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추석] 웰빙과 웰다잉 (계 14:12~13)

  • 잡초 잡초
  • 495
  • 0

첨부 1


웰빙과 웰다잉 (계 14:12~13)

  이제 이틀 후면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 추석이 됩니다. 명절이 되면 우리의 마음이 설렙니다. 모처럼 고향을 찾고, 평소에 자주 못 만나던 가족과 친척들이 함께 모여 회포를 푸는 기회가 있어 그렇습니다. 특히 고인이 된 분들을 추모하며 그들의 생애와 죽음을 돌이켜 보는 기회가 있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점에서 명절은 ‘인생을 공부하는 시간’이란 생각이 듭니다. 며칠이나마 분주한 일상 속에서 빠져나와 인생의 살고 죽는 것에 관해 생각해 보는 좋은 기회입니다. 이번 추석 연휴에 그냥 맛있는 음식 먹고 노는 게 아니라, 잠깐이라도 개인적인 성찰의 시간이나 함께 모여 우리의 생과 사의 문제를 이야기 해보는 대화의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제안해 봅니다. 그런 취지에서 오늘은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과 죽음에 관해 생각해 보기를 소원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 가운데 ‘웰빙’(Well-Being)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이젠 전혀 낯설지 않은 일상적 단어가 된 느낌입니다. 식품에서부터 운동이나 취미생활, 일상생활과 주거문화에 이르기까지 웰빙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 데나 웰빙만 붙이면 잘 팔린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면 ‘웰빙’이란 말은 무슨 뜻일까요? ‘안녕’ ‘복지’ ‘행복’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아주 쉽게 설명하면 ‘잘 사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보다 만족스럽게 잘 살기 위해 웰빙, 웰빙 하는 겁니다. 

  그런데 ‘웰빙’이란 말과 더불어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한 말이 있습니다. ‘웰다잉’(Well-Dying)이란 단어입니다. 우리 말로는 ‘아름다운 임종’ ‘아름다운 죽음’이란 뜻입니다. 아주 쉽게 설명하면 ‘잘 죽는 법’입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닥치는 것입니다. 동시에 모든 사람이 죽음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더 심해서 아예 죽음에 관해 생각하거나 언급하는 것 자체를 기피하거나 터부시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얼마나 모순적인 태도인지 모릅니다. 어차피 한번 죽는 것이고, 그 죽음조차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일진대, 막연히 기피하는 게 능사가 아닙니다.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웰다잉’이란 유행어를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두렵고 슬픈 죽음을 편안하고 아름답게 맞이하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웰빙 문화도 그렇지만 새롭게 등장하는 웰다잉 문화도 너무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데 치우친다는 사실입니다. 호화로운 장례식장들이 속속 등장하고, 수천 만원을 호가하는 황금 수의가 나오질 않나, 오동나무 관이나 명당자리 묘지 등 과소비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물론 고인에 대해 마지막 정성을 다한다는 면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을 빠뜨리는 맹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단순히 육체의 문제에만 집중되어 있는 게 문제입니다. ‘영혼의 문제’와 ‘내세의 문제’를 너무 소홀히 하는 겁니다. 분명히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고, 영혼은 불멸의 존재임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면 현세보다 내세가 더 중요할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육체가 잘 먹고 잘 사는 게 웰빙이 아닙니다. 육체가 고통을 덜 당하면서 호사스럽게 죽는 게 웰다잉이 아닙니다. 진정한 웰빙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함께 기뻐하며 사는 것이고, 진정한 웰다잉은 육체의 삶을 잘 마치며 영혼이 평안하게 존엄하게 내세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진정한 웰빙과 엘다잉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증거합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웰빙은 ‘주 안에서 사는 법’입니다. 그리고 웰다잉은 ‘주 안에서 죽는 법’입니다.(Well-Being and Well-Dying in the Lord)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원리를 확실히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남은 생애 복된 인생을 살고, 마지막 아름다운 모습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 진정한 웰빙 : 주 안에서 사는 것

  성도의 삶은 무엇입니까? 12절 보시죠.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주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을 마음 속에 삶 속에 모시고 사는 겁니다. 그럴 때 진정한 웰빙이 이뤄집니다. 새생명의 기쁨이 넘칩니다. 승리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① 새생명의 기쁨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그 영혼이 죽어 있습니다. 마치 죽은 시체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듯 죽은 영혼은 진정한 기쁨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십자가 대속으로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죽었던 영혼이 살아납니다. 이것이 ‘중생’ 혹은 ‘거듭남’입니다. 그럴 때 새생명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영생’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새생명은 본래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새생명과 영생은 같은 말입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으니 이는 그(=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흔히 영생을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을 영접한 그 즉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영생의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요4:13~14 (예수님 말씀) “13 ...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것은 사실은 속임수 내지는 트릭입니다.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의 『팡세』(1670)를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어로 ‘디베르띠스망’(Divertissement)이란 단어가 있는데, ‘오락’ ‘여흥’ ‘휴식’ 등의 뜻입니다. 이 단어는 동사 ‘디베르띠르’(divertir 시선을 돌리다)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오락이나 여흥은 인간의 비참한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잠시 시선을 돌려주는 것이라는 겁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아파서 울 때 방울을 딸랑 딸랑 흔들어서 아픔으로부터 시선을 돌려놓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이게 오래 가지 않죠. 다른 것으로 계속 바꾸어 줘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쾌락은 자꾸 다른 것으로 바꿔야 하고, 갈수록 그 자극의 강도를 높여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금세 싫증을 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여흥이나 쾌락으로는 근본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예수님이 공급해 주는 영생의 기쁨만이 진정한 만족을 줍니다. 환경이나 조건과 관계없이 만족할 수 있는, 영혼 깊은 데서 샘솟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쁨이 있으면 육체도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육체의 건강 문제는 유전적 요인이나 환경적 요인 등 여러 가지가 개입되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분명히 그런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잠17:2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마음의 즐거움(=기쁨)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웰빙 음식을 먹고 값비싼 보약을 먹어도 영혼의 기쁨이 없으면 모래알을 씹는 것 같고 밀가루 한 봉지 입에 털어 넣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영혼의 기쁨을 누리는 게 진짜 웰빙입니다. 아무쪼록 새생명의 기쁨으로 영혼에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② 승리의 축복 :

  주 안에서 사는 사람은 말씀대로 살고, 그렇게 되면 승리하게 됩니다. 당연한 일이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인도하는 대로 사는데 잘못될 이유가 없죠. 혹시 고난을 당해도 잠시일 뿐 결국은 승리하게 됩니다. 시119:165 보면 그런 사람의 인생에는 거칠 게 없다고 말씀합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말씀대로 사는 자에게 기도 응답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겁니다.

  결국 주 안에서 사는 사람은 요삼2 말씀대로 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아무쪼록 세상의 방법이 아니라 주 안에서 말씀으로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진정한 웰다잉 : 주 안에서 죽는 것

  사도 요한은 주님으로 받은 계시의 말씀을 통해 진정한 웰다잉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13절.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요한은 이 말씀을 통해 무엇보다 크리스천의 죽음은 축복임을 증거합니다. “...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 시116:15도 증거합니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죽음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생각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축복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육체의 죽음이 없다고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67 ∼ 1745)의『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걸리버가 여행을 하다 ‘스트랄드브라그’ 종족을 만나게 됩니다. 그 종족은 영생불사(永生不死)의 종족입니다. 물론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종족입니다. 걸리버는 죽고 싶어도 죽지 않는 종족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인간에게  죽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정말 그렇죠. 장수하는 게 좋다고 하지만 젊고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야 좋은 것이지 늙 고 병들고 추한 모습으로 영원히 산다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 본 기사 내용입니다. 현재 세계 최장수 남성이 일본인인데 나이가 112세입니다. 기네스북에도  등재되었다고 하는데, 그의 생일잔치가 있었습니다. 대표로 시장이 선물을 주면서 소원이 있으면 말해 보라고 하니까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영원히 살고 싶습니다!” 다행히 아직까지 건강하니까 그렇지, 앞으로 계속 나이가 들고 병들 텐데 그래도 영원히 살멸 좋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크리스천들에게 죽음은 천국에 들어가는 관문이기에 축복입니다. 육체의 장막을 벗어버리고 그 영혼이 훨훨 날아가듯 천국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 믿지 않으면 죽음은 절망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무조건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육체로 살고 싶어 하는 겁니다.

  미국인으로 오랜 세월 인도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스탠리 존스(E. Stanley Jones, 1844~1972) 목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구 상에서 가장 슬픈 광경은 십자가가 없는 무덤이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십자가 은혜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죽음조차 축복임을 꼭 기억하십시오. 주 안에서 죽는 것, 그것이 ‘웰다잉’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죽음의 축복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입니까? 

  ① 평안한 임종 :

  죽음이 닥쳐올 때 사람은 누구나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 두려움을 이기고 평안한 모습으로 임종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에 자신에게 펼쳐질 스케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지만 그 이후에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90세가 넘는 노구였습니다. 노쇠해서 누워서 기도할 정도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상황입니다. 그도 육체를 갖고 있었기에 죽음의 두려움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 이후에 펼쳐질 일들을 알았기에 담담히 평안함으로 말씀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자신이 기록한 요한복음에 보면 그 신앙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요11:25 “25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말씀에 그 자신이 아멘으로 화답하고 있는 겁니다. 죽어도 살고 영원히 죽지 않음을 알기에 그는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겁니다.

  다윗도 생애 가운데 수많은 죽음의 위협을 당했지만 주 안에 있기에 죽음 이후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 ”

  그렇습니다. 성도의 죽음은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들어가는 한 과정이나 절차에 불과합니다. 마치 공항에서 비행기 타고 외국에 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공항 청사에 보면 출발층(Departure)이 있죠. 흥미롭게 항상 꼭대기 층입니다. 거기서 게이트를 찾아가서 비행기를 타면 그냥 가는 겁니다. 천국에 가는 것도 그런 겁니다. 죽음의 게이트를 거쳐 천국에 들어갑니다. 이런 원리를 알면 얼마든지 평안한 임종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염습하는 분의 간증입니다. 그는 매일 하는 일이 시신을 만지고 염습하는 일입니다. 남이 보기에는 그 굳은 일을 어떻게 하나 싶지만 자신은 나름대로 보람도 있고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수많은 시신들을 보는데,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예수 잘 믿고 가신 분들의 시신은 대개 깨끗하다는 겁니다. 목사도 이따금 시신을 볼 때가 있습니다. 우리 교우 중 한 분이 생각납니다. 그분은 암으로 투병했는데, 마지막에 많이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운명하고 나서 그 시신을 보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평안하고 깨끗한지! 그 영혼이 육체의 장막을 벗고 천국에 들어갈 때 그 감격과 환희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평안한 임종이 주 안에 살다 주 안에 죽는 성도의 축복입니다. 

  ② 영원한 안식 :

  이 세상에서 육체를 갖고 사는 사람은 예외 없이 다 고생합니다.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린다 한들 결국은 ‘생로병사’(生老病死) 아닙니까? 그러나 성도는 죽음을 통과한 즉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갑니다. 13절(하).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 ”

  성도들이 누릴 안식이 어떤 것인지 성경은 증거합니다. 영원한 새 나라에서 누릴 안식입니다. 계21:3~4 “3 ...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세상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모든 인생고가 사라져버립니다. 눈물도, 죽음도, 고통도, 통곡도, 질병도 ... 계22:1~2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생명 강 가에 그득하게 심겨진 나무에서 늘 열리는 과실은 영원한 생명과 안식을 보장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무리 웰빙 식품을 먹어도 결국은 병들고 결국은 죽습니다. 아무리 좋은 보약을 먹어도 결국은 병들고 결국은 죽습니다. 그러나 생명과를 먹는 성도는 영원히  강건하게 삽니다!

  김소엽 시인은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죽음의 문제로 고심하다 그 축복을 깨닫고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죽음은 마침표가 아닙니다 죽음은 영원한 쉼표”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많은 고생 하지만 언젠가 육체의 장막을 벗고 안식에 들어갈 소망이 있습니다. 아무쪼록 고난과 풍파 많은 세상이지만 이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며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③ 하늘의 상급 :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을 위해 상을 준비해 놓고 계십니다. 우 리가 구원받고 영생을 얻은 것은 은혜로 값없이 된 것입니다. 그 은혜를 무엇으로 갚을 수 있겠습니까? 내 생명을 다 바친들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 무엇으로도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 안에서 살면서 작으나마 충성한 것들을 다 기억해 주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의 상입니다. 이 또한 나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13절(하). “ ...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그런데 천국의 상이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성경에 보면 그저 면류관을 쓰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런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스펄전 목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에 왜 천국이나 상급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는가 하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는 언어적 한계 때문입니다. 지상에서도 너무 좋은 게 있으면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천국의 그 좋은 것을 어떻게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니까 그저 무엇 무엇 같다는 정도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또 하나는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해 주시려는 겁니다. 다 보여주지 않고 커튼을 살짝 열어 보여준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면 “써프라이즈!” “짠~” 하고 보여주시려고 지금은 다 보여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크게 상상해도 그 이상이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교계 신문에서 본 기사를 소개합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본래 학교 서무실에서 오래 근무하던 분인데, 정년퇴임 후 원자력병원의 청소부로 취직했습니다.  매일 작업복을 입고 숱한 쓰레기 치우는데, 피와 고름이 배어 있는 쓰레기도 많습니다. 굳은 일이지만 오히려 건강 주신 것 감사하며 기쁨으로 일합니다. 하도 열심히 자발적으로 일하니까 용역업체에서 파견 나온 직원으로 되어 있지만 병원 측에서 표창장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고희 잔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교인들과 가족들 앞에서 소회를 밝히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지금까지 건강 주셨고 가정적으로도 축복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 무엇으로 그 은혜를 보답할지 모른다며 시신 기증 의사를 밝혔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몸 잘 사용했으니 이제 돌려드립니다. 살은 화상 환자에게, 각막은 시각장애인에게, 뼈는 필요한 환자에게 주십시오.” 자녀들이 반대했지만 결국 설득했습니다. 이런 게 바로 죽도록 충성하는 겁니다. 크든 작든 각자의 형편에 따라 최선을 다해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충성하면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하늘의 상을 예비해 주십니다. 세상의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영광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잘 먹고 잘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진짜 웰빙을 모릅니다. 여러분! 주 안에서 사는 게 진정한 웰빙입니다. 그러면 주 안에 영생의 기쁨이 있습니다. 승리의 축복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이고 추하지 않게 죽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진짜 웰다잉을 모릅니다. 여러분! 주 안에서 살다가 주 안에서 죽는 게 진정한 웰다잉입니다. 주 안에서 죽으면 평안한 임종이 있습니다. 영원한 천국의 안식이 있습니다. 하늘의 상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신앙생활 잘하는 것이 진정한 웰빙이요 진정한 웰다잉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디 이 원리를 꼭 붙잡으시고, 남은 생애 더 열심히 신앙생활 하심으로 복된 인생 사시고, 주님 부르실 때 평안히 천국에 들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