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추석] 주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요 6:66-69)

  • 잡초 잡초
  • 399
  • 0

첨부 1


주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요 6:66-69) 
 
추석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지만 많은 사람이 오고 또 갑니다. 시내거리에도 차량이 며칠 전부터 심히 붐볐습니다.
아마 이제 시내에는 차량이 거의 드물고 지방으로 오가는 도로가 더욱 막힐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그렇게 또 며칠 지나면 정상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반가운 사람들과의 만남, 특별히 삶이라는 것으로 인해서 자주 뵙지 못했던 부모님이나 형제자매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마음에 따스함을 주고는 합니다.
스스로의 못난 삶에 대하여 가슴 아플 수도 있지만 그래도 부모님은 우리 마음의 고향일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느낍니다.
명절이 왜 필요한가하고 명절 때마다 회의하게 되는 우리 자매들도 많이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명절은 다양한 삶의 모습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이번 추석을 맞이하면서 저는 우리 성도들이 만나고 오고가는 모든 행로위에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소원드립니다.
만나면 가슴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의 기쁨과 감사가 있고 오고 가는 대화 속에 따스함과 기대와 배려가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삶이라는 것은 때로 우리의 기대와는 달라서 사람과의 만남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고 따스함보다는 마음의 불편함과 시원치 못한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삶의 고개를 이제는 마음 넓음과 평안함으로 넘어 마음의 기쁨과 은혜로 누리시기를 간절히 소원 드립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에게 추석을 맞이해서 무엇인가 기쁜 일을 드릴까 생각하는데 목사로서 특별하게 드릴만한 기쁜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까 오늘은 특별히 설교를 5분 일찍 끝내겠습니다. 제가 오늘은 원고를 2장 덜 써왔습니다. 아마 2장 덜 쓰면 5분정도 일찍 끝날 것 같은데 뭐 드릴 것이 없으니까 설교라도 빨리 끝내는 게 그래도 좀 기쁘게 해 드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보았고, 능력의 떡을 먹었고, 곳곳마다 나타나는 예수님의 병 고침의 역사와 자연을 정복함과 귀신을 쫒는 역사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체험자이기도 하고 목격자이기도 하며 함께 있었던 동참자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능력이 아니라 기적을 행하는 기적과 능력과 권세자로서의 예수님을 환호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정치적인 왕을 원하였고 로마의 압제와 경제적인 복속 속에서 그들을 자유롭고 윤택하게 할 힘 있는 자를 원했던 것입니다.
주변의 부스러기 은혜라도 체험하고자 그것도 아니면 호기심으로라도 그들은 주님 앞에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님이 정작 그들에게 주시려고 했던 것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요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의 요청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해방의 전쟁과 계획을 원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아무런 설명을 안 하시고 전혀 다른 이야기만을 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자기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셨고 그것을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늘 본문은 진행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다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주변에서 다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주변에는 열두 명의 제자만 남았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 가운데 비감한 어조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나 제자들의 수장격인 베드로는 그의 신앙의 고백을 이루게 됩니다.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으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그는 영생의 말씀을 깨달았고 그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으니 우리는 아무데도 갈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주라는 것을 그는 고백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짧은 본문의 내용 속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며 오늘의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기대가 어긋나자 예수님의 곁을 떠나는 사람들. 그러나 영생의 말씀을 발견하매 예수님 곁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첫 번째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어긋나자 예수님을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에 대한 바른 믿음을 하지 못하면 우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믿음으로 승리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님의 곁을 떠나는 슬픔을 겪습니다.
예수님을 환호했던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손에 만져지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고, 마음으로 느껴지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눈앞에 보이는 현상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기적은 환호했지만 그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근본적인 동기와 의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기적을 통해서 그들에게 하늘나라를 가르쳐주시고 하늘나라가 제공하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의 실망도 압니다. 그들도 역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권세자로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의 나라가 임하면 자기들이 큰 한 자리를 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미리 주어지지도 않은 자리다툼까지 했던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는 것에 대하여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 삶에 모든 문제를 내가 원하는 순간 원하는 모습으로 해결해주지 않을 때 있습니다. 오히려 내게 주님이 원하는 모습으로 내가 있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믿음의 길에 들어섰을 때 우리가 어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믿음의 길을 시작했습니까? 마음이 외로워서, 의지할 곳 없어서, 쓸쓸해서, 내 마음의 어떤 어려움을 극복해 보고자 우리는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내가 주님 앞에 헌신해 보고자 함도 아니요, 내 마음에 어려움이 있고 삶에 어려움이 있어서 어려운 문제 해결해 보고자 주님 앞에 나온 것이 우리 마음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달라졌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에 믿음이 자라지 않으면 그 요구사항이 우리에게 짐이 될 것이고 믿음이 자랐다면 그 요구사항이 오히려 우리들에게 감사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 대한 받은 기대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왜 나를 부르셨을까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나를 부자 되게 만들어주기 위하여 부른 것도 아니고 삶이 곤고할 때 주님은 민망히 여겨 빵도 주시고 병도 고쳐주시고 귀신도 쫓아주시고 삶의 소원도 들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최종목표는 결국 주님나라의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하시고 싶어서입니다.
제자들의 삶을 보면 그러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기쁨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자의 큰 은혜를 주셨던 것입니다.
길게 바라보고 더 분명한 것을, 더 바른 것을 바라보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의 삶의 앞에 놓여져 있는 푯대는 영원히 이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푯대며, 그 푯대는 주님 앞에 갔을 때 비로소 마쳐지는 푯대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뒤에 한 일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끊임없이 이 세상에 숨 쉬는 한 달려가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영원한 면류관이 그에게 있기에 그는 면류관을 바라보고 확신하며 달려갔습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주 예수의 복음을 전함에는 그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만큼 분명한 삶의 가치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주님 곁에 끝까지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 마음에 실망이 될 때 그것이 과연 실망일까? 주님이 원하시는 은혜에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일까를 생각하면 우리의 삶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기위해 자신을 부인해야 하는데 그 부인의 과정이란 많은 경우 일이 너무 잘돼서 감사 감격하여 '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더 많은 경우 우리 삶의 한계와 바닥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삶의 아픔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귀한 기회임을 우리는 느낍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에는 실패가 없으십니다.
십자가의 사역은 주님의 최악의 실패가 아니라 최고의 승리였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힘없이 잡혀 처참한 모습으로 죽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인생의 모든 죄악을 용서해주기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에 잡혀 죽으심으로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이루신 최고의 승리였던 것입니다.

삶에 중요한 것은 상황과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하느냐? 입니다.
내 삶을 실패로 볼 것인가, 아니면 승리로 볼 것인가?
해석과 평가에 따라 우리는 승리자가 되기도 하고 실패자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 인생은 한없이 따사로울 수도 있고 한 없이 서늘해질 수도 있습니다.
앞면에서 보면 눈, 코, 입 다 있습니다. 뒷면에서 보면 머리카락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뭘 보고 판단하시겠습니까?
얼굴을 보고 판단하시겠습니까? 마음을 보고 판단하시겠습니까? 그의 손과 발을 보고 판단하시겠습니까?
우리 삶의 다양한 국면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고 해석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인가를 우리는 새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삶에 실망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합니까?
요셉은 난감함과 억울함과 답답함 속에서도 끝까지 주님을 기대했습니다.
요셉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늘 함께했다는 기사가 따르고 있습니다.
그는 최악의 경우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느끼고 있었고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 잠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몇 년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요셉의 고난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 가운데 그는 그와 같은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속히 오르는 길에 접어들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어렸을 적부터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겼는데 그가 정성을 다해서 섬긴 결과 그에게 마지막으로 다가온 것은 큰 시험이었습니다.
왕에게 절하지 않으면, 다른 신을 섬기면, 사자 굴에 던져야 되는데 그것은 다니엘 하나를 잡기 위한 계책이었고 그것을 알고 있는 다니엘은 그것을 피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 앞에 경배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사자 굴에 던져졌고, 던져졌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음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일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최악의 상황이 최고의 영광의 순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최악의 어려운 상황을 최고의 은혜의 순간으로 만들었던 것은 이와 같은 다니엘이나 요셉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내게 있어서 가장 실망한 상황을 어떻게 가장 최고의 은혜의 상황으로 만드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승부여부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을 생각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라는 최악의 상황을 최고의 상황으로 만드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십자가만 봐도 가슴이 설레고 교회 예배당을 봐도 다 십자가를 하나씩 붙여놓고 그 십자가만 봐도 왜 이렇게 마음이 설레고 마음이 감동이 되는지 몰라요. 그런데 십자가의 원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죽이는 기계예요.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 죽이는 혐오스러운 기계가 우리들에게 이와 같이 아름다운 구원의 상징으로 되어졌을까를 생각합니다. 주님이 이러셨다면 우리는 어떠한 최악의 상황으로도, 어떠한 최악의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최고의 모습을 이룰 수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이 불행해 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최고의 기쁨의 상황으로 반전시킬 수 있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지금 내 상황이 최고의 고통이 밀려왔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이것을 주님의 은혜의 기회로 여기고 최고의 상황으로 만들어야 된다는 각오와 의지로 극복과 기쁨을 느껴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쉬운 말로 욕하고 저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누추한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더 평생 주님을 위해서 그의 삶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할 때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내려갈 수 없는 상황에서 다시 반등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헌신하는 기회를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내 삶이 실망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실망들이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삶을 세우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은 예수님께 대하여 실망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들이 실망하게 된 근거는 예수님에 대한 그릇된 기대를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님에 대하여 어떤 기대를 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을 이루기 원합니까?
아니면 내 뜻을 주님을 통하여 이루고 성취하시길 원합니까?
초보의 신앙을 지나 이제는 내가 어떻게 주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 있는가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우리 가슴을 채울 수 있을 때 우리는 주님 곁에 끝까지 남아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두 번째 내용을 보니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비감한 어조로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 시간도 질문하실 겁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실망시키거나 주님의 은혜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있을 때 "너희도 가려느냐" 라고 우리에게 물으실 겁니다.
우리가 우리 자리에서 비켜설 때, 우리 자신과 삶에 대하여 실망할 때, 삶의 실망이 주를 바라보는 기회가 되어야지 우리 인간의 뜻을 따르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가고자 하는 목표에서 벗어날 때 수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나 그것은 극복의 과정이지 우리가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도피는 해결의 수단이 되지 못합니다. 주를 믿는 사람으로서의 신의와 신뢰를 버릴 때 사람과의 약속도 지키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면 그것은 앞뒤가 맞지 않지 않습니까?
주님의 사역과 사명과 내게 맡겨진 일에 대하여 힘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말 누추한 삶의 모습을 보일뿐입니다.

엘리야는 이사벨에게 쫓겼습니다.
갈멜산의 대 승리를 이룬 엘리야인데 이사벨이 그에게 목숨을 구한다는 이 한 마디 위협 때문에 마음이 위축되었습니다.
사람이 언제 약해지지요?
마음에 두려움이 생길 때 약해지는 겁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면 사람이 위축되고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집니다. 그는 도망치지만 그것도 지쳐서 로뎀 나무 밑을 찾아서 "하나님 내가 너무 지치니 정말 나 어쩔 수 없으니 차라리 하나님이 나를 거두어가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물과 떡을 주셔서 힘을 돋고 광야로 가시게 하셨습니다. 그에게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시키는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그것으로 엘리야의 공적 삶은 끝났던 것입니다. 더 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그의 삶은 그것으로 마쳐진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 힘을 잃을 것이 아니라 그때는 힘을 간구해야 합니다.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이러저러한 일을 좀 하시죠." 그러면 "내가 이런 상황이 되고 이런 상황이 돼서 못합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신다면 그러면 안 됩니다.
어려운 상황이 있어서 이러이러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런 상황, 이런 상황이 있는데 이것이 해결되면 하겠습니다." 하고 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간구해야 합니다. 왜 어려움 때문에 못한다고 합니까? 그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해야지.

왜 우리는 주님의 곁을 떠나려고 합니까? 오히려 어려운 문제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극복하고 해결해서 주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차선의 목표를 세우려고 합니다.
선한 꿈은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안 된다고 포기하고 어렵다고 뒤로 물러서는 것입니다. 감사한 일이 있다면 이전에 가졌던 소망이 지워지지 않고 새로운 소망으로 승화되고 새로운 은혜로 한 계단 한 계단 쌓아져 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망상이 아니라 어떤 일을 이루고 그 위에 더하여 날마다 새로운 계단을 쌓으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주님을 쫒는다고 하지만 과연 내 소원이 이루어지고 내가 기쁠 수 있어서 쫒는 것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이 상황을 넘어서서 그것을 능가하는 기쁨이 있어서 쫒는가에 대한 분명한 답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모든 진위여부는 시련의 풀무를 거쳐봐야 합니다. 좋을 때 누가 잘 못하겠습니까?
기대와 기쁨이 사라져버린 황망한 지경에도 우리는 주님을 따를 수 있고 주님의 은혜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살다보면 사랑의 기쁨이 사라지고 사랑의 의무만 남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도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척박한 삶의 지경에도 우리는 고비 고비를 넘어 사랑을 꽃피울 수 있듯이 우리 삶의 모든 모퉁이마다 다양한 인생의 굽이굽이를 건너 주님의 은혜의 낙원에 이르러야 합니다.
왜 사람이 사랑의 기쁨이 없고 의무만 남아도 그래도 사랑해야 되느냐?

여러분, 산에 가면 나무의 등골을 베어놓은 데가 있습니다. 바닥까지 다 잘라놨어요. 그러면 그 나무 죽을까요? 안 그런 것 같던데요. 그 밑동만 남기고 잘라도 그 옆에서 또 새로운 순이 납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얇은 순들이 또 시간이 지나면 굵은 순들이 되고 결국 나무의 등골이 되겠지요. 다시 자라는 겁니다. 뿌리가 지나면 또다시 자라나는 겁니다.

여러분, 사람이 좋아요. 마음이 바뀌어서 싫어졌어요. 논리적으로 생각해도 어떻게 되나요?
좋았다가 싫어졌으면 싫었다가 또 좋아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감정보다는 이성과 논리를 더 중요시해야 됩니다. 논리와 이성을 더 중요시해야 돼요.
그리고 논리와 이성보다는 주님의 뜻을 더 중요시해야 합니다. 믿음을 더 중요시해야 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 변하면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속에 또 다른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고 우리의 처음 먹은 마음을 이루어가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참을만하면 누가 못 참겠습니까? 나는 도저히 못 참겠어.
아니 참을만하면 누가 못 참겠어요. 도저히 못 참는 것을 참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한계의 때에도 불구하고 다만 신적인 부름과 은혜 때문에 주님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것 그것이 우리일 때 우리는 고비를 넘어서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으면 누가 인내하지 못하겠습니까? 모든 소망이 없어요. 소망조차 없을 때 그래도 우리는 주님자체가 소망이 돼야 합니다. 어떤 소망이 보여서가 아니라 주님이 소망이니 언제나 내 마음에 해석될 수 있는 '소망과 기대를 주시겠지!' 하는 기대가 우리 마음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기대도 없고 아무런 소망도 없어요. 그때 언젠가 내 마음에 소망을 주시겠지 하는 것이 소망이면 됩니다.
마음에 실망이나 이것이 아니라고 생각이 되는 순간 그럼 내가 이제껏 내가 선택하는 일은 누가 주관하셨는가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이 자기를 신뢰하지 못합니다. 여러 번 거듭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믿으세요. 여러분 자신을 신뢰하세요. 여러분이 신중하게 기도하고 결정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확신을 가지세요.
왜냐구요?
우리는 부패한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섭리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난번에 그렇게 기도했다면, 내가 그때 이렇게 결정했다면, 내가 이렇게 약속했다면 그것을 믿으세요. 내가 하나님께 이렇게 소원을 가졌다면 여러분 자신을 믿으세요. 아무리 내가 누추한 사람이라도 우리 자신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심을 우리는 기대해야 합니다.

왜 이제까지 기도시키셨을까?
왜 이제까지 일을 하게 하셨을까?
왜 나를 이제까지 이런 은혜를 주셨을까?

여러분 정 안되면 이렇게 생각하세요.
이제까지 이런 삶을 인도하신 것이 누구인가? 하나님인가 사탄인가?
그 생각만 하세요.
이제까지 내가 이렇게 결정하고 내가 이렇게 믿고 이렇게 약속하고 이렇게 지켜왔던 모든 삶이 사단이 나를 미혹하게 해서 이렇게 결정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이제까지 인도하신 것인가 생각하면 우리 삶에 대해서 하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존중해야지요.
이제까지도 인도하셨다면 지금 잠시 잠깐 어려워도 결국은 인도하시겠지. 의외로 너무 많은 경우 능력이 모자라서 어떤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견고하지 못해서 어떤 일을 이루지 못함을 봅니다.
무능 때문에 그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무능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일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다시 진보하여 결국 이루는 힘이 부족해서 우리 삶에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삶에서 끝까지 유지하는 이가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과정은 다 있습니다.

저는 젊어서 어리석은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젊지요.
목회라는 것이 제게는 너무너무 부담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신학교 들어가서도 결정하기 까지 참 많은 방황의 시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정한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워도 할 수 없다. 나는 그래도 후회하지 않겠다. 어차피 내가 피할 수도 없고 이 길을 가야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워도 할 수 없다. 그러다 보면 또다시 일어나겠지. 어려운 때가 영원하겠는가?
제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순간만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쉽게 느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마음먹고 보니 그냥 여태까지 가고 또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지' 하는 마음만 있었다면 열두 번도 그만 뒀겠지요.

삶이란 무능하고 지루한 때를 넘길 수 있어야 합니다.
수많은 바람 불어 비바람 불어쳐도 그 바람 맞으며 결국 그 자리에 있는 때를 거쳐서 우리 삶은 가고 또 가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어려운 일 많이 겪으셨겠지만 앞으로 또 어려움이 또 있을 겁니다.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우리를 강하게 해 주는 게 아닙니다.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우리를 강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이 있겠지만 지금까지도 지내고 계셨다면 '앞으로 있을 어려움에 대해서도 주님께서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주실 것이다.' 하는 것을 믿고 확신할 때 우리는 강해질 수 있는 겁니다. 어려움 없어서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 있어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이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 곁에 있어드리는 것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 삶의 일들은 주님을 위해서라고 하며 실제로는 주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일들을 할 때가 많습니다. 내 주장을 포기할 때 우리는 주님 곁에 있어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믿음의 길을 포기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우리는 정당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빌라도는 손을 씻으며 "나는 죄없다." 하며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주었습니다.
나는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고 하고는 자신의 길을 갑니다.
내 주장을 포기할 때입니다.
"주님이 어디로 이끌던지 나는 가겠습니다."하고 믿는 경우입니다.
많은 경우, 너무 믿음 없는 일들을 믿음이라고 이름하고 합니다.
아직도 내 뜻과 내 주장이 있고 그것을 주의 뜻이라고 얘기합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합니다. 어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오늘 딴 얘기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리석어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듣고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 주님의 곁을 떠나면서도 주님의 새로운 뜻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어제 내게 이런 마음 주셨다면 주님은 오늘 또 어떤 은혜를 주시는가?
우리는 기대하며 우리의 일을 지속해야 합니다.
수많은 고비 때마다 착한 일을 시작하신이가 그리스도예수의 날까지 이루심을 우리는 믿고 주님 앞에 정한 일을 끝까지 이루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능력 많고 똑똑한 사람이 어떤 일작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 지키고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결국 그 일을 이루게 됩니다. 일은 똑똑한 사람이 하지만 그 일을 완결하여 이루는 사람은 견고한 마음을 가진 이가 하는 것을 봅니다.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나는 과정 없이 어찌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실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주님 곁에 있는 것이 결국 주님 곁에 있을 사람의 모습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어떤 변화가 있어도 주님 곁에서 내게 주신 사명의 자리를 지키고 아름답게 있는 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 드립니다.


마지막 한 가지 더 생각해 봅니다.
영생의 말씀을 발견했기에 떠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생활 속의 피로를 해결하거나 예상을 넘어서는 기적을 체험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과 생명의 영원한 해결을 주시는 영생의 말씀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보았던 많은 사람들도 마음이 변하여 주님을 떠났습니다. 기적을 체험했던 제자들도 예수님의 눈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후에 다음에 그 자리로 내려가기도 했습니다.

날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를 발견하고 말씀의 새로운 은혜를 깨달아야만 합니다. 내 삶에 대한 분명한 명분과 이제까지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와 앞으로도 있을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해야 합니다. 내게 실망을 주셨다면 어떤 새 은혜를 주실 것인가?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를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늘 새 은혜를 받고 사모되는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성도가 진리의 말씀으로 은혜를 느끼지 못하면 한없는 고통 속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흔들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진리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없어서입니다. 상황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은혜가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가지고 영적인 일에 주력해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내 길과 내 거름의 빛과 등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인간의 소리가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예전에 젊었을 때 군대에서 제대할 때가 되었습니다. 군대에서 3년 동안 세 번 휴가를 가는데 맨 마지막 휴가는 보통 제대하기 한 달 전이나 일주일쯤 오게 됩니다. 제가 금식기도원에 갔습니다. 목표는 한 가지.
‘하나님 저는 앞으로 목회를 안 할 텐데 하나님께서 꼭 허락을 해 주십시오. 확답을 듣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금식기도원에 갔는데 금식기도 이런 책들을 보면 대부분 마지막 날에 응답이 온다고 다 써 있더라고요.

여러분 그런 책 보셨죠?
'대부분 마지막 날 응답이 왔다' 이런 것 많이 씌어 있더라고요. 정말 금식기도를 열흘인가 보름인가 휴가 기간 동안에 첫날 가서 마지막 날에 나왔는데 정말 응답이 없는 것 같았는데 그래도 마지막 날에 온다니까 기다려보자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정말 아주 똑똑하게 음성으로 들리는 것 같더라고요. 뭐라고 들렸냐면 이렇게 들리더라고요.
“너는 목회 안 해도 된다.” 이렇게 들리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더 확신이 드는 게 뭐냐 하면 그러면서 성구가 번개같이 딱 떠오르더라고요.

그게 뭐냐 하면 <요한 일서 5장 4절>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저는 그 말씀을 듣고 너무나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래. 나는 세상에 나가서 살면 돼.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면 돼.
저는 성경말씀으로 확답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복귀를 해야 돼서 이제 거기서 계획된 기도를 마치고 왔는데 저는 금식기도를 그렇게 오랫동안 했는데 하나도 안 피곤했습니다. 너무너무 즐거웠습니다. 내 인생의 살길이 열린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믿었는데 하나님의 응답이었나요? 마음의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의 계획과 욕심을 가지고 혹은 마음에 바램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 무슨 뜻인가 하고 물어보면 거의가 마음의 욕심입니다.

어떤 형제가 사모하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물어보세요.
"하나님, 내가 저 자매와 결혼하고 싶은데 저 자매가 나의 배우자로 맞습니까, 틀립니까? 하나님 말씀해 주시면 말씀에 따라서 제가 결정하겠습니다."
그러면 “다 해라” 그렇게 말합니다.
자기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는데 대부분 그렇게 들립니다. 객관적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욕심과 마음의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다보면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양 우리 마음속에 생각이 듭니다.

제가 사람들을 사귀는데 기본적으로 가지는 개념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천천히 사귀자는 것입니다.
빨리 사귄 사람은 빨리 헤어집니다.
천천히 사귀자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는 과정도 그러한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우리에게 차근차근 쌓여가면서 우리의 삶의 은혜가운데 한걸음 한 걸음 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 같습니다.
번개처럼 번뜩이는 뜻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실 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나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되 그것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확정되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수없는 뒤집힘과 수없는 반복의 과정을 통해서 마침내 우리의 생활 속에 뚜렷이 보이는 하나님의 거대한 산맥을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발견하게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삶의 상황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로 인하여 우리의 삶을 유지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 현실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의 은혜의 뜻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기쁨이 있는데 나를 바라보면 늘 실망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인간의 부정에서 시작 돼 우리는 참된 인생을 깨닫고 주님으로 비롯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주를 바라보고 기대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오늘 또 한 번 해 드릴게요.

여러분, 고향에 가면 동네 어귀에 큰 나무들 하나쯤 있을 겁니다. 큰 나무는 재주 있어서 큰 나무가 된 것 아니라고 말씀드렸지요.
수종이 좋아서? 재주가 있어서? 능력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닙니다.
그냥 그 자리에 무기력하게 오래오래 있어서 큰 나무가 된 것입니다.
아무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 오래 있었더니 큰 나무가 된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곁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일관된 원칙을 가지고 나가는 이들, 수시로 상황 따라 마음 따라 하나님 뜻이라고 바꾸지 않고 일관된 원칙을 가지고 끝까지 진행하는 이들, 생각이 떠나면 생각이 달라지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달라져도 약속과 신의와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며 자리를 지킨 이들, 이러저러한 면모를 보면서 인생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기위해서 오셨고 상황이 흔들리지 않고 힘겨웠지만 지셨고 한길을 가서 목표를 이루셨습니다.
우리 삶도 그러해야 합니다.

삶의 수많은 풍상이 있을 겁니다.
삶에 수많은 변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으매 뉘게로 가오리까' 하는 고백이 우리 가슴속에 있을 때 우리는 주님 곁을 지켜드릴 수 있는 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에 의해서 세워주고 주님 곁에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