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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여호와께 구하였다 함이라 (삼상 1: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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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호와께 구하였다 함이라 (삼상 1:19~28)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금 저속한 소재가 사용되기는 했지만 그 내용 자체는 아주 잘 맞아 떨어지는 실감 있는 비유입니다.
  실제로 급한 사정에 처해 있을 때의 사람과 그 급한 고비를 넘긴 후의 사람이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이 인간사회에서 너무나도 자주 보지 않습니까?
  즉 어려운 처지에 빠져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때에는 더없이 간절하고 겸손하기만 하던 사람이 일단 그렇게 도움을 받아서 그 어려움을 빠져나오게 된 후에는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완전 딴판의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도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이런 일을 하나님 앞에서도 태연히 버릇처럼 행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기도드리면서 서원했던 약속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이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신자라 한다면 무슨 다급한 일 있을 때 기도는 누구나 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급한 일 지나가면 그야말로 '완전 딴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만 의지한다던 그 열심이 바람처럼 간 곳 없이 사라지고, 이 소원만 들어 주시면 이렇게 저렇게 충성하겠다고 하던 서약들은 봄눈 녹듯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참된 기도의 신앙인은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을 두고 간절히 기도할 때 보여 주었던 마음과 자세를 그 기도 응답 받은 후에도 조금도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 지키고 이행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사무엘의 어머니, 저 유명한 한나가 바로 그런 대표적인 성도였습니다.
  그녀의 기도가 그처럼 훌륭한 모범이 되었던 것은, 단지 그녀가 기도만 바로 드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 기도에 따른 약속 즉 서원 또한 조금도 틀림없이 다 지켰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과연 어떻게 '처음과 끝이 같은' 신실한 기도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주신 말씀을 통하여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기도 후에 그것을 이루어주시는 응답을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19절과 20절에 "19그들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20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고 기록했습니다.

  18절 이전에 나와 있는 대로 한나는 하나님께 아들을 주십사는 간절한 기도를 서원의 약속과 함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다음날 "그들" 즉 한나와 그의 남편 엘가나는 함께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전날 그처럼 간절한 기도를 드렸지만 바로 그 다음날에도 또 하나님께 기도드림으로써 하루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성도들이 일과를 시작하기 전 매일의 첫 시간에 교회에 나와서 혹은 집에서 개인적으로 새벽기도를 드리듯이, 이 부부도 이른 아침의 경건시간을 지키는 기도의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귀가한 후 그들이 예전과 같이 부부생활을 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한나를 "생각"해 주셨습니다.
  1장 11절에서 한나가 기도할 때 "나를 생각하시고... 아들을 주시면"이라고 했던 바로 그대로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여기 "생각하신지라"는 말은 '잊지 않았다'는 정도의 뜻이 아니라, '권고하다' 즉 '자세히 살피고 크게 돌보아 주신' 것을 말합니다.
  성도의 간구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상하고도 철저하게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돌보심 덕분에 한나는 드디어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지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자기 자식에게 즐겨 붙여 주고 있는 이 유명한 이름은 '하나님께 간구하다' 혹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다'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한나가 "이는 내가 그를 구하였기 때문이다."라는 의미에서 그런 이름을 지은 것은, 그녀가 오매구지(寤寐求之)하던 아들을 얻게 된 그 기쁨의 흥분 가운데서도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올렸던 사실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녀는 자신의 득남을 천신만고 끝에 얻게 된 행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인내의 결과라고도 생각하지 않았고 혹은 부부 사이의 끊임없는 신뢰와 노력의 열매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아들은 오직 자기가 간구한 대로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응답해 주심으로써 얻게 된 것임을, 그 사무엘을 낳게 된 바로 그 순간에 똑똑하게 기억했던 것입니다.

  기도는 해 놓고도 그 응답이 임했을 때에는 그것이 기도의 결과인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도했던 것은 그저 기도만으로 끝나고, 그 다음에 일어난 일들은 그 기도와는 아무 상관없는 별개의 사실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사람은 기도를 끝내고 눈을 뜨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 기도는 이제 완전히 끝났다고 여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 기도가 끝나는 때는 우리가 '아멘'이라고 말하는 그 순간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기도는 반드시 시행된다.'고 했으니, 그 응답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 기도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흔히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아직 끝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는데, 이것은 기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자기가 스스로 드렸던 기도조차 '아멘'이라는 말과 동시에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는 확신은커녕 기대조차 사실상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입술로써 형식적인 기도만 하지 그 기도의 효능과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의 능력을 사실상 믿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그 응답을 받게 된 일 자체가 너무나도 좋아서 그 흥분된 감정에만 몰입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자식을 드디어 얻게 되었을 때, 거의 가망 없어 보이던 병이 낫게 되었을 때, 악전고투하던 사업이 기사회생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기쁨에 너무 겨워서 그동안 기도해왔던 사실과 이것이 기도의 응답이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기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될 경우에 하나님의 기분은 어떠하시겠습니까?
  기도를 통한 요청을 받고 모든 사랑과 능력을 동원하여 응답해 주셨는데, 정작 그 응답을 받은 쪽에서는 제 혼자서 마냥 좋아하기만 하고 당신 쪽으로는 얼굴 한 번 돌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으로서는 그 얼마나 무시당하시는 일이 되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응답이구나. 하나님께서 결국 내 기도를 들어주셨구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듣고 싶어 하실 말, 아니 당연히 들으셔야 할 최소한의 반응입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를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이 올 때, 그 즉시 '내가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셨구나.'라고 꼭 깨달을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응답을 받는 순간에 그 기도와 함께 서원했던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21절로부터 23절에 "21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22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23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선한 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그 여자가 그 아들을 양육하며 그 젖 떼기까지 기다리다가"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매년제"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이 매년 정기적으로 성소에 찾아 가서 제사 지내던 절기들 중에 하나를 뜻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장막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됩니다.
  또한 "서원제"란 문자 그대로 서원을 확인하는 제사였는데, 엘가나는 무슨 이유로 매년제를 드릴 때 서원제를 함께 드렸던 것이었습니까?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을 낳은 후에 한나는 어린 아들을 돌보아야 했기 때문에 그 매년제에 함께 올라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자기가 하나님께 서원했던 사실을 잊었거나 모른 채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라는 자기 남편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앞서 1장 11절에서 "나를 생각하시고...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했던 그 약속을 그녀는 조금도 바꾸거나 줄이지 않고 오히려 그 서원을 남편에게 알리고 동의를 구했던 것입니다.

  이 서원 확인의 절차 역시 율법의 말씀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민수기 30장 6절부터 8절에 "6또 혹시 남편을 맞을 때에 서원이나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경솔히 그 입에서 발하였다 하자 7그 남편이 그것을 듣고 그 듣는 날에 그에게 아무 말이 없으면 그 서원을 행할 것이요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지킬 것이니라 8그러나 그 남편이 그것을 듣는 날에 허락지 아니하면 그 서원과 마음을 제어하려고 경솔히 입술에서 발한 서약이 무효될 것이니 여호와께서 그 여자를 사하시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내의 서원은 남편의 동의, 또 딸의 서원은 아버지의 동의를 얻음으로써 비로소 유효하게 되며, 그렇지 아니할 때에는 그 여자에게 아무 과오를 묻지 않고 서원을 무효화시켜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독단적이고 성급한 서원으로 가정의 화목이 깨어지기를 원치 아니하신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하지만 한나의 그런 말을 들은 남편 엘가나는 "당신 마음에 좋은 대로 하시오."라고 허락하면서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다시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서원의 말을 지키도록 도우시기를 원하노라'는 뜻입니다.
  즉 엘가나 역시 자기 아내 한나가 하나님께 서원했던 것을 그대로 정확히 지키기만을 바라면서 적극적으로 후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가나가 매년제와 함께 드렸던 서원제는 바로 그 한나의 서원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제사였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실로 이 부부는 일단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단 하나도 틀림없이 그대로 지켜야 된다는 점에 대하여 이처럼 완벽한 부창부수(夫唱婦隨)였던 것입니다.

  돈 빌려 달라고 부탁해 올 때의 사람이 일단 돈을 빌리고 나서는 180도로 바뀌게 되는 것을 흔히 봅니다.
  꾸어 주기만 하면 언제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갚겠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하지만, 일단 돈을 빌리고 나면 도대체 돈 빌린 것을 기억이나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결국에 가서는 오히려 빌려 준 사람이 받을 돈 독촉을 해야 하는 '나쁜 사람'이 되어 버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신뢰할 수 있는 인간관계'를 지키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도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빌려 준 것을 내 쪽에서 오히려 까맣게 잊어 먹고 있을 때 상대편 쪽에서 잊지 않고 돌려주면, '아, 이 사람은 정말 믿을 만하구나.' 하고 그 사람을 새로 보게 됩니다.
  하지만 내 쪽에서 무슨 약속 받은 것을 틀림없이 기억할 뿐 아니라 기다리고 있는데도 상대편 쪽에서는 까마득히 잊고 있으면, 그 사람에 대한 신용과 그 사람과의 관계가 동시에 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억력은 어떠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서원을 드렸을 때 적어도 하나님 편에서 그것을 잊는 경우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 편에서는 결코 잊지 않고 계시는데 우리 쪽에서 하나님께 드린 약속을 가볍게, 무성의하게 잊어버린다면, 그 관계란 것이 제대로 지속될 리가 만무합니다.

  애당초 기도드릴 때 어떤 서원이 없었다면 아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서원이 있었다면 문제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권념해 주시고 응답해 주실 때 자기 자신이 그 기도와 함께 서원했던 약속 또한 틀림없이 기억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신실하고 강력하게 성장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3. 그 서원했던 일을 오직 감사와 기쁨으로 반드시 이행해야 합니다.

  24절 이하 28절까지 말씀에 "24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25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26한나가 가로되 나의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27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28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드디어 한나가 그 서원을 이행하는 때가 왔습니다.
  바로 사무엘이 "젖을 뗀 후"였습니다.
  그때는 아직 "아이가 어린" 때라고 했는데, 이것은 최소한 만 세 살 혹은 그 이상 다섯 살 정도까지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는 우유를 신선하게 보관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젖을 떼는 시기가 오늘날보다 훨씬 더 늦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갓 젖 뗀 아이란 어쨌든 부모 밑을 떠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그 귀한 아들을 그처럼 아직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보내는 것은 인간적으로 정말 어려운 일이었음에 분명했지만, 한나는 그것을 오히려 감사와 기쁨으로 이행했습니다.
  여기 "수소, 가루" 등의 제물은 화목제에 쓰이는 것들입니다.
  무녀독남을 하나님께 바치면서도, 거기에다 오히려 감사의 제물까지 함께 바쳤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나는 엘리 제사장에게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서원한대로 지금 사무엘을 하나님께 헌신시키려 왔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말은 자기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강조할 때 그 당시 사람들이 쓰던 관용적인 표현이었습니다.
  그녀가 아들을 위하여 기도드리면서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다"고 서원했던 그대로 지금 그녀는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가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친 것은 실로 '온전한' 서원 이행이었습니다.
  '평생'이라고 약속했던 것에서 조금도 줄이지 않고, 그 서원한 그대로 젖 떼자 말자 그 아들의 인생 전부를 남김없이 하나님께 드렸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한나는 서원을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이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사무엘을 끝까지 내놓지 않고 자기 품에 붙잡아 둘만한 핑계도 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남편에게 말하면서도 "내가 그렇게 서원하기는 했지만 당신이 반대하시면 얼마든지 합법적으로 취소될 수도 있는 일이지요."라고 은근히 유도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들을 혼자 가지는 기쁨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을 그 아들을 하나님께 완전히 바치는 것을 통하여 체험했던 신자였습니다.
  바로 그런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중에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 서원한 전부를 바쳤던 것입니다.

  구혼할 때의 남자와 막상 결혼하고 난 후의 남편이란 것도 영락없이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자기와 결혼만 해 주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온갖 달콤한 소리 다 했다가도 신혼 지날 무렵 쯤 되면 벌써부터 식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마치 제 간이라도 꺼내어 줄 것 같던 남자가 이제는 그저 이것저것 아내 시켜 먹기만 하려 하는 '간 큰 남자'로 바뀌고 마는 것을 보면서 아마도 적지 않은 여자들이 한숨만 쉬면서 살고 있을 것입니다.
  '평생' 사랑하겠다고 하고 결혼했으면 정말 '매일같이' 그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것이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변함없이' 부부의 대의와 정조를 지키겠다고 한 것은 바로 그 서약을 진실하게 지킴으로써 무슨 일이 벌어져도 결코 빼앗길 수 없는 부부의 행복을 영원히 함께 나누고자 함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맺은 서약을 지키는 것 역시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가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서원한 대로 이행하는 그 자체 역시 기도 응답을 받은 기쁨에 더해지는 기쁨이며 더 큰 축복으로 나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서원 이행은 결코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 정말 감사하면서,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가지고 누리고 있는 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기도 응답으로 주신 것도 있지만, 우리가 기도드리지 않아도 '이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미리 주신 것들이 훨씬 더 많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자녀이든지 물질이든지, 아니 내 생명 그 자체까지도 전부가 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일 뿐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내 것이라고, 내 소유라고 손아귀에 붙들고만 살려고 하면 서원의 기쁨이나 헌신을 통한 더 큰 축복은 결코 체험할 길이 없는, 아주 '작은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바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희생'을 드리지 않고 그저 '남는 것'만 드리는, 자신의 '전부'를 드리지 않고 그저 '부스러기'만 가지고 체면을 세우려 하는 것 역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행위일 뿐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서원한 대로 '전부'를 바치는 자는 그저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중에 바치게 되지만, '일부'만을 바치는 자는 오히려 그 조금 내는 것조차 큰 부담을 가지고 억지로 바친다는 사실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그런 약은 속임수를 감히 쓰려 하지 아니하고 무슨 서원이든지 처음에 약속드렸던 그대로 온전히 이행함으로써 하나님께 진정 뜨거운 감사를 드리고 또 하나님께서 그 응답하신 축복 위에 더 크게 더하여 주시는 축복까지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한나가 낳은 아들은 사무엘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그 아들은 '하나님께 간구하고 하나님께서 들으셔서 얻은' 아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사무엘은 이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바쳐야 할' 아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무엘은 한나의 아들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높이 들어 크게 쓰시는 가장 위대한 사사요 제사장이요 선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처럼 한나가 기도만 간절히 드렸을 뿐 아니라 그 서원까지 완전히 이행함으로써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는 너무나도 멋있는 결론을 맺게 되었음을 증거해 줍니다.
  그러므로 한나는 서원 이행 때문에 자기 자식을 잃은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언젠가는 떠나갈 것이고 언젠가는 내어 보내어야 할 자식을, 세상에 빼앗기는 일이 생기기 전에 완전히 하나님께 가도록 바쳤던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닌 서원 이행이었습니다.
  무자하던 한 여인이 기도하고 얻게 된 아들 하나를 그 서원했던 대로 일찍부터 하나님께 헌신시켰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한나의 그와 같은 서원 이행은 결국에는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를 그 전성기로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크게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 지키지 않고 욕심을 내었더라면 그저 한 어머니가 아끼는 독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었겠지만,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에는 민족과 조국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끄는 큰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큰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지만 그런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그 기도에 서원이 따라야 하며 그 서원은 반드시 기억되고 이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그 기도를 통하여 '내 뜻대로'가 아니라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방적으로 받으려고만 하는 기도는 분명히 이기적인 기도이며 사실 욕심쟁이의 소원 나열과 별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서원 이행이 따르지 않는 기도는 그야말로 철면피의 기도이며 하나님을 속여 먹으려는 신성모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란 것이 그처럼 급한 불끄기 위한 임시방편처럼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서원이 동반되는 기도를 드려야 하며, 그 서원대로 이행함으로써 그 기도를 끝까지 완성시켜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때 그것을 즉시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순간 또한 그 기도 드렸을 때 어떤 서원을 했었는지를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서원한대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오직 감사와 기쁨으로 이행함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기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사불란한' 온전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 경향교회를 통하여서도 우리는 이런 기도체험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경향의 3만 교세, 강서성전 건축, 신학교의 발전, 세계를 정복하고 있는 선교활동 등 정말 기적적인 역사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런 것들을 어떻게 무심히 보고 넘길 수 있겠습니까?
  경향의 개척시대 때부터 원로목사님께서 공적으로 분명히 기도해 오셨던 제목들, 경향의 장로님들이 믿음으로 바라보고 기다렸던 일들, 그리고 경향의 성도들이 합심하여 새벽기도회와 금요기도회를 통하여, 공기도와 개인기도를 통하여 함께 간구했던 소망들이 실제로 고스란히 응답을 받은 결과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응답인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정말 '눈뜬장님'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우리는 지금 '교육관 2000평 구입'이라는 또 하나의 엄청난 기도 응답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기도의 응답을 받고서도 '기도드릴 때 다르고 응답 받은 후에 다른' 사람이 된다면 그 얼마나 부끄러운 노릇이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지금 우리 교회에는 400명에 가까운 '별 서원자'들이 있습니다.
  앞으로 이들이 자신의 삶을 그 서원한 대로 오직 '감사와 기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 사역을 위하여 바침으로써 이 장래의 '사무엘'들이 조국 교회와 세계 선교 역사에 위대한 인물들로 높이 떠오를 것을 상상만 해 보아도 가슴 벅차지 않습니까?

  참된 기도, 능력 있는 기도는 '아멘'이란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사무엘'이라는 감사로 이어지며 '나도 그를 드리나이다'라는 서원 이행에 이르러 완성됩니다.
  간절히 구하는 바가 있을 때 그 기도를 진실한 서원과 함께 드리고, 그 기도 응답 받을 때 서원한 바를 틀림없이 기억하고 성실히 지킴으로써, 개인의 축복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크게 쓰임을 받는 실로 능력 있는 기도생활하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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