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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너지는 소식을 들을 때 (느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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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소식을 들을 때 (느 1:1~11)

당신은 당신의 가장 귀중한 것을 잃어버렸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인생의 가장 큰 목표가 산산조각 부서졌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혹시 인생을 원망하며, 방황하며 그 부서진 삶의 위기 때문에 삶을 내던지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최영섭 씨는 학창 시절, 음악을 좋아하였다. 아내의 할아버지 댁에 와서 항상 축음기를 들었는데 서울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몸이 아파서 집에서 쉴 때 그에게는 사랑하던 양조장 집 딸이 있었다고 한다. 그 여자는 이화여대를 다녔는데 어느 날 이 아가씨가 월북을 했다고 한다.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고 느끼던 청년의 시절, 가장 귀중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고통할 때 그는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하였다. 산산히 부서진 꿈에서 오는 아픔을 통해 노래가 탄생된 것이다. 이 노래는 국민 모두가 사랑하는 노래가 되었고 세계 명곡에 뽑히는 한국 가곡의 유일한 선정곡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한 곡의 노래 값은 1억 5천만원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은 ‘고통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노예로 팔려 간 고통을 받아들인 요셉, 광야의 고통을 몸으로 이겨낸 모세, 장인의 추격 앞에서 방황하며 도망치는 고통으로 살아간 다윗, 그들은 그때마다 올바른 반응을 하였다. 꿈이 깨지고 삶의 푯대가 무너지는 것 같은 순간에도 생을 포기하거나 체념하지 않으므로 총리가 되고 구원자가 되고 한 나라의 왕이 되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모두 똑같이 이 원리가 적용된다.

느헤미야를 보자. 거룩한 사역에 쓰임받는 지도자의 모델로 소개되는 느헤미야는 수산궁에서 일하는 관헌이었다. 그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하가랴의 아들인데 스룹 바벨과 같이 바벨론에서 귀환한 예루살렘의 총독이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 재임 시절인 BC 444년, 고국의 형편을 듣게 된다. 유다에서 바사 나라로 온 하나니 형제! 이산 가족을 만난 느헤미야가 하나니로부터 들은 예루살렘의 소식은 환난과 능욕의 소식이었다. 예루살렘 성은 무너지고 성문은 불에 타버렸다는 폐허의 소식이었다. 추측건대 예루살렘 성의 무너진 소식을 처음 듣게 되는 느헤미야는 남왕국이 무너지기 전에 바벨론 포로가 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바벨론 폐망 이후 일어난 바사 나라의 관헌임을 알 수 있는데 그는 본국의 소식을 들었다. 시온 성이 온통 무너져 버린 소식 뿐이었다. 정말로 아픔과 괴로움을 더해주는 소식이었다.

그때 느헤미야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첫째, 수일 동안 슬퍼하다. (느1:4上)

느1:4上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느헤미야는 민족이 무너지고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신앙의 거처지, 신앙의 중심에 자리잡은 시온이 불타버린 소식 앞에 수일 동안 슬퍼하였다.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반응은 눈물이다. 우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울어야 할 이유, 울어 줄 사랑의 대상이 없어서 눈물이 마른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귀중하고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울지 않는 자가 훌륭한 것이 아니다.

느헤미야가 나라를 위해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울었듯이 울 수 있는 가슴이 있어야 한다. 나라를 위해 우는 애국자는 못 되더라도 자녀를 위해 울어야 한다. 자녀들의 중심에 신앙의 집이 세워지지 못하고 PC방과 술집에서 흥청거리는 삶과 쾌락으로 질주하는 삶이 전부라면 우리는 울어야 한다. 꿈이 무너지고 미래가 무너졌다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처럼 올바른 반응을 하지 못하는 자녀들을 위해서 울어야 한다.

눅23:28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였다. 주님도 무너지는 자녀들의 영혼을 위해 울라고 하셨으니 우는 것은 올바른 감정이다. 무너진 고통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다. 네티즌의 반응을 보라. 선교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샘물교회에 가서 선교하러 간다는 것을 가지 못하게 데모하겠다고 난리다. “납치된 자들, 죽도록 버려 두어야 한다. 피랍된 자들을 구출하는 돈이 아깝다. 나랏돈 축내는 사람들!”이라며 야단 법석이다. 자기 집 강아지 만큼도 생명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 사납고 거칠고 죽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의 마음. 이렇게 사단적인 마음이 된 것을 위해 울어야 하지 않는가? 우리의 옛 모습이기 때문에 울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사람의 인간성이 무너진 이들을 볼 때 긍휼을 위해, 회복을 위해 우리가 울어야 하는 것 아닌가?

둘째, 하나님 앞에 묻고 나가다. (느1:4下)

느1:4下을 보면 느헤미야는 우는 것으로 일관하지 않았다.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여 기도하였다. 슬픈 소식이 들려질 때마다 올바른 반응의 방법은 하나님 앞에 묻는 일이다. 진지하게 묻고 나아가는 일이다. 느헤미야는 금식하며 기도하는 방법을 취하였으니 그의 평소의 경건 생활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삶의 진정한 뜻과 해야될 길을 찾으려 할 때 꼭 필요한 방법이 금식 기도이다. 금식은 육체를 위하여 제공되던 음식을 중단하는 것이다. 육체는 굶주림 때문에 요동을 치며 밥을 달라고 발버둥치지만 금식은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는 영혼의 잔치 시간이다. 하나님에게만 더 많이 집중하게 되는 금식은 응답을 앞당기는 비상 기도이다.

사58: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하였다.

오늘 우리는 형식적인 기도,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금식을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경건하게 실행되는 금식,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일상 생활 속에서 행해지는 진정한 금식은 치료의 능력이 된다. 다니엘은 다니엘 10장에서 절식 기도를 했는데도 삼일 만에 응답을 받았다. 다니엘은 다니엘 9장에서 금식 기도를 하므로 천사의 응답을 받았다. 고통과 괴롬이 있을수록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묻고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 그때 시험을 이기고 든든히 서게 된다.

셋째, 철저히 회개하는 자가 된다. (느1:6)

느헤미야는 민족의 비극 앞에서 죄를 생각해낸다. 성소가 무너지고 주권을 빼앗긴 환난의 뒷면에는 이스라엘의 죄, 주를 향하여 저지른 죄가 있음을 시인한다. 무엇보다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한 불신앙의 죄를 고백한다. 그러나 이 회개는 자신을 빼 놓고 드리는 죄의 고백이 아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을 범죄자로 고백한다. 회개의 범주 속에 자신을 철저히 포함시킨다.

느1:6下을 보라.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느1:7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느헤미야는 자신의 범죄를 놓고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는 회복의 첫단추이다. 회개는 치료의 첫단추이다. 회개가 있으면 하나님의 중심이 뜨거워지고 회개가 있으면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 고난과 비극의 이야기 앞에 자신을 회개하는 사람, 큰 환난과 능욕받는 이야기 앞에 죄를 토하며 부르짖는 사람, 위대한 모습이다. 지도자는 남에게만 탓을 돌리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은 오직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책임을 남에게 뒤집어 씌우는 사람이 아니다. “내 죄다. 내 아비 집의 죄다.”라고 자복하는 회개의 사람이다.
어떤 일을 만나든지 회개를 시작하는 한 주간이 되자.
 

넷째, 뜻을 세워서 도움을 구하다. (느1:11)

모든 것이 무너졌으니, 사랑하는 예루살렘이 무너졌으니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사람은 무너진 인생이 되고 만다. 오히려 느헤미야처럼 해야 할 일을 구하고 그것을 위해 뜻을 세워나가는 일이 시작되어야 한다. 느헤미야는 느1:11에서 기도하기를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그 형통과 입어야 할 은혜는 무엇인가? 느헤미야 2장을 읽어보면 느헤미야 자신이 무너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뜻이었다. 내 나라에 돌아가 타 버린 성벽 문을 재건하고 고통 속에 있는 형제들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뜻이 꺾이지 않도록 왕의 허락을 구하는 기도를 한 것이다.

상한 마음이 들수록 뜻을 세우라. 토했다고 울 수 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뜻을 세우라. 할 일을 찾는 지혜를 가지고 뜻을 세우라. 에스라는 민족의 위기 앞에 금식으로 일사각오하는 뜻을 세웠고 다니엘은 이방 나라의 교육 앞에서 채식을 고집하는 뜻을 세웠다. 뜻을 세워서 그 형통의 길을 구하는 일이 난국을 헤쳐나가는 최고의 길이요 지혜이다.

조만식 선생은 술로 세상을 지냈다. 나라가 무너지고 주권이 수탈 당하고 일제의 식민지 상에 있을 때 되는대로 살았다. 그러나 친구의 전도를 받아 새 사람이 되었다. 술을 끊어야 된다는 가르침을 받고 금주의 뜻을 세웠다. 그런데 어느 날 전도한 친구가 그의 집에 가보니 소주병을 앞에 두고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자기 압에서 낸 말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본 친구는 실망하여 돌아가려 하였다. 그때 조만식 선생은 친구를 불렀다.

“오해하지 말게. 이 병속에 있는 것은 술이 아니고 독약일세. 금주의 뜻을 세운 것을 지키기 위해 소주병 속에 독약을 넣고 싸우고 있는 중이라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 지, 무너진 한 가운데서 무엇부터 하는 것이 세워나가는 길인지 도움을 구하며 뜻을 찾으라. 뜻을 세우라.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시고 성숙한 리더로, 영적인 거인으로 사용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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