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네 손을 내밀라 (시 63:1~11, 막 3:1~6)

  • 잡초 잡초
  • 265
  • 0

첨부 1


네 손을 내밀라 (시 63:1~11, 막 3:1~6)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인가를 매 순간 접촉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접촉의 경험이 실제적인지 혹은 피상적인지가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나는 것들을 하나하나 실제적으로 접촉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게쉬탈트 심리치료에서는 이 실제적인 접촉을 ‘알아차림’(awareness)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실제적인 접촉을 통해 알아차리지 못한 것들은 우리 삶에서 늘 미해결과제로 남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접촉을 통해 알아차림이 되지 못하는 삶은 뭔가 해소되지 않은 피상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지난 한 주간을 살면서 여러분들은 많은 것들을 만나면서 살았습니다.  물론 사람도 만났고 여러 가지 사물들도 만났고 자연도 만났습니다.  또 일도 만나고 감정도 만났습니다.  책을 통해 배움도 만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도 만났습니다.  수많은 접촉을 가지며 살았습니다.  그런 만남들 가운데 우리는 얼마나 진정한 접촉을 가지면서 살았을까요?  얼마나 알아차리며 살았을까요?  피상적인 만남, 피상적인 접촉, 해소되지 않은 만남을 가지지는 않았을까요?  우리의 삶이 근원과 닿아있지 않을 때, 우리는 삶은 늘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이렇게 피상적인 삶을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몸에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단지 육체적인 결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각 장애들은 보지 못함으로 실제적인 접촉, 알아차림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표상입니다.  나병환자들은 사회적인 기피 인물들로서 그들의 피부의 질병이 외부와의 접촉을 막아버림으로써 그들은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살아갔습니다.  예를 들어, 수가성의 여인도 진정한 접촉을 이루지 못하고 산 사람의 대표적인 표상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갈증을 느끼고 정오에 물을 길으러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손 마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되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손으로 가꾸어지고 형성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붙잡습니다.  그러므로 손은 외부와 만나는 중요한 기관입니다.  접촉하고 알아차리는 매우 중요한 기관입니다.  우리는 필요한 것을 손으로 잡고, 주어야 할 것을 손으로 줍니다.  우리는 손으로 다른 사람을 만지고,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손으로 그 관계를 제지하기도 하고, 손으로 사랑과 친밀감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은 그가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 채, 눈치를 보며 자신의 손을 움츠리며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신의 손을 사용하지도 더럽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삶의 투쟁에서 멀리 벗어나 단지 관객의 역할로 만족해 왔습니다.  그는 눈치를 보며 정세를 관망하는 도중에 모든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게 되고, 그는 더 이상 손을 내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는 외부와의 접촉이 끊어진, 무력한 사람의 표상이며 어떠한 시도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안주하는 사람의 표상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눈치에 너무 길들여져 자신이 접촉하는 모든 것에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받아들일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면서, 늘 긴장된 삶을 살아왔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수용되는 것을 체험하기 위해 언제나 노심초사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거절당할 까봐 늘 걱정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실제로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졌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감각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늘 밖에서 오는 잣대로 평가를 해왔습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그를 사람들 앞에 불러 세우십니다. 

“일어나서 가운데로 나오너라.”

이제 그는 더 이상 사람들 속에 자신을 감추어 둘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 자신의 참 모습을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그는 자신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또 한 사람의 굳은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마음이 굳은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예수가 손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는가 살피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5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라고 했습니다.  새번역에는 “예수께서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시면서...”라고 했습니다.

사실 오늘 이야기를 잘 보면, 오늘 말씀은 손 마른 사람이 고침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핵심이 아닙니다.  오늘 이야기는 안식일에 이 일을 했다는 것이 핵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모두 전하고 있는데, 모두 안식일의 문제가 전면에 대두됩니다.

오늘 말씀을 잘 알려면, 2장 23절부터 보아야 합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게 되었는데, 앞에 가던 제자들이 밀이 우거져 있으니까, 지나가는 길을 내다가 밀 이삭을 자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보고는 예수님께 항의를 합니다.  “보십시오, 저희들이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될 일을 합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대답합니다.  “너희는 성경도 읽어보지 못했느냐?  다윗이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떡을 먹고, 그 신하들도 그것을 먹었던 것도 보지 못했느냐?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본문은 안식일 논쟁 2라운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이들은 예수님의 범죄를 현장에서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습니다.

3:2절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마치 덧을 놓고 먹이를 기다리는 자처럼, 눈을 번득이며, 예수님이 함정에 빠지기만을 기다립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덧의 먹이를 덥석 물었습니다.  슬쩍 고쳐 주실 수도 있는데 예수님은 그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 세워서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그를 고쳐 주십니다. 

마음이 굳어졌다는 말은 마음이 경직되어 부드럽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가만히 보면, 손이 오그라진 사람과 함께 마음이 굳어져 오그라진 사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오그라짐으로 세상을 바로 볼 수 가 없었습니다.

오늘 바리새인들은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손이 오그라진 장애인을 보고는 예수님을 잡는데 그를 미끼로 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불쌍하게 볼 눈을 그들은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형식주의, 권위주의, 이기주의, 분리주의, 우월주의 등에 사로잡혀 손이 오그라진 사람을 그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가엾은 마음이 일 사이가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를 죽일 미끼로 보였습니다.

마음이 삐뚤어진 사람은, 마음이 오그라진 사람은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우리도 괜히 심사가 뒤틀리면, 사람들이 바로 보이지 않습니다.  진정한 접촉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묘한 대조를 볼 수 있습니다.

5-6절, 손 마른 사람은 손이 회복되었는데, 마음이 오그라진 바리새인들은 더 마음이 굳어져서 헤롯당과 붙어 예수를 죽일 음모를 시작합니다.  결국 이들의 굳어진 마음이 예수를 십자가에 달고 맙니다.


세 번째 오늘, 본문에서 또 한 사람을 볼 수 있는데, 예수님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통쾌합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 말에는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애정이 깃들어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는 당시에 가장 중요한 종교행위였고, 신앙의 척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보다도 더 귀한 것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종교에 눈이 먼 사람들, 진정 하나님의 뜻은 모르고, 그 문자에 매여 있는 사람들, 종교라는 허울에 자신의 삶을 속이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회칠한 무덤이라고 비난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휴머니즘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종교를 개혁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떻게 진정한 접촉을 이루며 살 것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함정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합니다.  그는 거침이 없습니다.  율법의 계명을 지키는 것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자신의 믿음을 그는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이는 단지 개인의 확신이나 오기와는 다릅니다. 

그는 진정으로 늘 근원으로 돌아가 그 근원에서 오는 진정한 접촉을 이루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는 수가성의 여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요4:14)

예수님은 자신의 가치에 대한 강한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압니다.  모두가 반대 하더라도 예수는 반대를 무릅쓰고 그 일을 행합니다.  예수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쓸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여기는 것, 즉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일을 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힘은 그가 근원과 진정한 접촉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바로 이런 진정한 힘과 접촉하는 것입니다.  그 근원에 잇닿는 것입니다. 

나의 근원을 분명히 깨달읍시다.  나의 삶의 주인을 분명히 깨달읍시다.  나의 중심을 분명히 깨달읍시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따라 흔들리는 삶이 아니라, 내 중심에 계시는 그분을 신뢰합시다. 
형식과 외식에 묶여 있는 삶이 아니라, 내가 경험하는 진정한 접촉을 경험해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삶은 진정 나를 찾는 삶입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입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주님만을 기억하고 밤을 새우면서도 주님만을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우셨기에 나 이제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즐거이 노래하렵니다.  이 몸이 주님께 매달리니 주님의 오른 손이 나를 꼭 붙잡아 주십니다”(시63:6~8)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