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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생활태도 (빌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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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생활태도 (빌 4:4-7)

오늘 우리가 상고할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세 가지 생활 태도에 관한 권면입니다. 사람은 그의 소속에 따라서 나름대로 정해진 생활 태도가 있는 법입니다. 예를 들면, 군인은 절도 있고 용감한 태도를 기본적으로 지녀야 합니다. 그것도 언제 어디서나 군인다운 태도를 가져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전장에서뿐 아니라 일상생활 가운데서도 군인다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인다운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교회에서나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어디서든지 변함없이 그리스도인의 생활태도를 보여줄 때 아름답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생활태도란 어떤 것일까요? 빌립보서 4장 4절로 7절 말씀에 근거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생활태도는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하기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서신을 쓸 당시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힌 죄수의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개인의 인권이 보장받던 시대가 아니었고, 더구나 감옥은 교도하는 곳이 아니라 범죄자들에게 형벌을 주는 곳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므로 옥에 갇힌 죄수들은 수족을 쇠사슬로 묶인 채 지내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곳이 감옥이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악행을 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아 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늙고 병든 사도가 감옥의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세한탄이 절로 나올 만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불편한 감옥에 갇힌 사도가 바깥세상에서 자유로이 지내는 신자들을 향하여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것도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면하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의 이 권면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일이 생기면 누가 권하지 않더라도 기뻐합니다. 예를 들면, 집안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가족은 물론이고 일가친척, 친구 모두가 기뻐합니다. 자녀가 상을 타오거나, 바라던 학교에 진학할 때도 기뻐합니다. 오랜만에 반가운 친지를 만나는 것도 기쁜 일입니다. 병원에 입원했다가 건강하게 퇴원할 때나, 취직 시험에 합격했을 때도 기뻐합니다. 특히, 결혼식에 가보면 신랑 신부처럼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들은 너무 기뻐서 온몸으로 그 기쁨을 발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헤아려 보면, 우리 생활 속에는 기뻐할 일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처럼 좋은 일들이 매일같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우리의 삶에는 좋지 않은 일도 생겨납니다. 걱정의 어두운 그늘이 우리 마음을 덮고 걱정 때문에 단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문제가 해결되기까지는 하루하루가 고단하고 힘듭니다. 이 같은 어려움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피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도 병에 걸릴 수 있고, 실직할 수도 있고, 시험에 떨어질 수도 있고, 가정불화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수로 항상 기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마음이 슬프고 우울한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사도가 우리더러 불가능한 것을 권면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권면은 사도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므로 진실합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서 말씀하기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이 사도에게 고통을 주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역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므로 그 같은 일들을 겪으면서 많은 고통을 당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도 온 몸이 터지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매를 맞으면서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신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사도의 마음속에서 기쁨을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마치 사도의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솟아나는 기쁨의 샘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가 어떤 극악한 환경과 형편 속에서도 마음속에 기쁨을 빼앗기지 않았던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주 안에서” 라는 이 짧은 구절이 그 비결입니다. 사도는 분명히 우리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주 안에서” 라는 표현은, “주와 함께” 또는 “주로 말미암아” 또는 “주를 인하여” 라는 말과 같습니다. 사도가 처한 현실을 보면 고통스럽고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주 안에 있는 사도의 영적 실상을 볼 때 기쁨이 넘쳤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사도는 말씀하기를 “17)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18)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산상수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말씀하시기를 “10)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고 하셨습니다. 욕을 먹고 핍박을 받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을 생각하니 고통 중에서도 마음에 기쁨이 넘쳤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오순절 성령 충만 받은 사도들이 예루살렘 거리에 나가서 힘 있게 복음을 전하고 또 사도들을 통해서 병든 자들이 낫는 표적이 나타나자, 수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이 노하여 사도들을 체포하여 공회에 세웠습니다. 또 그들은 사도들을 채찍질하며 앞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풀어주었습니다. 그 때 사도들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 받은 것을 기뻐하면서 공회를 떠났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도들은 복음을 위해 핍박을 받은 것이지만,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만나는 일들로 고통을 받는 것이므로 다르지 않느냐고 반문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조차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조건이 됨을 아시기 바랍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송명희 시인을 아실 것입니다. 송 시인은 나면서부터 뇌성마비로 몸을 움직이기조차 힘든 형편입니다. 그녀는 주 안에 거하기전에는 자기의 불행을 한탄하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게 되자, 그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은혜가 넘치는 신앙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송명희 시인이 쓴 시 가운데 “나” 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송 시인이 그 어려운 형편에서도 ‘공평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날이 갈수록 송명희 시인은 건강이 악화되어 지금은 거의 전신마비 상태에 가깝다고 합니다. 그러나 송 시인은 그 어려운 형편에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송명희 시인을 생각하노라면 고린도후서 1장 3절 이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3)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우리의 영적 위치를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주 안에 있는지, 아니면 주님 밖에 있는지를 말입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불평이 가득한 것은 내가 주 안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주님 밖에서 기쁨을 찾으려 하면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 안에서라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사도의 이 권면대로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생활태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대인관계에서 적용해야 할 생활태도에 관한 원칙으로서 여기 사용한 ‘관용’이라는 단어는 ‘관대’ ‘친절’ ‘온화’ ‘상냥함’ ‘고상함’ 등으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인들과 달리 관용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기보다 먼저 남을 대접해야 합니다(마 7:12). 대접을 하라고 하니까, 나는 남에게 식사를 자주 대접할 여유가 없는데 하고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식사 대접만 대접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 곧 대접하는 것이요 관용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관용의 태도를 가질 때 내가 먼저 마음이 기쁜 법입니다. 간혹 보면, 남에게 관용하고 관대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을 무슨 큰 손해라도 입는 것처럼 꺼리는 사람들이 있으나 실은 관용의 수혜자가 남이 아니라 바로 관용을 나타내는 그 사람 자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9)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라고 하셨습니다.

행복은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누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살고 남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행복을 담을 그릇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가정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부부가 서로에게 관용을 베풀면 됩니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에게 관용하면 됩니다. 가족이라고 함부로 대할 것이 아니라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대해야 합니다. 가정을 따뜻한 사랑의 보금자리로 만드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가족이 서로에게 관용을 나타내면 됩니다.

구역 식구들 간에 화목하기를 원하십니까? 서로에게 관용하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의 허물을 지적하기보다 장점을 들어서 칭찬해 주십시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관대하게 보아 넘기시기 바랍니다. 결함을 꼭 지적해 주어서 고쳐야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관대하고 온화하게 대하십시오. 그리할 때 상대방이 감화를 받고 자기도 관용을 나타낼 것입니다.

또한 관용은 배려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출입구를 나서면서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 것은 작은 일이지만 훌륭한 배려입니다. 버스를 탔을 때 노인이나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 역시 귀한 배려입니다. 배려는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할 때 가능합니다.

로마서 14장 1절에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믿은 지 오래되지 않은 신자는 성경의 내용 가운데 의심 가는 것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그의 입장이 되어서 관대하게 받아주어야 합니다. “그래요. 나도 처음 믿었을 때는 당신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점점 믿음이 자라니까 의심이 사라지고 믿어지더군요. 그러니 낙심하지 마시고 신앙생활에 힘쓰세요.” 그렇게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8장을 보면, 사도 당시에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로 일어난 문제를 다룹니다. 지식이 있는 신자는 말하기를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으므로 나는 우상의 제물이라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다”고 하면서 어린 신자가 보는 데서 우상의 제물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신자는 앞의 신자와 같은 지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그의 신앙양심에 거리끼지만 지식이 있는 신자가 먹으니까 따라서 먹습니다. 그 결과, 어린 신자는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었기 때문에 그 양심이 약해지고 더러워졌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지식을 가진 신자에게 이렇게 책망합니다. “8)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9)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지식을 가진 신자의 행동은 교리적으로 볼 때 잘못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어린 신자들에게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행위가 어린 신자에게 어떠한 악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지식을 자랑하는 신자에게 “그것은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를 멸망하게 한 것이니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도의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 8:13)고 했습니다. 한 어린 형제를 실족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는 이 관용의 마음을 우리는 배워서 실천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사도는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나타내야 하는 이유로서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주의 강림이 가까운 것을 안다면 이 땅의 것에 집착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강도 살인 사건이 자주 일어납니다. 단 돈 몇 만 원, 몇 십만 원을 빼앗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습니다. 왜 그런 사건이 생기는 것일까요? 주의 강림이 가까운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강림하시면 불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쌓아둘지라도 하나도 건지지 못하고 불에 다 타버리고 말 것입니다. 만일 이 사실을 안다면, 기왕에 불타버릴 재물 가지고 선한 일에 사용하려고 하겠지요.

운전을 하다보면 사람들이 너무나 양보를 할 줄 모릅니다. 양보는 고사하고 막무가내로 끼어들고 교통신호도 지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여유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무슨 관용을 기대하겠습니까? 그러나 주의 강림이 가까운 것을 아는 사람은 마음에 여유가 있으므로 매사에 너그럽게 양보합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하신 사도의 권면을 마음에 새기시고 언제나 관용을 나타내는 생활태도를 갖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생활태도는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모든 문제를 맡기는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합니다. 한국의 성자라고 불리는 장기려 박사님은 환자들이 아픔을 호소하면 ‘산 사람이 아픈 법이지요’라고 위로했다고 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아픔을 느끼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죽으면 아무 고통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걱정 근심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은 걱정 근심도 없습니다. 이 세상은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찬송가 474장의 가사처럼, 이 세상에는 근심된 일, 곤고한 일, 죄악 된 일, 죽을 일이 많고, 그래서 사람들은 참 평안과 쉼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옛날 중국 기(杞) 나라의 한 남자는 “하늘이 무너지면 어쩌나?” 하고 항상 염려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은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 사람으로 인해 기우(杞憂)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염려 근심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 기 나라 사람뿐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기 나라 사람과 오십보백보 차이밖에 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염려하는 데는 그만한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주님의 말씀과 같이, 우리가 염려한다고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는 없습니다(마 6:27). 우리가 염려하고 걱정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 뿐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문제를 만나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기도로써 아뢰어야 합니다. 그것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아직 응답을 받지 못했으나 미리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한다는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문제를 만나거든 걱정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천부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계실 뿐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님들의 생활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아십니다. 현재 성도님들께서 안고 있는 고민도,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과 걱정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모든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의 삶을 섭리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잠언 16:9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하심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엄마의 품에 안긴 아기에게 걱정 근심, 두려움이 있을 수 없듯이,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거하는 성도들 역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문제로 인하여 염려할 것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믿고 우리의 문제를 맡길 때는 그 문제가 잘 해결되리라고 백 퍼센트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란 완전하지 못하니까요. 그렇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의 짐을 내게 맡기라”고 하셨다면 사정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시며, 우리는 다 주님의 양들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때를 따라서 그 필요를 공급해 줍니다.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합니다. 이리나 사자와 같은 맹수가 양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눈을 부릅뜨고 지킵니다. 밤중에도 양의 우리의 입구를 가로질러 누워서 잠을 자면서 양이 우리 밖으로 나가거나 도적이 양을 훔쳐 가지 못하게 지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하셨습니다.

자기 생명까지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신 예수님께서 그를 믿고 따르는 성도님들의 삶을 책임져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신 예수님께 성도님들의 모든 무거운 짐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빌립보서 4:6-7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는 문제가 생겼을 때 염려하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부어 주십니다. 그리할 때 우리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확신이 생겨납니다.

현실을 바라보면 암담하고 희망이 없어 보일지라도 우리가 기도하면 믿음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아람 군대가 밤중에 엘리사가 거하는 도단 성을 포위했을 때, 사환 게하시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나갔다가 적군들이 성을 에워싼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하얗게 질려서 엘리사에게 말했습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그 때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른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가지면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여, 저에게 믿음을 더하셔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하여주옵소서” 라고 구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고귀한 특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언제라도 나아갈 수 있는 이 특권을 묻어두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3-14)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무엇을 자꾸 요구하면 미안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많이 구할수록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응답을 받아 누리면 누릴수록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 일을 힘써 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너무 많은 것을 구하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많이 구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을 번거롭게 해 드리는 일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열심히 기도하는데 왜 응답이 없는 것입니까?” 그렇게 생각되는 성도님들이 있으십니까? 기도하였거든 인내를 가지고 응답을 기다리십시오. 우리가 밥을 지을 때에도 밥이 익고 뜸이 들 때까지 기다립니다. 만약에 조급해서 자주 솥뚜껑을 열어 보게 되면 밥이 설익고 타 버리고 맙니다. 밥을 짓는 데 인내가 필요하듯이, 기도 응답을 받는 데도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한 가지 알아둘 점은 하나님께서는 가장 적합한 때에 응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무턱대고 빨리 응답되는 것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에 응답되는 것이 가장 좋은 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님들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와 간구로 모든 필요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님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생활태도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들에게 관용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셋째는, 삶의 모든 문제를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생활태도를 늘 실천하심으로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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