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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 사람 (창 47:20~26, 창 3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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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참 사람
♣ 본 문: 창세기 47:20~26, 39:1~6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디오게네스에 대하여 잘 알려진 일화입니다. 어느 날 디오게네스가 대낮에 등불을 들고 길거리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저 사람이 공부를 많이 하더니 미쳤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스승의 이상한 행동을 보고“선생님 왜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니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디오게네스가 대답하기를“햇빛만 가지고야 사람다운 사람을 찾을 수 있어야지!”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귀합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 신자가 1200만이라고 합니다. 약 25%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참된 신자가 귀합니다.

오늘 봉독한 성경에서 사람다운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의 열한째 아들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총리가 되어 선정을 베푸는 장면을 기록한 것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된 때는 애굽과 중동 전역에 칠년 연속 풍년과 칠년 연속 흉년이 있었던 때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칠년 풍년과 칠년 흉년을 예견하므로 바로 왕의 총애를 받아 나라를 다스리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총리가 된 요셉은 칠년간 계속된 풍년 때에 곡식을 많이 비축했습니다. 그리하여 칠년의 긴 흉년 때에 곡식을 백성들에게 팔아 백성들의 생명을 건졌고, 이로 인해 애굽 왕 바로에게 큰 유익을 주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 노예로, 억울한 죄수로, 천신만고의 삶을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애굽은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입니다. 요셉은 그 가운데에서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굳게 믿음을 지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지 그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요셉에게서 오염되지 않은 참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삶을 살펴보므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一. 요셉은 어디에서나 꼭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가운데에는 꼭 있어야할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있으나 마나한 사람도 있고, 차라리 없으면 좋을 사람도 있습니다.

며칠 전 부산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60대로 보이는 한 장애인이 지하철을 타기 위해 비틀거리며 걷다가 그만 선로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곧 전동차가 달려들지도 모를 위기상황이었습니다. 이때 한 대학생이 재빨리 선로에 뛰어들어 장애인을 선로 밖으로 구해냈습니다. 그런데 위기 상황을 넘긴 후 이 의로운 청년은 곧 깊은 허탈감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선로에 뛰어들면서 노트북과 전자수첩이 든 가방을 승강장에 뒀는데 그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 학생은 부산 동서대 4학년 박상현 군이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그 안에 중요한 자료들이 있었는데, 앞으로도 그걸 어떻게 준비해야하나 생각하니 앞이 깜깜해집니다.”라고 했습니다. 박 군은 가방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뛰어다녔지만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다행히 박 군이 구조에 나선 틈을 타 박 군의 가방을 훔친 파렴치한 절도 용의자의 모습이 지하철 폐쇄회로에 잡혔습니다. 경찰은 사건 당일 부산지하철 1, 2호선 전 역사의 폐쇄회로를 분석한 결과 절도 용의자가 해운대역에서 내린 사실을 알고 열흘간의 잠복근무 끝에 붙잡았습니다. 이 절도 용의자는 은행원 출신 64살 송 모 씨에 대해 절도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합니다.

같은 사람인데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한 사람은 꼭 있어야할 사람이며 한 사람은 차라리 없으면 좋을 사람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요셉은 어디에서나 꼭 있어야할 사람, 꼭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좋은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태복음 5:14)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살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대게 환경의 지배를 받기 마련인데 요셉은 환경을 이기며 살아갔습니다. 마치 거센 탁류를 헤치고 올라가는 물고기와 같았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한째 아들로 태어나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성장했습니다. 꿈 많은 열일곱 살이 되던 어느 날, 이복(異服) 형들의 시기와 미움으로 인해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고 말았습니다. 당시 노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귀한 집 아들이 하루아침에 짐승 취급을 받는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고대 중동의 노예들은 3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첫째, 이마에 표시를 했습니다. 즉 이 사람은 어느 집안의 노예라는 낙인을 찍었습니다. 그래서 노예들은 도망을 갈수도 없었고 다른 사람이 훔쳐 갈수도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노예들의 코에 구멍을 뚫어서 코걸이를 달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반항도 고집도 못 부리게 했습니다. 성질이 사나운 노예는 발목과 손목에 쇠고랑을 채우기도 했습니다. 셋째는 제복을 입혔습니다. 누가 보아도 쉽게 노예인 것을 알도록 했습니다.

요셉의 처지도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노예의 처지에 있었지만 일반적인 노예와는 다른 면이 있었습니다. 피동적으로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인의 가정에 큰 유익을 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요셉에 대해 기록하기를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세기 39:5)고 했습니다. 이러한 요셉은 주인의 총애를 받아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짐승 취급을 받았던 노예가 바로 왕의 경호실장 가정 총무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앞길이 환하게 열려가던 요셉이 이번에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죄수가 되어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겼던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로 감옥을 총괄하는 전옥 즉 교도소장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습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그의 손에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창세기 39:21~23)고 했습니다.

이처럼 요셉은 노예의 처지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섬기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 결과 주인의 인정을 받아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또한 감옥에서는 모범수로 전옥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요셉을 사랑하셔서 마침내 애굽 나라의 국무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요셉이 총리가 된 때는 칠년 연속 풍년과 칠년 연속 흉년이 있던 때였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칠년 풍년과 칠년 흉년을 예견했습니다. 요셉은 칠년간 계속된 풍년 때 곡식을 많이 비축했습니다. 그리하여 칠년의 긴 흉년 때에 곡식을 백성들에게 팔아 백성들의 생명을 건졌고, 이로 인해 애굽 왕 바로에게 큰 힘과 유익을 주었습니다.

칠년간 계속된 흉년은 애굽에만 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살고있는 고국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셉은 먹을 양식이 없어 곤경에 처한 고국의 부모형제들을 모두 애굽으로 이주시켜 가족의 생명을 건졌습니다. 20여년 전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형들에 대해 원한을 품지 않고 사랑으로 용서했습니다.

이처럼 요셉은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노예로 있을 때에는 주인 보디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습니다. 죄수로 있을 때에는 교도소장의 신임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는 바로 왕을 신임은 물론이거니와 국민적인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는 어디에서나 꼭 필요한 사람, 누구에게나 유익을 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二. 요셉은 하나님을 나타내었습니다.

창세기 39:3에 요셉에 대해 기록하기를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비록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그를 지켜보는 주인의 눈에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고 계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41:38에는 요셉이 국무총리가 될 무렵 바로 왕이 요셉에 대해 한 말을 기록하기를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했습니다. 이처럼 요셉은 어디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나타냈습니다. 무엇으로 나타내었을까요?

1. 요셉의 얼굴 모습이었습니다.

창세기 39:6에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경찰관은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직업을 대략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분위기나 그 사람이 늘 생각하는 것들이 은연중 얼굴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 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살아가는 성도, 늘 기도하면서 살아가는 성도의 얼굴에는 성도만이 지닐 수 있는 경건함과 온화함이 외모에 배여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모습이 그와 같았습니다. 요셉의 신분은 노예인데 다른 노예들처럼 천박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모습은 경건했고, 남다른 온화한 인품이 그의 모습에 배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스데반이라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스데반 집사님의 모습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사도행전 6:15)고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깊은 신앙은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천사의 모습을 느끼게 했던 것입니다.

얼굴이 험악하게 생기고 성격이 비뚤어진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아름답고 순결한 아가씨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처럼 험악하게 생긴 사람의 아내가 될 수없다.”라는 말로 거절을 당했습니다. 이 청년은 인자하게 생긴 가면을 쓰고 다시 청혼을 했습니다. 드디어 그 아가씨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아내에게 한 사람이 찾아와서 남편의 과거와 가면을 폭로했습니다. 놀란 아내는 당장 남편의 가면을 벗겼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험악한 얼굴이 아닌 인자한 모습으로 변한 얼굴 모습만 있었습니다. <행복한 위선자>라는 소설의 내용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 담고 있는 것에 따라 얼굴 표정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비록 노예의 처지에 있었지만 하나님을 굳게 믿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감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열심히 살아갔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내면의 모습은 외모에 까지 나타나 준수하고 아담했습니다. 이로 인해 주인 보다발 의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표정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소에 표정이 밝고 잘 웃는 보험설계사는 그렇지 않는 사람보다 30%이상 높은 실적을 올린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표정이 밝은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 합니다.

사람의 표정에 대해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립보서 4:4)하셨습니다. 요셉은 비록 노예 신세였으나 그는 주안에서 용기와 소망을 잃지 않고 밝게 살았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표정을 지켜보는 주변 사람들의 눈에 준수하고 아담하게 보였습니다. 참된 신앙인은 그 얼굴에 하나님의 사람다움이 나타납니다. 이런 사람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신뢰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 곁에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를 좋아하게 됩니다. 그를 귀히 여기게 됩니다.


2. 요셉의 삶이었습니다.

요셉은 어디서나 요셉을 대하는 사람마다 그들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가정에서는 부모님께 보람과 기쁨을 안겨드렸습니다. 보디발의 노예로 살면서는 그 가정에 큰 유익을 주었습니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는 감옥의 모든 사람을 섬겨 봉사하므로 유익을 주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는 지혜롭게 선정을 베풀므로 애굽 국민 전체에게 풍요로움을 안겨 주었습니다. 요셉의 삶의 철학은 철저한 책임감과 섬김의 자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를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14-16)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가 처한 위치는 숨길 수 없는 산위의 동네와 같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착한 행실로 본을 보일 때, 우리들의 삶이 그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우리들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깨닫습니다. 기도로 통해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앙 인들은 먼저 믿는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합니다.

성도의 삶을 빛이라고 했습니다. 빛은 저절로 발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빛은 반드시 어떤 재료가 소모되므로 발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촛불은 자기의 몸을 녹여 태우므로 주위를 밝힙니다. 석유 등은 기름이 타므로 빛을 발합니다. 장작불은 장작이 불에 타 재가 되므로 빛과 열을 발산합니다. 이처럼 희생 없는 빛은 없습니다.  너희는 이 세상의 빛이라 하신 것은 이 세상에서 희생의 삶을 통해 주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성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희생의 삶, 섬김의 삶, 봉사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를 믿으므로 복을 받아 누리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로마서 8:29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을 나타내므로 불신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예수님의 손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손입니다. 섬기신 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한복음 13:13-15)하셨습니다.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그래서 섬김을 신앙의 최고봉이며, 섬김은 신앙생활의 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손은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상처 있는 손입니다. 우리들의 손에는 무엇이 남아있습니까? 나의 욕심을 채우지 못해 아직도 넓게 펴진 손입니까? 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 장식된 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못자국난 손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닮은 손은 섬김과 희생의 손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사람을 곤충에 비유하기를, 거미 같은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거미는 거미줄을 쳐놓고 거기에 먹이가 걸리도록 기다립니다. 사람가운데에도 노력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쳐 그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한사람은 개미 같은 사람입니다. 개미는 열심히 일하여 저장을 합니다. 그러나 자기만 위합니다. 누구도 나누어 주지 않습니다. 사람가운데에도 열심히 일을 합니다. 알뜰하게 살아서 저축을 합니다. 그러나 자기밖에는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베푸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사람은 꿀벌 같은 사람입니다. 꿀벌은 열심히 일하여 꿀을 물어옵니다. 그러나 그 꿀은 사람들의 몫입니다. 사람가운데에도 꿀벌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여 많은 소득을 얻습니다. 그러나 자기만 위해 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어려운 이웃을 위해 베풀기를 즐겨합니다. 이웃에게 유익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통해 그리스도의 빛이 발하며, 이러한 사람을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산되어 주위 사람들을 감동케 합니다. 하나님께는 영광이 됩니다.

요셉은 마치 꿀벌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를 대하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친 적이 없습니다. 모두에게 유익을 주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본 받아야할 귀한 삶입니다.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귀합니다. 요셉의 아름다운 삶이 우리 모두의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발달된 현대 문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듣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옛날에는 라디오를 통해 뉴스를 들으면서 만족했고, 라디오의 기능을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통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실시간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라난 곳은 산골 마을이었습니다. 시골이지만 200여 호가 사는 큰 동네였습니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60년대 초 그 동네에는 라디오 두 대가 있었습니다. 한대는 초등학교에 있었고, 또 한대는 마을 이장 집에 있었습니다. 이장 집에 있는 라디오는 이장의 개인 소유가 아니라 동네 공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공금으로 구입한 것이었습니다. 라디오 한대로 동내 전체가 듣기 위해 가가호호마다 스피커를 설치하고 그 스피커를 통해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장이 하루 세 차례씩 라디오를 켰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때가 되면 온 동네가 똑같은 채널의 라디오 방송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스피커를 통해 이장이 마을 소식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장소팔 씨와 고춘자씨의 재치 있는 만담도 듣고, 이광재, 임택근 아나운서의 뉴스와 운동경기 중계방송도 들었습니다.

그곳도 지금은 많이 변했습니다. 텔레비전이 없는 집이 없습니다. 칠순이 넘으신 숙부님께서 인터넷을 통해 우리교회에서 전하는 제 설교를 듣기도 하십니다. 엄청난 시대의 변혁을 가져왔습니다. 이 변화는 듣는 것에서 눈으로 보는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귀로 듣는 것보다 눈으로 보기를 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입니다.

이러한 욕망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4:8의 말씀에“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육인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경에 이르시기를“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한일서 4:12)고 하셨습니다. 공기가 있지만 눈으로 볼 수 없고, 전기나 전파가 있지만 눈으로 볼 수 없고, 소리가 있지만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냄새가 있지만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이렇게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존재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하나님 역시 사람의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칼발트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은 알 수 있는 분이지 볼 수는 없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을 가리켜 증인이라 부릅니다. 증인이라는 말은“확대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분명하게 잘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하나님을 깨달아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나타내시기 위해 여러 가지 기적을 나타 내셨습니다. 바다 위를 걸으셨고, 성난 풍랑을 말씀 한마디로 잔잔케 하기도 하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고자 죄인들을 사랑하시며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하늘나라가 있음을 깨닫도록 하시고자 무덤에서 살아나셨고, 500여 무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나라로 올라 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스승을 본받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면 하나님을 나타내시고자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본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의 본분입니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아 누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앞서간 성도들은 하나님의 증인의 삶을 살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 요셉은 깊은 믿음으로 인한 그의 표정과 성실한 삶을 통해 하나님을 나타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세계의 모든 문화는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유럽문화의 특징은 거의가 기독교적 문화입니다. 그때 화가들은 그림으로 하나님을 나타내고자 자신의 재능을 다했습니다. 음악가들은 자신의 재능으로 하나님을 영광을 나타내고자 노력했습니다. 문필가들은 글로서 하나님을 나타내고자 애를 썼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에게도 변함없이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입니다. 증인이라는 말은“확대하다.”라는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분명하게 잘 알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하나님을 깨달아 알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입술로, 문서로, 실천하는 사랑으로, 친절로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복음증거는 생명을 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 일은 가장 보람된 일입니다. 이 일은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이 일은 생명을 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곡백과가 탐스러운 열매를 맺혀 농부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계절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농장에 심겨진 한그루의 포도나무(요한복음 15장)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열매를 맺는 나무에 대하여 축복을 약속하시기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요한복음 15:2)고 하셨습니다. 농부는 좋은 열매 많이 맺는 나무를 더 잘 보호합니다. 관리합니다. 내년에 맺힐 열매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이 이와 똑 같습니다. 복음증거로 생명의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이 지키시면 아무도 해할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삶에는 요셉이 누린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삶에는 요셉이 누린 만족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삶에는 요셉이 누린 형통함이 있습니다.

요셉처럼 성실한 삶, 봉사하는 섬김의 삶으로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나타내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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