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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에 이르는 길(2) : 장애물1 - 욕심↔자족 (삼하 19: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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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過慾에서 寡慾으로>
지난 주부터 우리는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 행복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주부터는 행복에 이르는 길을 적극 찾아 나서고자 합니다. 그런데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기 위해서는 부정의 방법을 취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신학에 있어서 'Via Negativa', 즉 '부정의 방법'이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러이러한 분이다"라는 긍정형을 쓰는 것보다 "이러이러한 분이 아니다"라는 부정형을 쓰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하나님은 물체가 아니다. 악하지 않다. 무지하지 않다. 무능하지 않다. 등등. 부정형을 쓸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더 잘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에 이르는 길이 어디에 있다." 이렇게 긍정형을 쓰는 것보다 "이것은 행복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라는 부정형을 쓰는 것이 더 좋습니다.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고 선 장애물이 무엇인가를 알아내서 그 장애물들을 하나 둘 제거해 나가는 쪽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말이지요.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물 제 1호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욕심'이라는 말이 제일 먼저 튀어나왔습니다. 욕심 없는 사람이 없을 것이기에, 더 정확히 말해서 지나친 욕심, 즉 '과욕'(過慾)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한문으로 또 하나의 '과욕'(寡慾)이 있습니다. 욕심이 적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지나친 욕심 過慾은 행복에 이르는 장애물이 되지만, 적은 욕심 寡慾은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이 됩니다.

요즈음 나라를 시끄럽게 하는 신정아 스캔들도 알고 보면 욕심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추구해 온 세 가지 욕심이 있습니다. Money(물욕)와 Power(권력욕)와 Sex(정욕)입니다. 이번 사건은 신기하게도 이 세 가지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가 한데 뒤엉켜서 일어난 일입니다. 요일 2: 16에서 말씀하는 '육신의 정욕'(the desire of the flesh)과 '안목의 정욕'(the desire of the eyes)과 '이생의 자랑'(the pride in riches)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지요.

<욕심으로 '얼굴', '얼의 꼴'이 망가진 사람들>
어떤 분이 '얼굴'이라는 말의 어원을 풀이해놓았는데 제가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옛사람들은 얼굴을 '얼골'로 쓰기도 했는데 얼굴은 '얼의 꼴', 즉 마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얼굴의 원뜻이 우리 마음의 꼴이라는 풀이는 참 충격적이었습니다. 사람은 생긴 대로 노는 것이 아니라 노는 대로 생긴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어떤 마음을 가졌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모습도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링컨 대통령이 사람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는데 우리의 얼굴 모습이 우리의 마음이나 인격의 표현이 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얼굴이 얼의 꼴이라면 마음에 욕심이 가득한 사람이 행복해 보일 리 만무합니다.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에 욕심을 부려 원죄를 저질렀던 아담과 하와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욕심을 이루었을 때 찾아온 것은 두려움과 수치심뿐이었습니다(창 3: 7, 10).

아간은 또 어땠을까요? 여리고 성이 무너지던 날 하나의 전리품도 챙기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아간은 전멸시켜서 하나님께 바쳐야 할 물건에 욕심을 냈습니다. 한 사람의 욕심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하나님의 진노가 미쳤습니다. 여리고 성을 너무나 쉽게 무너뜨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손쉬워 보였던 아이성 전투에는 대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아간 한 사람의 탐심 때문이었지요. 결국 아간과 그 가족과 그가 그처럼 욕심을 부렸던 일체의 재산은 아골 골짜기에서 돌무더기 속에 묻히고 말았습니다(수 7: 22-26). 여호수아와 백성 몰래 전리품을 빼돌리던 아간의 얼굴 모습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려운 모습이었지 결코 행복한 모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의 얼굴은 그의 욕심 사나운 얼의 꼴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아말렉과 싸울 때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아말렉의 모든 소유를 진멸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욕심 때문에 가장 좋은 전리품만 골라서 챙겼습니다(삼상 15: 9). 욕심을 채운 사울의 얼굴이 행복해졌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 때부터 그 얼굴에는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발은 엄청난 거부였습니다. 양 떼가 삼천 마리, 염소 떼가 천 마리나 되는 갑부였습니다. 양털 깎는 축제 날 600 용사를 거느리고 정처 없이 쫓겨다니던 다윗이 양식을 도와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습니다. 다윗의 군사들은 일찍이 나발의 목자들에게 음양으로 도움을 준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욕심꾸러기 나발은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그것도 10명의 부하들 앞에서 다윗에 대한 인신공격을 퍼부으면서 아주 기분 나쁘게 거절했습니다(삼상 25: 10-11). 그 많은 재산 가운데 조금만 나누어줘도 큰 힘이 되었을 텐데 그걸 하지 못했습니다. 지나친 물욕 때문이었지요. 한번도 나발의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미련한 데다가 온갖 탐욕으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 모습을 쉽게 연상할 수 있습니다. 

많은 재산을 가졌던 부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물질만 가지고서는 참된 행복을 누리지 못했던 그는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제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대답했습니다. 청년은 십계명을 비롯한 모든 계명들을 착실히 지켜왔기 때문에 이제 또 무엇이 부족하냐고 반문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준 뒤 나를 따르라"(마 19: 21). 진정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진실로 영생 얻기를 원한다면, 참 행복과 영생에 장애물이 되는 소유물부터 먼저 청산하라는 주문이었지요. 그러나 그 부자 청년은 고개를 떨구고 고민했습니다. 그런 뒤 깊은 근심을 싸안고 주님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 청년에게는 버려야 할 재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마 19: 22).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근심이 떠나갈 날이 없었을 그 청년의 얼굴이 행복해 보였을 리 만무합니다.

지나친 욕심 때문에 패가망신한 경우를 하나만 더 들겠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초대교회는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했던 원시 공산사회였습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바치면 사도들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소유를 팔았습니다. 당연히 그 값 전부를 사도들에게 바쳐야 되는데 얼마를 따로 떼어놓아 숨겼습니다. 순간적인 물욕이 마음 속에 들어왔기 때문이지요. 결국 두 사람은 성령을 속이고 지나친 욕심을 부린 대가로 결국 목숨을 잃었습니다(행 5: 1-11). 지나친 탐심 때문에 사도들을 속이고 하나님도 속이려고 했던 그 얼굴 모습이 행복했을까요?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성경 그 어느 곳을 보더라도 지나친 탐심 때문에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한결같이 지나친 욕심 때문에 불행했으며 그 마침은 멸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약 1: 15의 말씀은 언제 들어도 옳고도 옳은 말씀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우리가 죄를 짓는 첫 번째 이유는 욕심 때문입니다. 더 많이 갖고 싶은 욕심, 더 높아지고 싶은 욕심, 더 많이 즐기려는 욕심, 끝이 없는 욕심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심지어 너무 많이 알려고 하는 지적 욕심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병이다"라는 속담도 있고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욕심이든지 간에 욕심에는 만족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밑 빠진 독에다가 물을 붓듯이 채워도 채워도 그 한계를 모르는 것이 인간의 욕심입니다. 두더지 게임을 하듯이 한 가지 욕심을 망치로 때려 잠재워놓으면 또 다른 욕심이 고개를 내밉니다. 그러므로 이 욕심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참된 행복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해후: 다윗과 바르실래>
지나친 욕심 過慾이 행복의 장애물이 된다면 적은 욕심 寡慾이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일 것입니다. 더욱 더 정확하게 말씀드려서 자족하는 삶, 즉 스스로 만족하는 삶이 행복에 이르는 첩경일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지나친 탐심 때문에 패가망신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은 반면에, 욕심을 줄여서 행복해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데 본문에 나오는 바르실래가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다윗과 바르실래의 만남은 성경의 여러 만남 중에서 가장 행복하고 달콤한 만남이었습니다. 바르실래는 길르앗 출신으로서 매우 부유한 지주였습니다. 삼하 17: 27-29을 보면 다윗이 아들인 압살롬과 전쟁을 치르게 되었을 때 바르실래는 마하나임에서 다윗 군대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압살롬의 군대가 바르실래의 고향땅인 길르앗에 진을 쳤을 때 압살롬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윗 군대를 지지하며 침대와 이부자리와 대야와 질그릇을 가지고 왔고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씨도 가져왔습니다. 바르실래 일행은 다윗 군대가 광야에서 지치고 굶주리고 목말랐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꿀과 버터와 양고기와 치즈 같은 음식도 가져와 다윗 일행을 도와주었습니다. 어려웠을 때 누군가 큰 도움을 줄 때 그것은 평생을 잊을 수 없습니다.

드디어 다윗이 압살롬과의 전투에서 승전을 거두고 예루살렘으로 환궁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궁전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요단 강을 건너려던 차에 바르실래가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이 때에도 어떤 보상을 바래서가 아니라 요단 강을 건너는 다윗을 돕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순수한 동기와 목적으로 다윗을 내방했던 것이지요(31절). 그 때 다윗이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자기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은인을 만났습니다. 당연히 다윗은 그 은덕을 갚기 위해 자기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고 권유합니다.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33절). 바로 이런 부탁을 들은 바르실래의 응답이 오늘 말씀의 키 포인트입니다.

본문 34-37절 말씀을 새번역으로 풀어 읽겠습니다. "제가 얼마나 더 오래 산다고, 임금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겠습니까? 제 나이가 지금 여든입니다. 제가 이 나이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어떻게 가릴 줄 알겠습니까? 이 종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신들, 그 맛을 알기나 하겠습니까? 노래하는 남녀가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들, 제가 이 나이에 잘 알아듣기나 하겠습니까? 그러니 이 종이 높으신 임금님께 다시 짐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이 종은 임금님을 모시고 요단 강을 건너려는 것뿐인데,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이러한 상을 저에게 베푸시려고 하십니까? 부디 이 종을 돌아가게 하셔서, 고향 마을에 있는 제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덤 곁에서 죽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대신에 이 종의 아들 김함이 여기에 있으니, 그가 높으신 임금님을 따라 가게 하시고, 임금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그에게 잘 대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참 아름다운 부탁에 대한 아름다운 거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이 예전에 받은 은덕을 잊지 않고 다시 갚으려는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말도 있는 것처럼 대개 과거에 받은 은혜는 잊기 쉬운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것은 바르실래의 욕심 없는 모습입니다. 바르실래는 나이가 여든입니다. 노욕(老慾)을 경계하라는 말도 있듯이 나이 많아지면 욕심도 많아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바르실래는 욕심을 깨끗이 비워내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제 기력이 다 쇠해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제가 예루살렘 궁전에 들어가 호강을 해봤자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임금님께 폐가 되고 짐이 될까 두렵습니다. 제가 여기 강가에 나온 것은 임금님이 편안히 요단강을 건너가도록 돕기 위해서이지 그 어떤 보상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저 고향 선산에 묻힌 부모님 곁에 묻혀 평안히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도 임금님께서 정히 저에게 은혜 베풀기를 원하신다면 제 젊은 아들 김함을 저 대신 잘 돌봐주시면 그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바르실래의 모습은 자기 분수를 아는 모습입니다. 지나친 욕심 過慾을 부리지 않습니다. 자기 아들 김함만 생각하는 적은 욕심 寡慾이 있을 뿐입니다. 자기가 처해야 할 위치를 알았습니다. 자기가 누릴 수 있는 분복(分福)이 어디까지인 줄 알았습니다. 자기 혼자 복을 다 누려 자식 복까지 가로채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욕심을 줄이는데 자기의 참 행복이 있음을 밝히 깨달은 것이지요! 그러기에 바르실래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왕상 2: 7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땅히 길르앗 바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저희로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예하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의 낯을 피 하여 도망할 때에 저희가 내게 나아왔었느니라." 바르실래를 기억한 다윗이 그의 아들들에게 은혜를 갚았다는 말씀이지요. 바르실래의 복은 자손들에게까지 길이 계승되었던 것이지요!

<욕심을 더하는 삶에서 욕심을 줄이는 삶으로>
사람들은 자기가 현재 누리고 있는 '이것에' 대해서 만족하고 감사할 줄 모릅니다. "남의 떡이 크게 보인다"는 속담도 있듯이 자꾸만 저기 있는 '저것에' 욕심을 부립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손에 쥔 '이것도' 적지 않은데 도무지 만족할 줄 모릅니다. 저기 멀리 있는 '저것이' 더 좋을 것만 같아 거기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에' 자족할 줄 모르고 '저것'에만 욕심을 부릴 때 참된 행복은 없습니다. 바르실래는 지금 자기가 누리고 있는 '이것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궁전의 화려한 '저것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 5: 3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는데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욕심을 부려서 저기 멀리 있는 저것을 잡으려 하지 않고 지금 누리고 있는 이것에 자족하는 사람이 날마다 천국을 소유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행복에 이르는 길을 막고 서 있는 첫 번째 장애물은 욕심입니다. 하나를 가지면 둘을, 둘을 갖고 나면 셋, 열, 백, 천, 만을 갖고 싶은 것이 욕심의 정체입니다. 신기한 것은 욕심을 채울수록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려워집니다. 재산이 늘어날수록 도둑 들까 두려워 담장을 높이고 경보기를 설치하고 재산 보험 화재 보험을 듭니다. 명예가 높아질수록 그 명예를 지키기도 어렵고 시기하는 이들이 나타나기에 점점 더 외로워집니다. 이것저것 많이 알수록 머리도 복잡하고 고민도 많아집니다. 결국 욕심 때문에 인간은 날이 갈수록 황폐해지고 불행해지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이 정말 행복해지기를 원하신다면 욕심을 줄여나가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누리고 있는 이것에 대해서 자족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저기 멀리 있는 저것에 눈독을 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욕심을 줄이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받은 복을 이웃과 나누어야 합니다. 베풀면 더 풍족해지고 나누면 점점 더 커집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이 욕심의 문제를 잘 다루어서 다 행복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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