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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은혜(3) : 예수 그리스도의 피 (엡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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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3) : 예수 그리스도의 피 (엡 1:7-10)

1. 이어령 박사께서 기독교 신앙을 갖고 나서 일간지 신문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기 물고기가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바다가 어떻게 생겼어요?”
엄마가 대답하길 “글쎄, 그런 게 있다고 듣긴 했다만, 나도 잘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바다 속에 살면서 바다를 본 적 없는 것, 이것이 이 박사 자신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계심을 믿습니다.

이어서 이어령 박사께서는 인간의 유형을 넙치, 참치, 날치형으로 나눠 설명하였습니다.
넙치는 바닥에 납작 깔려 살면서 물 흐름을 타고 움직입니다. 게으르고 세상의 풍조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넙치형이겠지요. 참치는 가만히 있으면 가라앉습니다. 하루 종일 퍼득퍼득 헤엄쳐야 삽니다. 그래도 살아보려고 열심히 퍼득거리며 살아가는 부지런한 사람을 가리키겠지요. 그런데 날치는 바다 바깥으로 갑니다. 촥! 날아오르면서 바닷속 물고기가 바다 풍경을 봅니다. 수면을 박차고 오르면서 다른 세계로 나아갑니다. 다른 세계로의 돌파가 우리 삶에도 필요한 것입니다. 땅에 살면서도 하늘의 세계를 경험하며 사는 사람, 하늘에 속한 사람 말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날마다 누리며 사는 사람 말입니다.
그런데 날치가 날려면 장이 비어 있어야 됩니다. 뭘 많이 먹으면 무거워서 못 납니다.
너무 많이 가져선 안 됩니다.
여러분은 어느 유형에 속합니까?
세상에 파묻혀 사는 넙치형,
아니면 세상에서 늘 퍼득거리며 정신없이 살아가는 참치형,
아니면 땅에 있으면서도 하늘을 차 오르는 날치형?
땅에 살면서도 하늘의 신비를 맛보며, 하늘의 능력을 받으며 사는 날치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지난 8월23일자 미국 시사주간지 <Time>의 커버스토리로 충격적인 기사가 실렸습니다. 제목이 <Mother Teresa's Crisis of Faith 테레사 수녀의 신앙의 위기> 입니다. 이 내용이 그 다음 주에 우리나라 일간지에 중요한 기사로 실렸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카톨릭에서는 그녀를 성인으로 추대하였고, 카톨릭 뿐 아니라 개신교, 불교, 이슬람교 등 종교를 초월하여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1949년 인도 캘커타의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사역을 시작하면서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50년간 하나님이 진정으로 내 안에 계시는가, 즉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고민, 신앙의 근본적인 고민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1979년 9월쯤 피트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매우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예수님께서 침묵하시고, 내 마음은 텅 비어 있습니다. 나는 (주님을) 보려 해도 볼 수 없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기도할 동안) 혀는 움직이지만, 말이 안 나옵니다.”

그러나 3개월 뒤, 노르웨이 오슬로의 노벨 평화상 수상식장에서 그녀는“예수는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만나는 가난한 사람들 안에도 있고, 우리가 주고받는 미소 안에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노벨상 수상식 연설이 세상이 알고 있는 테레사 수녀의 전형적 모습이라면 피트 신부에게 보낸 편지는 자기 실존에 대해 의문을 던지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담고 있는, 자기 모순적인 것이라고 타임은 분석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1959년에 쓴 편지에서는‘무미건조함’‘어둠’‘외로움’‘고통’이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고 밝히면서 “그것은 마치 지옥같아서 하늘나라 심지어 하나님의 존재조차도 의심하게 만들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또 자신의 내면 세계와 밖으로 보이는 모습 사이의 불일치를 알고 있다면서,“(내가 짓는) 미소는 모든 것을 감추는 가면이거나 외투”라고 썼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신문기사로 이 내용을 접하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타임지를 인용한 신문기사의 논조가 다분히 테레사 수녀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8월23일자 타임지 원문을 직접 읽어보았습니다. 테레사 수녀의 신앙의 위기가 사실이지만, 카톨릭에서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테레사 수녀에게 신앙이 없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너무나 갈망하다보니, 그런 극단적인 실망, 어두움, 메마름이 찾아올 수 있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기사를 읽으면서 받은 느낌은 테레사 수녀가 정말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천국에 대한 느낌도 없이, 가면으로 신앙생활을 했을 수도 있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그의 영혼의 어두운 밤의 기간이 몹시 길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신앙은 변함이 없었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나님만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가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살아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셨음을 믿습니까? 여러분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음을 확실히 믿습니까? 여러분은 오늘 세상을 떠나도 천국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결국 믿음은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생깁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임재, 이것은 느낌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느낌보다 믿음이 앞섭니다. 더욱 중요합니다. 믿음이 생기면, 느낌은 서서히 따라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느낌이 없을 때, 우리의 신앙은 메마릅니다. 어둡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몹시 고통스럽습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제게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우리를 위해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의 앞길을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을 영적으로 볼 수 있고,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분의 따스한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해주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신앙이 더 든든해지고 삶에 진정한 기쁨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3. 2,000년 전, 예루살렘 외곽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오늘 여러분의 머리와 가슴과 손발 온 몸에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온 몸을, 우리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변화시켰음을 믿습니다.

7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예수님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라고 하지 않고, 예수님의 피라고 ‘피’를 강조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먼저, 구속 이란 단어의 개념부터 설명하겠습니다. 구속이란, 법정 구속과 같은 구속이 아닙니다. 여기의 구속이란, 노예 주인에게 몸값을 주고, 노예를 사서 해방시켜주었다는 의미입니다. 또,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 죄값을 치러주고 풀어나게 해주었다는 뜻입니다. 해방, 자유와 관련된 구속이란 개념에는 반드시 몸값이 포함됩니다. 인질을 석방시키기 위해 몸값을 지불하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원래 죄에 매여 살았던 죄의 종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또, 사탄에 매여 살았던 사탄의 종이었습니다. 이사를 해도, 결혼식을 해도, 장례식을 해도, 내 맘대로 못하고 날짜를 받아야 하는 등 부자유한 삶, 사탄에 매인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몸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사탄에게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다시는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마음에 부담이 되고, 또 죄 짓기가 싫어졌습니다. 죄에서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치른 몸값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1:18-19)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사탄에게서 사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왜 피값을 치러야 했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그 형벌로 죽어야 합니다.
구약시대 때, 희생 제사를 드릴 때에는 짐승을 끌고 와서 제사드릴 사람이 짐승의 머리에 안수합니다. 안수할 때, 그 사람의 죄가 희생 제물인 짐승에게 다 전가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짐승을 잡습니다. 짐승은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피흘리며 죽습니다. 그 짐승의 피를 보고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히9:22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우리는 죄의 형벌로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피흘러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희생양이신 예수님께 다 담당시키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피의 종교, 희생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위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이번 추석은 섬김받고 대접받는 명절로 보내지 말고, 도리어 가족을 섬기는 날로 보냅시다. “내가 좀 희생하자. 내가 좀 더 일하자. 내가 좀 손해보자.”
그러면, 다른 형제들이 나를 통해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평안을 누릴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성도의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이 은혜가 얼마나 풍성합니까?
여러분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신체 모든 기관과 부위마다 예수님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피가 흐르는 곳마다 죽은 세포가 살아나고, 더러운 병균이 죽고, 어긋난 뼈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놀라운 치유와 회복의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예수님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들과 가족들을 사탄이 함부로 손대지 못함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을 엿보는 사탄이 예수님의 피를 볼 때 두려워 도망칠 것입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피의 능력을 찬양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그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그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정결한 마음을 얻게 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오재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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