진 국민, 선진 시민의식을 갖게 되면 그때도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죄사함을 구할까? 그런 사람들에게도 죄가 있을까? 질서를 잘 지키고, 남을 배려할 줄 알고, 민주시민 의식을 가지고 상식적으로 살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그때도 회개할 죄라는 게 존재할까? 이런 생각입니다.

  스타인벡이 쓴 ‘분노의 포도’라는 소설을 보면 미국 중남부에 흉년이 닥쳐서 가난한 농부들이 땅을 잃고 캘리포니아로 대거 이주를 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함께 이주하는 사람 중에 한때 뜨거운 설교를 하던 목사가 포함돼 있습니다. 그는 김이 다 빠져버렸습니다. 소명감을 잃었습니다. 더 이상 목회를 하지 않습니다. 그의 말이 ‘내가 한때는 사람들의 죄를 열심히 질타했는데 살다보니까 그게 죄가 아니고 그냥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냥 사람들이 살면서 하는 일들이더라.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전할 메시지가 없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깊이 생각할 이유를 제시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죄로 규정하고 질타하는 인간의 행위 중에는 그냥 사람이기 때문에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먹고 싶고, 갖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누리고 싶고, 이런 것들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인데 이런 것들을 죄로 규정한다면 그것은 뭔가 종교가 인간을 왜곡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타인벡의 말이 옳은 것인가, 진짜 죄는 없는 것인가, 그저 인간적인 행위가 있는 것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스타인벡이 더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만일 누가 배가 고파서 빵을 훔쳤다고 합시다. 장발장처럼. 분명히 도둑질은 도둑질이지만 그것을 죄라고 규정하기에는 지나친 면이 있지요. 배가 고프니까 그럴 수 있다, 사흘을 굶어서 도둑 안되는 사람 없다고 하는데. 그런데 만일 빵을 훔친 사람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남에게 누명을 씌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는 결백하고 진짜 빵을 훔친 사람은 저 사람이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단순하지 않은 것입니다. 더 이상 그 사람이 가난하고 불쌍하고 사정이 어렵기 때문에 그랬다고만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희생자가 발생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거짓이 싹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상처 입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만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빵을 훔친 사람이 자기의 정체가 탄로 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유일한 목격자를 죽였다, 이것은 더 이상 그저 인간적인 행위라고 볼 수 없는 것이고, 비겁한 것이고, 거짓이고 악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데에서 시작했는데 어느 시점에선가 선을 넘어버린 것입니다. 정확히 어디에서 선을 넘었는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넘은 것은 분명합니다.

  다윗의 죄가 그런 식으로 발전했습니다. 다윗이 처음에 지붕에서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봤다고 했습니다. 보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보이기 때문에 보는 것을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남자가 보는 것에 약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는 임금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밧세바를 불러오고 그리고 관계를 갖습니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지만 순간적인 육정에 의해서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다음에 밧세바가 아기를 가지니까 다윗이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서 휴가를 줍니다. 그에게 집에 가서 쉬라고 권고합니다. 이제부터는 거짓이 싹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거짓이 나오기 시작하고 그게 안 통하니까 다윗은 부하들을 시켜서 전쟁이 치열할 때 우리아만 남겨두고 후퇴하라고 명합니다. 그래서 우리아가 전쟁터에서 죽어버리고 맙니다. 다윗이 우리아를 죽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아를 죽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극단적인 경우이지만 남들 앞에서 나의 불의함을 감추려는 인간의 본능은 이와 같이 절박한 것이고 그것이 거짓을 낳고 결국은 폭력을 낳고 죽음을 낳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순수한 인간의 하는 일이라고 볼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에도 ‘다윗의 소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발전하는 과정이 눈에 보이십니까? 처음에는 욕심에서 시작합니다. ‘사람이 시험받는 것은 욕심에 이끌려 미혹됨이니’ 라고 했는데 욕심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사람 모두에게는 욕심이 있습니다. 먹고 싶고, 갖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이런 모든 욕심, 욕심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지요. 욕심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욕심이 죄를 낳습니다. 그래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는 항상 거짓을 수반합니다. 이것이 죄가 악으로 변하는 과정입니다. 죄는 악을 수반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숨기려고 합니다. 죄인은 자신을 숨기려고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모순이에요. 인간은 불의한 존재이지만 자신이 불의함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감추려고 하고 남들의 눈에는 의로운 사람으로 보이려고 하는 그런 본능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는 항상 거짓을 수반하는데 이 거짓은 자신을 의롭게 보이기 위한 것이고 그 대신 남을 탓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누군가를 블레임(blame) 해야 할 대상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마귀는 거짓말 하는 자요 거짓의 아비니라 - father of lies, devil is a lier and father of lies'

  우리의 죄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우리 스스로 우리 죄를 감추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 눈이 밝아져서 자신들이 벌거벗은 것을 깨달았지요. 그래서 잎사귀로 옷을 만들어서 자신을 가리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죄를 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려움에서 비롯되고 수치심에서 비롯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을 깨닫고 수치심을 느꼈다고 했고 하나님이 동산에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죄는 두려움과 수치심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 자신을 숨기고 은폐하고 부인하려고 하는 본능을 낳습니다. 그것은 궁극적인 문제해결이 되지 못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나무 뒤로 숨었지만 나무가 그들을 숨겨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숨겨줄 수 있는 유일한 나무는 십자가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숨었지만 숨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은 드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이 부르셔서 짐승 가죽으로 옷을 지어서 입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예수님에 대한 예표입니다.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짐승을 잡아야 되지요. 피를 흘려야 됩니다. 짐승의 생명을 취해야 됩니다. 그리고서야 사람의 죄를 덮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는 성경의 원리를 보여주는 것이고 결국 인간의 죄를 덮기 위해서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 피 흘려 희생해야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 십자가의 보혈이 인간의 죄를 덮어줄 수 있는 것을 미리 예표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덮어 주셔야 되는데 이것은 은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것은 은폐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시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고백, 자백이라고 부릅니다. confession. 요한 1서를 보면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니라’ 할렐루야! 이 자백이라는 것이 가장 힘듭니다. 사람이 자백을 하는 동기는 자의로 자백할 수도 있고 타의로 자백할 수도 있습니다. 다윗의 경우는 타의로 자백했습니다. 베드로의 경우에도 타의로 자백했습니다. 자의로 하던 타의로 하던 자백은 자백이고, 자백은 유효합니다. 이것이 전환점입니다. 마치 나사로의 무덤에서 돌문을 옮겨 놓는 것과 같습니다. 자백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만일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뿐만이 아니고 우리를 불의에서 깨끗케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는 뜻입니다. 죄인의 입장에서는 그게 무슨 말인가 어리둥절할 수 있지만 탕자의 비유를 보면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때 아버지가 어떻게 그를 맞았습니까? 달려가서 부둥켜안고 입을 맞추고 그리고 제일 좋은 옷을 내다가 입혔다고 했지요.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겼다고 했습니다. 제일 좋은 옷, 이것이 뜻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죄인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의의 옷을 입혀 주셔서 죄인의 벌거벗은 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당신의 의의 옷을 우리에게 입혀 주시고 우리를 의인으로 여겨주십니다. 우리를 그저 용서하시는 것뿐만이 아니고 의롭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는 그저 죄사함 받은 죄인의 자격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의인의 자격으로 들어가는데 다만 그 의는 우리가 얻은 의가 아니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의입니다. 로마서 8장 33절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송사한다는 말은 너는 죄인이다, 너는 나쁜 사람이다, 정죄한다는 얘기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 It is God who justifies -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그 말은 오직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 의인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불의한데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예수님의 의를 선물로 주십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전가’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의를 전가시켜 주십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힌 것처럼 가장 좋은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입혀주십니다. 내버려 두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 주셔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천국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을 비교한다면 안 믿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의롭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이고 믿는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사람입니다.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에 대해서 말하는 대목입니다. 그는 여러 가지를 말합니다.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사랑, 서로 용납, 평안, 하나 됨, 등등. 그런데 이런 덕목만을 본다면 구태여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야 이런 덕목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냐, 예수님을 꼭 믿어야 이렇게 될 수 있느냐, 안 믿어도 사람이 얼마든지 온유할 수 있고, 겸손할 수 있고, 오래 참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지 않느냐, 사람이 예수님을 믿든 안 믿든 착하고 선하게 살기만 하면 되지 않느냐, 왜 굳이 예수님을 믿어야 되느냐? 그러나 성경이 이러한 덕목을 요구하는 이유는 그 덕목 자체만을 위한 게 아니고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1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을 명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는데 이제 그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기 위하여 오래 참기도 하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사랑하고, 이 모든 것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선함은 예수님 없는 선함이 아닙니다. 예수님 없는 의로움을 우리가 원치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애초에 우리가 용서를 받은 것도 예수님 안에서의 일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바르게 사는 것도 예수님 안에서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떠난 윤리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없는 착한 것, 그걸 하나님이 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 사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우리에게 죄가 있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연약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우리 모두를 한 믿음으로 부르셨습니다. 그 부름에 합당하게 살라고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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