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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의 믿음(7) (딤후 4: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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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믿음(7) (딤후 4:9-18)

  이번 주는 우리 민족의 고유명절인 추석을 맞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국으로 이동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도 이미 고향으로 떠난 분도 계시고, 오늘 예배와 내일, 고향을 찾아 이동하리라고 봅니다. 추석에는 온 가족이 함께 모입니다. 그래서 기쁘고, 또한 그래서 힘들기도 합니다. 오랜만에 모인 가족끼리 서로 정을 주고받으며 나누는 시간이 기쁜 시간이고, 평상시와는 다른 시간들을 오래 동안 갖기에 적잖이 힘들기도 합니다. 특히 여자들이 많이 힘듭니다. 명절에 밖에 나가 외식하기도 그렇고, 문을 여는 곳도 많지 않습니다. 식구는 많고, 먹는 것이 큰 기쁨의 시간이기에 당연히 부엌일을 하는 여자들이 힘듭니다. 여자 중에 아마도 며느리가 가장 힘듭니다. 일은 해야 하고, 시댁이라서 부담은 되고, 아무리 잘해주어도 마음도 편하지 않은 곳이어서, 며느리들이 명절을 지내다 보면 명절증후군으로 적잖이 병이 생기고, 가정에 어려움도 이때에 많이 발생합니다.

  최근 한 여성 포털 사이트에서 추석을 앞두고 여론을 조사한 것이 언론에 발표가 되었습니다. ‘며느리들이 시댁에서 가장 듣기 싫은 말이 뭘까요’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듣기 싫은 말 1위가 ‘더 있다가라’ 시댁에 머무는 시간이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거지요. 2위가 동서지간의 비교하는 말이었고, 3위가 음식 할 때 잔소리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시어머니로부터 가장 듣고 싶은 말 1위는 ‘준비하느라고 수고했다’는 위로의 말입니다. 2위는 ‘어서 친정에 가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명절이 즐겁고, 기쁘고, 좋은 시간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조심해야 할지를 잘 알려준 통계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이처럼 명절을 잘 보내기 위해 다짐하고 출발하는데, 우리는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나로 인해 명절이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위해 우리에게 명절에도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이번 주도 믿음으로 고향을 찾아갑니다. 믿음의 귀한 열매가 내가 가는 그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위해 믿음으로 살던 사람들의 믿음을 알고, 믿음의 무엇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오늘도 그런 관점에서 바울의 믿음을 찾으려고 합니다. 과연 바울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첫째, 사람들과 함께하는 믿음입니다. 본문은 지난주에 이어 바울이 기록한 마지막편지에, 마지막 부분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편지의 결론을 맺으면서 디모데에게 개인적인 부탁과 함께 지난날과 지금까지 자기와 함께 한 사람들을 죽 열거합니다. 그레스게, 디도, 누가, 마가, 두기고, 가보, 브리스가, 아굴라, 오네시보로, 에라스도, 드로비모, 으불로, 부데, 리노, 글라우디아 등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소개합니다. 여기 외에도 이 편지를 받는 디모데를 비롯하여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 평생 잊지 못할 동역자 바나바,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많은 형제와 자매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편지를 쓸 때마다 마지막에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기억하면서 감사와 문안을 잊지 않습니다. 그만큼 바울의 생애에 영향을 주고, 받고, 함께 울고 웃으면서 살던 사람들입니다. 늘 바울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던 사람들이고, 보기 만해도 듣기 만해도, 생각하기 만해도 든든하고, 힘이 생기고,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과 교제를 나누었던 사람들입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바울의 동역자요, 친구요, 멘토요, 사랑하는 성도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늘 이들과 함께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믿음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하는 믿음, 이것보다 소중한 믿음이 없습니다. 우리가 바울의 여러 사람들을 보면서 이런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함께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혼자 사는 것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늘 어울리고 함께 하는 삶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사람을 떠난 인생이 없는 것처럼, 사람을 떠난 신앙도 없고, 사람이 없는 교회도 없고, 사람이 없는 사역이나 봉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현대사회가 고립되어 갑니다. 시대의 타락이 하나님의 뜻이나 성경의 원리와 반대로 되어가는 현상이 마지막 때를 알려줍니다. 지금은 철저한 개인주의, 이기주의, 독립주의가 판을 칩니다. 아이들도 혼자 놀기를 좋아합니다. 인터넷, 컴퓨터, 게임을 다 혼자 합니다. 점점 고립되어가고, 사람을 기피하고, 멀리합니다. 이것이 현대사회의 비극입니다.

  함께 하는 것이 믿음이고, 서로 돌아보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혼자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모두에게 맡기고, 그곳에서 함께 하도록 우리를 믿음으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친구가 필요하고, 이웃이 있어야 하고, 어울리며 살아야 합니다. 내가 혼자라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우리는 잘못되고, 힘들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이것을 깨달아야 하고, 믿음으로 사람들과 사귀고 어울리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의 함께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주변에 늘 좋은 사람을 붙여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을 통해 확인됩니다. 하나님의 위로도 사람을 통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응답도 많은 부분에서 사람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주변에 늘 좋은 사람을 두어서 그들로 힘을 주게 합니다. 다윗을 보면서 이것을 더욱 깨닫습니다. 다윗의 일생에 많은 어려움과 고난의 고비 고비를 지날 때마다 다윗을 자기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고, 지켜주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평생 동지요, 친구들입니다. 다윗은 그들로 인하여 큰 힘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다루는 방법입니다. 주변에 늘 좋은 사람을 붙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위로와 격려와 힘을 얻으며 살게 합니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의 힘과 위로와 격려가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향해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함께 하는 사람들과 늘 힘이 되고, 격려가 있고, 위로와 사랑이 넘쳐야 합니다. 그것이 믿는 자의 가는 길이어야 합니다. 함께 하는 믿음으로 큰 힘을 얻으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치유되는 믿음입니다. 바울은 다른 성경의 마지막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특별한 사람을 여기에서 강조합니다. 바울은 평생 자기와 함께 한 사람들로 인해 위로와 힘을 얻으면서 여기까지 왔지만, 바울의 생애에 적잖이 상처를 준 사람들도 동시에 알려줍니다. 함께 하는 사람들로 기쁘고 즐겁기도 했지만, 또 가만히 보면 함께 한 사람들로 인해 상처와 아픔도 많이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아이러니한 인생입니다. 사람을 떠나지 않고, 사람과 함께 하면서 어울리고 더불어 즐겁고 좋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또 그 함께 하는 사람들로 인해 상처도 받고, 아픔도 경험하고, 싸우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상처받고 싸우는 사람들은 나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늘 함께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때론 바울의 대적이 되고, 상처를 주고, 바울에게 지울 수 없는 아픔을 준 것을 봅니다. 그런 것의 대표적인 사람을 여기에서 몇 사람 언급합니다. 우선, 데마입니다. 10절에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하면서 침통한 바울의 심경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데마는 옥중서신이 쓰일 무렵에 바울의 동역자로서 함께 일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시 옥에 들어가고, 이번에는 풀려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나 버린 사람입니다. 일종의 기회주의자, 배신자였습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있고, 좋고, 뭔가 얻을게 있다고 생각할 때 바울의 가장 가까운 곳에 접근하더니만, 이제 더 이상 자기에게 유익이 없다고 느끼자 바울을 헌신짝처럼 버린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런 데마를 생각하면서 안타까움을 말합니다.

  또한 14절에 언급하고 있는 알렉산더를 언급합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더 직설적인 표현을 씁니다. 알렉산더는 바울에게 많은 해를 끼친 사람입니다. 알렉산더는 여기만 아니라 다른 성경에서도 언급될 만큼 알려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바울의 대적이 된 사람입니다. 바울의 사역과 활동에 노골적인 제지를 가한 사람입니다. 바울의 사도권은 물론이고, 바울의 사상이나, 복음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주장한 사람입니다. 바울의 모든 가르침에 반기를 들면서 사람들을 바울에게서 멀어지게 했던 일종의 사단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사람입니다. 사람이 악하게 마음먹고 사람을 공격하면 정말 치사한 행동을 많이 합니다. 정정당당하지 못한, 야비하고, 비인격적인 행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알렉산더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적잖은 상처를 주던 사람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도 그를 주의하라고 권면합니다.

  이처럼 바울의 생애에 함께 했던 사람들 중에 힘과 위로를 얻은 사람도 많았지만, 상대적으로 상처와 아픔을 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울은 그 모든 상처와 아픔이 치유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더 이상 상대하지는 않았지만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갚을 것을 강조하면서 용서하는 것을 봅니다. 바울이 평생 사람들로 받은 상처와 아픔이 치유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증거가 있습니다. 본문 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치유된 사람의 치유의 고백입니다. 바울이 모든 상처에 대한 치유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주님의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속되는 17절, 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나를 건져내시고...” 이처럼 바울은 치유가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 위대한 사람이 됩니다. 바울도 우리처럼 상처와 아픔이 있었지만 주의 힘으로 치유되고 용서하며 마지막을 보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고, 우리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떠나 존재하지 않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들로 우리는 위로와 격려와 힘을 얻습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 우리는 많은 상처와 아픔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상처와 아픔이 있지만 주님의 힘으로 극복하고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해야 합니다. 혹이라도 아직도 사람들로 인해 받은 상처와 아픔으로 치유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주님의 힘으로, 능력의 믿음으로, 모두 다 치유되어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말씀을 끝까지 붙잡는 믿음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아주 유의하여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13절의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디모데가 빨리 오기를 원하는 마음을 전한 뒤에, 2가지의 부탁을 합니다. 하나는 올 때 드로아에 사는 가보라는 사람의 집에 있는 바울의 겉옷을 가지고 오라고 말합니다. 이제 점점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유난히 추위도 많이 타고, 몸도 약했던 바울이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두툼한 옷이 필요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하나의 부탁을 합니다. 그것은 가죽종이에 쓴 특별한 책을 가지고 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가죽종이에 쓴 책이란 곧 성경,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바울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마지막 죽는 그의 가는 길에 성경이 생각났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의 품에 늘 품고 있던 성경이 있었지만, 특별히 가죽종이에 쓴 소중한 성경을 다시 부탁합니다. 이것을 통해 그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말씀을 붙잡고 살던 바울입니다. 이제 마지막까지 말씀을 붙잡고 가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귀한 믿음입니다.

  말씀을 끝까지 붙잡는다는 것은 말씀에 기록된 대로 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바로 그런 마음으로 성경을 가까이 했습니다. 성경을 그냥 속에 품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말씀대로, 기록된 대로 행하고 살겠다는 다짐으로 붙잡은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끝까지 붙잡고 산다는 것은 우리의 무덤에 내가 읽던 성경책을 집어넣기 위함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산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대로, 명령하는 대로 그렇게 살기를 다짐하는 의미로 붙잡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은 그냥 종이에 불과합니다.

  많은 말씀가운데 우리가 해마다 이맘때면 끝까지 붙잡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계명의 제1, 2계명입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을 섬기지 말라”

  추석명절이 어떤 사람에게는 즐겁고 기쁜 명절이 되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정말 고통스러운 날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아직 예수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모르는 가족들과 함께 제사를 드리는 일에 참여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그 말할 수 없는 고민으로 예배에 참여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끝까지 붙잡는 것은 바로 이런 때를 위함입니다. 먼저 하늘의 위로와 평안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강하고 담대함을 잃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지켜온 것처럼 영적싸움에서 주도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지혜를 구하십시오. 아무리 좋은 일, 좋은 신앙, 좋은 말씀이라도 방법에 있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늘의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그때마다 필요한 지혜와 은혜를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끝까지 말씀을 붙잡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바울의 믿음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믿음, 치유되는 믿음, 그리고 말씀을 끝까지 붙잡는 믿음입니다. 이 귀한 믿음을 마음에 새기고 한 주간도 그리운 고향땅으로, 부모와 형제와 친지가 있는 곳으로, 삶의 현장으로 힘 있게 출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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