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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판 앞의 두 사람 (창 18:16-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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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앞의 두 사람 (창 18:16-19:38) 

오늘은 하나님의 백성과 심판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가정에 자녀를 약속하신 후,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러 가실 때 전송하러 나온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16, 20-21).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17) 하나님께서는 마치 마음을 나누는 ‘벗’과 같은 존재로 아브라함을 대하셨습니다(약 2:23). 여호와께서는 모세와도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출 33:11) 대면하여 말씀하셨으며,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셨습니다(요 15:14-15). 이 말씀들은 부르심의 목적이 단지 사명을 행하는 것에만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19). 자식을 받는 것과 같은 현실적 복을 받는 것 또한 최상위의 목적은 아님을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마음을 나누는 친구 같은 관계로 발전해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표현하는 이유 중 하나도 둘 사이의 관계가 그만큼 친밀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은 마치 불순물 가득한 금광석이 순금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도 허물과 약점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해 심각한 잘못을 행하고 오랫동안 하나님과 단절된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일생 전체를 조명해보면 그는 점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조금씩 더 알아갔으며, 인생 말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어떤 말씀이라도 순종할 만큼 그 신뢰의 관계 또한 두텁고 견고하게 발전해 갔습니다. 약속이 당대에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멀리서 보고 환영하면서”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소망하며 살았습니다(히 11:8-13). 그래서 모든 믿는 자들의 표상으로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 불립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명백하게 대비가 됩니다. 19장을 보면 두 천사가 소돔에 도착했을 때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영접했는데(1), 이것은 그가 상당히 출세했음을 보여줍니다. 당시 성문은 백성을 재판하고 지도하는 원로들의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을 구출한 영웅이었고, 롯이 그의 조카라는 사실은 출세에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롯은 소돔과 소돔에 있는 것들을 참으로 사랑했습니다(요일 2:5). 그의 두 딸은 소돔의 청년들과 정혼시켰습니다(14a). 아마도 뼈대 있는 명문가의 청년들이었겠지요. 어쩌면 롯은 자신이 누리는 풍요로운 현실을 하나님의 축복이라 여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롯은 늙은이나 젊은이나 할 것 없이 몰려와서 나그네들을 성폭행하려 했던 소돔 사람들에 비해서 의인이었습니다(19:5). 천사들을 마땅히 존중할 사람으로 알아보고 영접하고 보호하려 했다는 점과(1), 소돔에 살면서도 딸들이 시집가지 전까지 정조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왔다는 점(8) 등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벧후 2:8)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장 심판을 내리셔야 할 만큼 죄악이 넘치는 곳이라 심령이 상했지만, 롯은 소돔을 박차고 나가지는 않았습니다. 소돔이 주는 혜택이 좋았고 초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보다는 화려한 소돔의 백성으로 살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가정이 하나님의 계시를 잘 받아서 그 후손들에게 전수할 수 있는 모습으로 장성해가는 동안, 롯과 그의 가정은 세속의 물결에 침몰 되었습니다. 롯은 정혼한 딸들을 성적 노리개로 내어주려 할 만큼 분별력이 없었습니다(8). 그의 사위들은 심판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긴 불신앙의 사람들이었습니다(14b). 심판의 순간에 그의 아내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던 것은 경고의 말씀이 아니라 소돔의 재물들이었습니다. 땅에 있는 재물에 대한 미련 때문에 그녀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26). 롯의 두 딸은 아비에게 술을 먹인 후 동침하였고, 그 사이에서 난 자식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영원한 대적인 모압과 암몬 족속의 시조가 됩니다(36-38).

롯은 어떤 면에서 아브라함과 함께 가나안 에 온 신앙 동료였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과는 확연하게 달랐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대신 소돔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을 더 알아갔습니다. 세상과 벗이 되어 세속에 깊이 물들었습니다. 그의 일생은 오물과 불순물이 점점 많아지는 쓰레기 더미처럼 되었습니다. 오늘날 롯은 세상을 사랑하다가 모든 것을 잃고 제 몸 하나 겨우 건짐을 받은 전형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롯의 비참한 결말은 그가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키면서 살아야겠다는 의식이 없어진 때부터 이미 그 삶의 종착점은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에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약 4:4)고 경고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삶과 롯의 삶,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중립지역에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이미 롯의 삶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외면하지는 않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 세상과 조금 구별되기는 하지만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서지 못하는 사람 역시 롯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물론 아무도 자신의 인생이 롯과 같이 결말지어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출세와 부귀와 영화에 미련을 두고, 의로운 심령을 상해가면서까지 그 속에 버티고 사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적지 않아 보입니다. 

요한복음 3:18-19절을 보면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은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그 정죄는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라 했습니다. 정죄되었다는 것은 형량을 선고받고 집행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해석하면 소돔은 이미 정죄 받은 상태에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며 살았고,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자 천사들을 통해 이미 선고하셨던 형량을 집행을 한 셈입니다.

죄악으로 인해 심령이 상하면서도 죄 된 삶을 계속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미워하지는 않지만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추구하는 것, 하나님과의 친밀을 추구하기보다 세상과 벗되고자 안달 하는 것, 세상에서의 출세와 세상이 인정하는 성공 속에서 행복과 만족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 계속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나아가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 이러한 것들이 이미 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는 사람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러한 사람과 이러한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엄위하시며 공의로우신가를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통해 명백하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최후 심판’만이 아니라 역사 가운데서도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이를 ‘섭리적 심판’이라 하는데 게으른 자로 석양에 눈물 흘리게 하는 것과 같은 자연적인 과정을 통한 심판과, 소돔의 멸망과 같이 특정한 죄에 대해서 초자연적인 섭리를 통한 심판이 있습니다. 소돔은 천사들을 통해 심판하셨지만, 가나안 백성들은 사람과 전쟁을 통해 심판하셨고, 자연 재해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은 이미 정죄 된 자들에 대해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공개적으로 형벌을 집행하신 사건입니다. 따라서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죄를 간과하지 않으시는 공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섭리적인 심판이 죄를 범할 때마다 항상 자동적으로 임하는 것은 아니며 최후심판에서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됩니다.

하나님의 심판 계획을 알게 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의 여섯 번의 간구는 즉시 응답받았습니다(18:22-33). 그만큼 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컸습니다(약 5:16). 흔히 이런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합니다만, 중보자는 예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에 성경적인 용어를 따라 ‘도고’로 호칭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이 시대에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기복적인 경향이 많고, 그런 기도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기도는 매우 균형이 잘 잡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가까이 나아가”(23)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만큼의 친근하면서도 결코 무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하여 두려워 떨면서 겸손히 간구합니다: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27)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30)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31)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32) 아브라함은 열정적으로 기도하지만 절제미가 있어 요란하지 않았으며, 포기치 않는 끈질김이 있으되 결코 기복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이지 않았습니다. 간단명료하여서 중언부언하는 것도 없고 화려한 미사어구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강력하고도 효과적인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알고 간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23)라는 질문과 함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균등하게 취급하실 리가 없음을 알았습니다(25). 또한 자신의 모든 허물과 죄악 가운데서도 언약을 취소하지 않으셨던 긍휼이 많으시고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심도 알았습니다. 그분의 공의를 무시한 채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니까 무조건 심판을 취소해달라고 할 수 없음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열심히 기도하면서도 바르게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자세나 내용이 모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었기 때문에 울고불고하지 않았어도 기도의 응답은 확실했습니다.

죄를 간과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신 유일한 구원의 길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죄인들을 대신하여 저주받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신 우리 주님의 희생에 근거해서만 하나님의 사랑은 베풀어집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희생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은 사람은 도덕군자로 칭송받을 지라도 이미 저주와 심판을 받은 사람이며 언제 임할지 모를 형벌 집행일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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