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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빼앗길 수 없는 기쁨 (행 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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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길 수 없는 기쁨 (행 8:4-8)

지난 한 주간 여러분, 참 바쁘셨죠, 명절을 맞아 고향을 다녀 온 분도 계시고, 또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들을 연후 기간 동안 보람되게 사용하신 분들도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요즈음 마음에 큰 기쁨이 있습니다. 그 기쁨은 풍부의 법칙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는 기쁨입니다. 여러분이 풍부해지고, 여러분이 잘 되는 것이 저의 기쁨입니다. 저 역시 이번 추석 3일 동안 동대문 일대에 있는 쪽방 650여 세대에 살고 있는 노숙자들을 위해 복음을 증거 한 것은 제가 목회를 하면서 잊을 수 없는 큰 보람이었고, 또 큰 기쁨이었습니다. 특히 그 바쁜 가운데서도 우리 교회 안내 팀들과 샤론 합창단, 그리고 추석 당일 날은 우리 교회 장로님들 전원이 다 오셔서 특송을 부른 것은 부족한 저에게는 말할 수 없는 감동이었고, 쪽방 교회에 나오는 분들에게도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제가 첫째 날 설교는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는 제목인데, 이것을 놓고 일 주일을 고민했습니다. 사실 이 땅에 가장 밑바닥을 살아가는 분들에게 이 제목이 큰 거부감을 일으키지는 않나하는 걱정 아닌, 걱정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집회를 하면서 느낀 것은 그것이 한낱 기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축복된 접촉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신약성경을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의 능력과 접촉되는 순간, 병든 자는 건강으로 풍성해 졌고, 예수님의 사랑과 접촉되는 순간, 사랑에 목마른 자는 넘치는 사랑으로 풍성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소망과 접촉되는 순간, 절망 중에 있는 자는 소망으로 풍성해 졌고. 예수님의 믿음과 접촉되는 순간, 약한 믿음을 가진 자는 강한 믿음으로 풍성해 졌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의 풍부를 우리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복음을 통해 영원히 풍부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풍부의 법칙을 가르쳐 주시길 원하십니다. 풍부의 법칙을 가르치는 일은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일과 같습니다. 탈무드는 "고기 한 마리를 주면 하루를 살 수 있지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면 평생을 살 수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당신이 상대방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선한 일은 그저 자신의 부를 나눠 주는 게 아니라 혼자 힘으로 부를 획득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남의 도움을 받아 사는 것은 한계가 있잖아요.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풍부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란 말씀이 나옵니다. 그 성이란 바로 사마리아를 이야기합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런 기쁨이 넘쳤습니까? 여러분, 사마리아라는 곳이 어떤 곳인 줄 아십니까? 8절에 보면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란 말씀이 나옵니다. 그 성이란 바로 사마리아를 이야기합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런 기쁨이 넘쳤습니까? 여러분, 사마리아라는 곳이 어떤 곳인 줄 아십니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우 교만하여 사마리아 땅은 지나다니지도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이방인으로 취급했고,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으로 치부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마치 더러운 짐승을 대하듯 했고 상종하기를 꺼렸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자면 사마리아를 통과하면 가까운 길인데도 더러운 길이니 밟지 않겠다 하여 멀리 돌아서 다닐 만큼 저주의 땅입니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이 무슨 소망이 있겠고,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이곳에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큰 기쁨'이라는 말은 1절의 큰 '핍박'과 2절의 '크게 울더라' 즉 큰 슬픔과 대조를 이루는 말이 아닙니까? 예루살렘 성도들은 큰 핍박과 큰 슬픔 속에서 흩어지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큰 핍박과 큰 슬픔이 오히려 사마리아 성에 '큰 기쁨'을 가져다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성은 따돌림당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복음이 들어가니까 온 성이 기쁨이 넘친 것입니다. 여기 '큰'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원문은 megas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백만 배를 뜻하는 영어 단어 mega가 바로 이 단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메가톤 급 기쁨이 이 땅을 덮은 것입니다.

이처럼 절망의 도시를 기쁨으로 바꾼 그것은 바로 빌립이 전한 복음입니다. 5절에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여러분도 아시지만, 빌립은 초대 교회의 일곱 집사 가운데 한사람입니다. 당시 7집사는 한 마디로 '비전과 열정'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 가운데 스테반은 순교하였고, 지금 빌립은 흩어진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세상은 저들을 흩어놓았지만, 그들 가슴속에 있는 비전과 열정은 흩어놓지를 못했습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마치 물이 끓어야 밥이 되듯이 자신이 손대는 일에 물이 끓는 열정을 갖지 못하면 그 일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도 내가 미쳤다 하는 느낌이 들만큼 열정을 갖지 못하면 어떤 일이든 되는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핍박 속에 흩어진 자 가운데 빌립은 세상 적으로 보면 그는 모든 것을 잃은 자입니다. 세상은 그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갔습니다. 이 정도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기르는 새 중에 '새크레터리 버드'라는 번역하면 비서 새라고 하는 새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새는 평소에 잘 날아다니지만 정말 이 새가 날아야 될 때는 기가 죽어서 날지 못하고 땅 바닥에 앉아서 기어다니다가 잡혀 먹힌다고 합니다. 그러나 빌립은 잿더미처럼 모든 것을 잃은 자리에서 낙심도, 방황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의 심령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립은 신앙의 뿌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궁지에 몰리자 즉시 하나님 편으로 얼굴을 돌렸습니다.

우리가 경험으로 잘 아는 사실입니다. 본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여러 문제로 인해 흔들려도 결국 하나님을 붙잡습니다. 별 도리가 없잖아요. 세상 사람은 급하면 지푸라기를 잡는다하지만, 우리는 지푸라기를 잡지 않아요. 나의 구원자이신 주님을 붙잡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내 삶에 모든 것임을 알고 고난의 한 복판에서 복음을 증거 한 것입니다. 어느 책의 제목처럼 "땀은 흘러도 기쁨은 샘물처럼" 그 심령 속에 견딜 수 없는 주님의 생수가 흘러 넘쳤기에 그 고난의 자리에서도 담대히 세상을 향해 복음을 들고 나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계란에 대해서 아십니까? 계란 중에는 무정란과 유정란이 있는데 무정란은 아무리 오랫동안 어미 닭이 품어도, 병아리가 나오지 않지만 유정란은 어미 닭이 21일간 품으면, 반드시 병아리가 생명 되어 나옵니다. 성도들도, 무정란 같은 성도가 있고 유정란 같은 성도가 있게 마련인데 무정란 같은 성도들은 예수로 인하여 고난이 덮치고, 손해가 나고, 풍랑이 일어나면, 그냥 도망가거나, 무너지거나, 썩어 사라집니다. 그러나 유정란 같은 성도들은 고난이 올수록, 풍랑이 셀수록, 더욱 더 주님 품에 파고들어 마침내 생명을 출산하게 됩니다.

생명의 힘은, 실로 위대하고 신기합니다. 하수구에서 작은 생명의 씨앗이 날아와 싹을 트는 것을 보았습니까? 집채만한 바위 밑에 눌려서도, 생명의 싹이 거침없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한서리가 내리는 겨울 산꼭대기에서도, 소나무가 사철나무 되어 올곧게 그리고 싱싱하게 살아 숨쉬는 것을 보았습니까? 목장 심방 때 말씀 카드에 에델바이스를 넣어서 드렸습니다. 이 에델바이스는 아무데서나 자라지 않습니다. 추운 고산지대에서 혹독한 겨울을 나고 봄기운이 일어 날 때 피는 생명력을 지닌 아름다운 꽃입니다. 꽃말도 변하지 않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그토록 몸 찢고 피 흘려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은, 관습이나 전통이 아니라 풍성한 생명이었습니다. 그 '예수 생명'을 풍성하게 소유하면, 세상도 우리를 감당치 못하며 허리가 꺾이고, 형벌 같은 고난이 겹겹이 둘러 에워싼다 하여도 우리의 신앙을, 싱싱하고 신선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소유한 믿음이란, '얼마나 안 넘어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빠르게 다시 일어나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로이 로버트슨이라는 미 해군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1941년 12월 6일 하와이 진주만에 정박한 함정 ‘웨스트버지니아’ 호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 배와 다른 여러 종류의 배는 360대의 일본 비행기에 의해서 무참히 파괴되었습니다. 일본군 비행기가 날아올 때, 로버트슨은 재빨리 기관포가 있는 쪽으로 갔습니다. 기관포를 들고, 저들이 기총 소사와 포탄을 가지고 옆에 있는 형제들을 죽이는 현장에서, 공포탄 밖에 없는 기관포를 잡고 절규합니다. "따따따따..." 자기 입으로 소리를 냅니다. 소리를 내는데도 지나가는 비행기를 격추시키지 못하고, 격추하지 못했기 때문에 또 다시 죽어야 되는 형제들을 바라보며 울분을 터뜨립니다. 빈 실탄, 공포탄을 가지고 쏘아야하는 자기의 신세를 분명히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연습용 탄환만을 가지고 15분간 그는 처참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 후 어느 날 그는 성경공부 그룹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10명쯤 둘러앉았는데, 인도자가 성경 한 구절씩 서로 돌아가면서 외우도록 하였습니다. 로버트슨 병사가 암송할 수 있는 성경 구절은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슬아슬하게도 자기 앞에 사람이 외워버렸습니다. 자신의 차례가 왔을 때 외울 말씀이 없어, 할 수 없이 같은 구절을 암송하고 화끈거리는 얼굴로 성경 공부를 마쳤습니다. 그 날 밤 교회에 혼자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신의 친구들이 죽어 가던 그 현장, 실탄 없이 공포탄으로 비행기를 맞서서 싸우던 처참한 모습. 그리고 또 다시 복음의 핵심과 본질을 보지 못하고, 그 말씀이 자신의 삶 속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모르고 습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독백합니다. "나는 가짜야. 나는 빈 깡통이야. 나는 가짜야" 그리고 하나님 앞에 다시 기도합니다. ‘하나님! 그 동안 건성으로 들었던 복음, 오늘 죽어 가는 많은 사람들 속에 하나님 복음이 왜 생명이 되고, 어떻게 구원 얻는지 진정으로,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알기를 원합니다. 실탄을 가지고 총을 쏠 수 있는 병사처럼, 복음의 본질을 붙들고 복음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말씀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는 빌리 그레함 전도단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훗날, '트로트 맨'이라는 사람과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한 “네비게이토”라는 선교 단체를 만들게 됩니다. 많은 선교 단체가 있지만, 네비게이토의 훈련 방법은 독특합니다. 복음의 핵심과 구원의 확신에 대한 부분은 어느 성경 공부도 따라 올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훈련시키는 단체가 되었습니다.

지금 고난의 한 복판에서도 피를 토하듯 증거 한 빌립의 사역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여기 6-7절을 보세요.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두 가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첫째는 귀신이 떠났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고침 받는 치유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기 7절을 다시 보세요.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붙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붙었다, 떨어졌다' 한다는 말이 아니라 'possessed, 억눌림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귀신은 영적인 것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여러분에게도 딱 붙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게 들어와 있으면 기도가 안 되고 기도가 자꾸 샙니다. 5분을 기도하지 못합니다. 어둠의 세력이 내 영혼을 덮어 버리는 것입니다. 마치 마비된 현상과 같습니다. 찬송을 불러도 기쁨이 없고 감동이 없습니다. 귀신들이 나를 억압하고 있으면 찬양도 안됩니다. 설교를 들으면 자꾸 졸게 됩니다. 머리가 아픕니다. 답답하고, 괜히 사람이 밉고, 자기도 모르게 자꾸 화가 납니다. 이게 다 억압이 돼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순식간에 자기도 모르게 이 쇠사슬이 다 끊어져 버립니다.

램지 맥뮬랜(Ramsay MacMullan) 박사라는 예일대 역사학 교수가 있습니다. 로마 제국을 연구한 가장 권위있는 교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알다시피 로마 제국은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잡다한 신들과 신화에 겁을 먹고는 날마다 제사를 지내는 나라였습니다. 이런 나라가 어떻게 300년 사이에 기독교 나라로 바뀌었을까? 어떻게 300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그 시골스런 몇 사람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그 큰 제국이 무릎을 꿇게 되었을까요? 이것이 맥뮬런 박사에게는 굉장히 관심거리였습니다. 그래서 그 300년 기간 동안에 어떻게 해서 복음이 전 세계에 확산되었는지를 연구해서 책을 1권 냈습니다.

그 책에 의하면, 그 당시 기독교가 로마 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여러 이유 중 가장 두드러진 이유는 귀신을 쫓아내는데 탁월했다는 점입니다. 표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전도자들이 귀신들린 사람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 하자 귀신이 깨끗하게 물러가서 새사람이 되고, 예수를 믿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또 어떤 신전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한마디 전하자 그 신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수라장이 되어 버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이기는 능력과 표적이 계속 나타나자, 나중에는 로마 제국을 흔들어 놓는 큰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복음을 가진 자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주위 사람을 얽어매는 것이 아니라 해방시켜 줍니다. 죄에서 그 영혼을 해방시켜 주시고, 마음이 상한 자에게 위로함을 주고, 육신이 아픈 자에게 때로 건강을 줍니다. 복음에 충만한 사람, 참 복음을 가진 사람이 가는 곳에는 그 사회가 달라집니다. 그 모임이 달라집니다. 거기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님이 가는 곳에는 자유가 있었어요. 기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우리 교회가 터치 153 새 생명 운동을 위해 10월부터 영적 진군을 합니다. 오늘 오후 3시 예배에는 발대식을 갖습니다. 그런데 목사로서 이 새 생명 축제를 할 때마다 느끼는 부담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분명히 성도로 부름 받았는데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아마도 성인 한 사람이 동시에 감당해야 할 역할이 많게는 다섯, 여섯 가지이며 적게는 두 세 가지가 넘을 것입니다. 아내 앞에는 남편 역할, 자식들 앞에는 아버지 역할, 직장에서는 직장인 역할, 부모 앞에서는 아들 역할, 장인 장모 앞에서는 사위 역할, 사회 앞에서는 시민 역할,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는 성도 역할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인생의 문제는 그 여러 가지 역할들 중에 자기 마음에 들거나 관심을 끄는 역할만 골라 하고 있다는 데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이 역할 포기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역할들은 무거울지는 몰라도 함부로 포기할 수는 없는 것들입니다. 마음에 드는 역할만 골라하면 결국은 관심을 안 두고 멀리했던 다른 역할들이 독이 되고 병이 되어 자기 인생을 망치게 하는 것입니다. 요즘 군대를 안 가려고 별별 수단을 다 동원해도 안 되니까 대한민국 국민 역할을 포기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역시 많이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역할은 포기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제가 안동 훈련소에서 훈련받던 시절, 어느 조교가 악(!)을 쓰던 소리가 귀에 생생합니다. "야, 이 놈들아! 피할 수 없거든 기쁘게 마주쳐라!" 라는 말입니다. 특별히 힘든 역할일수록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맡겨주신 사명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세요.
고난을 통해서라도 하나님께서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뜻은 원칙적으로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뜻이요,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세상을 구원하실까요? 복음을 전함으로 구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선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보냄 받은 예수님께서는 공생에 기간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씀 전하는 데 모든 시간을 투자하셨습니다.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하늘 나라로 올리신 다음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은 교회로 하여금 입을 열어 이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따라서 성령이 임하신 교회는 복음을 증거 하게 됩니다.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이 가슴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을 전하는 자를 통해서 완성됩니다. 그리고 온 세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 날이 올 때까지 복음전하는 일을 중단할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나는 이번 터치 153 새 생명 축제에 빌립과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기쁜 마음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은혜의 사람이 넘쳐나기를 기도합니다. 빌립 한 사람으로 사마리아성에 영적 지진이 났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복음에 미쳐야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계실 때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고 모함을 받을 만큼 '해산의 수고'를 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수많은 성도들도 지난 2000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도대체 누가 미친 것입니까?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여 그 영생을 위해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투자한 사람이 미친 것입니까? 아니면, 잠깐 후면 사라져 버릴 명성을 위해 죽을지 살지도 모르면서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 채 10년도 가지 못하는 권력의 바람에 자신의 목숨을 다 걸어 놓고 사는 사람들, 자신의 목숨을 깍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미친 것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저 역시 예수님께 미치고 싶습니다. 완전히 미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처럼 온전한 사랑으로 모든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해서라도 그들을 세우고 싶습니다. 사랑하고 싶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사랑에 미쳐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에 취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복음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계절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복음은 기쁨을 줍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사람을 세우기 위해 총 진력을 할 것입니다. 빌립과 같이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과 비전을 가지고 우리 모두 또 하나의 열매를 맺기 위해 충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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