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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는 어떤 곳인가?(13) :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의 씨앗을 지닌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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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어떤 곳인가?(13) :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의 씨앗을 지닌 곳 (롬 1:7-17)

오늘 아침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의 씨앗을 지녔던 로마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로마 교회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세워졌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마 로마에 살던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성지를 순례하던 중 오순절 날 성령의 은혜를 받고 로마로 돌아와서 교회를 세웠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행2:9 이하를 읽습니다.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행2:9-11).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로마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진 로마 교회는 가정교회였을 것입니다. 유명한 목회자나 지도자들도 없었습니다. 베드로도 바울도 아직 로마를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로마는 반 기독교 세력의 중심지였습니다. 부시 대통령의 말을 인용한다면 로마는 ‘악의 축’이었습니다. 조만간 그곳에서 기독교에 대한 대 박해가 일어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로마서가 서기 55년경부터 58년 사이에 고린도 근처에서 쓰여진 편지라고 생각하는데, 수년 후인 서기 64년에 로마에서 네로 황제에 의한 대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로마 교회는 반 기독교 세력의 중심지에 세워졌던, 매우 위태로운 처지에 있었던, 아주 미약한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회는 앞으로 반 기독교 세력으로 무장한 로마 세계를 변화시킬 무서운 힘의 씨앗을 지니고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믿음의 씨앗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씨앗을 지니고 있었던 로마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격려했습니다. “원수를 원수로 갚지 말고 사랑으로 갚으면서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권면했습니다. 믿음의 씨앗으로 무서운 로마 세계를 이기라고 권면했습니다. 사실 로마 교회는 250여 년 후에 반 기독교 세력의 무서운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고 기독교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콘스탄틴 황제는 서기 313년에 기독교에 신앙의 자유를 부여했고 점차 기독교에 특혜를 부여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로마 교회 성도들이 지녔던 세상을 변화시킨 믿음의 씨앗이 얼마나 귀중한 보화였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첫째,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의 씨앗을 지니고 있는 곳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롬1:8). 반 기독교 세력의 중심부인 로마에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씨앗을 지니고 산다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었을 것입니다. 믿음의 씨앗을 자기 가슴에 지니고 사는 것도 큰 축복인데 그것이 온 세상에 드러나고 온 세상에 전파되도록 생동적이고 활동적인 믿음의 씨앗을 지니고 사는 것은 더욱 더 큰 축복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에 사는 성도들이 지닌 믿음을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저들이 지닌 믿음이 사람들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믿음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서 생긴 믿음이었고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어서 생겨진 참된 믿음이었다고 증언을 했습니다. “너희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1:6,7).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 교회 성도들이 지닌 믿음에 대해서 글을 쓰면서 20여 년 전 핍박자였던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입고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으므로 지니게 된 믿음을 되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핍박자인 나를 부르셨는데, 너희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니라. 그 때 포행자인 나도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었는데, 로마에 있는 너희들도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었노라. 그 때 나에게도 하나님께서 믿음의 씨앗을 내 영혼 속에 심어 주셨는데, 너희 영혼 속에도 하나님께서 믿음의 씨앗을 심어주셨느니라. 그 때 하나님의 은혜로 나의 믿음이 온 세상에 알려지고 전파되었는데,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너희 믿음도 온 세상에 알려지고 전파되었느니라”(롬1:6-8). 그리고 사도 바울은 저들의 믿음과 자신의 믿음의 유기적인 일체성을 지적하면서 저들의 믿음과 자기의 믿음 안에서 피차 위로와 기쁨을 얻기를 원한다고 친밀한 고백을 했습니다.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롬1:12).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믿음의 씨앗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보다 더 큰 축복과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와 로마의 성도들이 같은 믿음의 씨앗을 지니고 살아가게 된 것을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돌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저들과 자기가 지닌 믿음의 씨앗이 얼마나 귀중한 보화인 것을 설명해주었습니다. 믿음의 보화가 지니는 세 가지 축복에 대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첫째 축복은 저들이 지닌 믿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복음을 믿는 믿음 즉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롬1:16). 인간의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문제는 구원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 사망으로부터의 구원, 지옥의 저주로부터의 구원, 사탄 마귀로부터의 구원, 두려움과 절망으로부터의 구원, 질병으로부터의 구원, 미움과 저주로부터의 구원, 시기와 질투로부터의 구원 등 구원이 인간의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문제인데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절망도 없습니다. 감사와 기쁨이 있을 뿐입니다. 기도와 찬양이 있을 분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유물도 아니고 백인들의 전유물도 아니고 모든 사람들의 공유물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로마 사람도 희랍 사람도 아프리카 사람도 조선 사람도 누구나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둘째 축복은 저들이 지닌 믿음이 의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힘과 삶의 방식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사람은 여러 가지 힘과 방식에 의해서 살아갑니다. 돈의 힘과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권력의 힘과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지식의 힘과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사업 의 힘과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향락의 힘과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이 선언은 오래 전에 선지자 하박국이 선언한 선언이었습니다.

강포와 간악과 패역과 겁탈과 분쟁과 전쟁의 폐허와 절망 속에서 하박국 선지자가 성루에 서서 하나님을 향해서 "어찌하여, 어찌하여, 어찌하여" 라고 소리를 지르며 부르짖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이 음성은 비현실적이고 황당무계한 음성같이 들렸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는 그 음성을 그대로 받아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7). "찌하여"가 "찌라도"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 바울이 하박국 선지자가 받은 황당무계한 하늘의 음성을 그대로 받아서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이 세상의 죄인들은 돈으로 살고, 권력으로 살고, 지식으로 살고, 사업으로 살고, 향락으로 살지만, 우리 의인들은 오직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하늘의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은 의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힘이고 삶의 방식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바보 같은 신자들만이 오직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청교도들이 오직 믿음으로 살았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오직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이성봉 목사님도 한경직 목사님도 박윤선 목사님도 바보들처럼 오직 믿음으로 사셨습니다.

셋째 축복은 저들이 지닌 믿음이 죄인들이 의인들로 만들어지는 유일한 방편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의 하나는 선인들이 되고 의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고 도를 닦고 수양을 하고 선행도 하고 고행도 합니다. 그런 방법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죄인들이 의인들로 변화되는 유일한 방법 한 가지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죄인들이 두 손 들고 항복하면서 하나님을 자기의 창조주로 믿고 예수님을 자기의 주님으로 믿는 방법입니다. 로마서는 이 진리를 분명하고 강하게 선포한 믿음의 헌장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0-22).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롬3:28,30).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롬4: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롬4:23,24).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믿음으로 의인들이 된 사람들이 누리는 화평과 행복과 즐거움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5:1-6,11).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부르심과 택하심을 입어 의인들이 된 사람들이 누리는 형통함과 행복과 승리의 절정을 다음과 같이 소리를 지르며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3-37). 지금까지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의 씨앗을 지니고 있는 곳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둘째,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의 열매인 사랑을 지니고 있는 곳입니다.

믿음의 씨앗이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 사랑입니다. 수고로운 사랑, 봉사의 사랑, 희생적인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 믿음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로마 교회의 성도들은 믿음의 씨앗만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믿음의 열매인 수고로운 사랑, 봉사의 사랑, 희생적인 사랑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를 위해서 사랑의 수고와 사랑의 봉사와 사랑의 희생을 아끼지 않은 몇몇 로마 교회 성도들의 이름을 로마서 16장에 열거했습니다.

먼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희생적인 사랑을 지적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롬16:3,4).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본래 로마에서 살던 초신자들이었는데 서기 49년경 글라우디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유대인들을 추방했기 때문에 고린도에 와서 살다가 거기서 사도 바울을 만나 사도 바울의 충실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고린도에서도 에베소에서도 그리고 다시 로마에서도 교회와 성도들을 희생적인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죽은 후에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 로마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으로 섬겼을 것입니다. 루디아처럼 자기 집을 내어놓고 자기 집을 가정교회로 삼았습니다. 에베소에서도 자기 집을 교회로 내어 놓았고 로마에서도 자기 집을 교회로 내어 놓았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고전16:19).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롬16:5).

그 다음 마리아의 수고로운 사랑을 지적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롬16:6). 우리는 마리아가 누군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마리아가 로마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의 수고와 사랑의 봉사로 섬겼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마리아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마리아의 노고는 교회 봉사를 위한 것이다. 기독신자는 노고를 피하거나 봉사를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마리아는 로마 교회 교인들을 위하여 애써서 일하였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모든 사람의 모본이요 특히 기독신자들의 모본이다.”

그 다음 로마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수고한 사람들의 이름들을 열거했는데 그들 중에서 세 사람만 더 열거합니다.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롬16:12).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이 말 속에는 버시라는 성도가 로마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얼마나 많이 수고하며 얼마나 많은 사랑을 베풀었는지를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그를 얼마나 많이 사랑했는지를 느끼게 합니다. 참 믿음은 사랑의 열매를 맺힙니다. 수고로운 사랑, 봉사의 사랑, 희생적인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 참 믿음의 열매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믿음의 씨앗이 사랑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로마서12장부터 구체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이제 그것을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믿음의 씨앗이 사랑의 열매로 나타나는 첫째 표시는 자기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12:1). 믿음의 씨앗이 사랑의 열매로 나타나는 두 번째 표시는 형제와 이웃과 성도들을 사랑하고 우애하고 존경하고 대접하는 것입니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12:10,13). 믿음의 씨앗이 사랑의 열매로 나타나는 세 번째 표시는 핍박자와 원수들을 축복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4-21). 사도 바울은 롬13장에서 결국 사랑이 믿음의 완성이고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롬13:8-10).

셋째, 로마 교회는 사도 바울의 사모와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제 3차 선교여행 중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썼는데 그의 마음과 생각은 온통 로마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에 나타나신 주님께서 사울에게 부여하신 이방인의 사도가 되는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땅끝이요 반 기독교 세력의 중심부인 로마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항상 사도 바울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는 로마로 가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소원하며 기도한다고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내가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1:9-15).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는 너희를 보고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보내줌을 바람이라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나로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찌어다 아멘”(롬15:22-24,29,31-33).

결국 사도 바울의 자기의 간절한 소원과 간절한 기도대로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끌려갔습니다. 데모하려고 간 것도 아니고 항의 시위하려고 간 것도 아니고 인권운동을 하려고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악의 세력에 대한 증오와 분노의 마음을 품고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죄수의 몸으로 붙잡혀 가서 로마에서 감옥살이를 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행28:23).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더라”(행28:30,31).

로마 옥중에서 쓴 옥중 서신인 빌립보서에서는 로마 옥중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빌1:12-14). 사도 바울의 매임이 시위대 안에 있는 로마 군인 장교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고 로마시 안에 살고 있으면서 박해 때문에 두려워하고 겁에 질렸던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 힘을 얻고 용기를 가지고 거리로 나와서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기쁨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간절한 소원과 기대는 자기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복음이 로마 세계에 전파는 되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0-21).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피 제사]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2:17).

결국 사도 바울은 로마 세계 복음화를 위한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아니 그 후 250여 년 동안 수 십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두 사도의 뒤를 따랐습니다. 저들은 반 기독교 세력의 중심부였던 로마 황제의 궁전 앞에 모여서 데모나 항의 집회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민주화 운동이나 인권운동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때로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는 그와 같은 운동을 주도하거나 암시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바보들처럼 죽어갔습니다. 수 십만 명의 로마 교회의 성도들도 묵묵히 그 길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로마 제국 안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순교자들이 피를 흘리면 흘릴 수록 곳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고 있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라틴 신학의 교부 터툴리안은 서기 197년 변증서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베어버림을 당하면 당할 수록 우리의 수는 그만큼 늘어난다.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로마 교회는 로마 세계를 변화시키고 말았습니다. 믿음의 씨앗으로 사랑의 열매로 그리고 순교의 피로 로마 세계를 뒤집어 놓고 말았습니다.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의 씨앗을 지닌 곳이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열매를 지닌 곳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사모와 사랑의 대상이 되는 곳이고 순교의 피를 쏟는 제단이 되는 곳입니다. 그것이 로마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지금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정치적인 방법이나 군사적인 방법이나 경제적인 힘으로 세상이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데모나 시위로 이루어지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믿음의 씨앗과 사랑의 열매를 지닌 미약한 교회를 통해서 그리고 제단에 뿌려지는 순교의 피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너무 어렵고 심각한 내용의 설교를 해서 죄송합니다. 저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내용의 설교를 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제가 지난 며칠 동안 로마서를 다시 묵상하면서 얻은 결론이기 때문에 이렇게 설교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너무 어렵고 너무 심각한 내용의 설교를 통해서도 은혜와 감동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서도 깊은 은혜와 감동을 받은 성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 설교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면 우리들이 은혜와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로마 교회와 로마 교회 성도들이 지녔던 믿음의 씨앗과 사랑의 열매를 사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단에 드려지는 순교의 제물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한국 교회도 지금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베푸셨던 믿음과 사랑의 은혜를 우리들에게도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에게 베푸셨던 사모와 사랑의 은혜 그리고 악의 중심부로 달려가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은혜까지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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