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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 (막 4: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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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 (막 4:26-29)

(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고

지네는 발이 많습니다. 지네 다리 수는 보통은 15-20쌍이지만 많은 것은 170쌍이나 된다고 합니다. 발이 많은데도 서로 꼬이지 않고 절도 있게 움직입니다. 개미가 그 모습을 보고 지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나는 발이 여섯 개 밖에 되지 않지만 발이 교대로 척척 나가는 것이 신기할 때가 있네. 자네는 발이 그렇게 많은데 어떻게 헷갈리지 않고 차례대로 내디딜 수 있는가?” 개미의 질문에 지네는 난감해졌습니다. 지네는 한 번도 자기 발이 어떻게 그렇게 움직이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개미가 간 후 지네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자기가 생각해도 정말 신기했습니다. 이 발이 나갈 때 다른 발은 어떻게 하지 그 다음 발은, 또 그 다음 발은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지네의 스텝이 꼬였습니다. 지네는 더 이상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모르고 다닐 때는 잘 다녔는데, 알려고 하니 더 이상 꼼짝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사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아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르고 그냥 삽니다. 그냥 살지만 결코 불편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내 심장이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정말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심장은 수십 평생을 고장도 없이 24시간 쉬지 않고 온몸에 혈액을 공급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알 수 없는 게 너무 많습니다. 미래 일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습니다. 내가 현재 당하고 있는 환난이나 고생의 이유를 몰라서 우리는 절망할 때가 많습니다.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지 불안해서 우리는 염려로 가득합니다. 그렇지만 알 수 없다고 해서,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절망하거나 주저앉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 때문에 오늘을 포기해야할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몰라도 괜찮습니다. 당장 내 심장이 뛰고 있고, 오늘 먹을 양식이 있고, 오늘 할 일이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십시오. 아마 절망과 좌절이란 단어는 인간에게만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동물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기 짧은 지식으로 알아보니까 미래가 불투명해 보여 좌절합니다. 자기 생각에 이해가 안가니까 주저앉아버리고 맙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스스로 자라는 씨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농부가 씨를 뿌렸습니다.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땅에 뿌려진 씨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결국에는 충실한 곡식이 열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27절 말씀입니다. 농부는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씨에서 싹으로 움트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농부는 모릅니다. 하루에 얼마큼씩 자라는지도 모르고 그 장면을 자기가 지켜본 것도 아닙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밤낮으로 자고 깨고 하다 보니 어느새 이만큼 자라고 결국은 추수할 때까지 이른 것입니다.

사실 그래요. 콩 하나 심어 놓고 이게 언제 싹이 트나 지켜보는 것처럼 지루한 것도 없습니다. 싹이 나더라도 이게 언제 이만큼 크나 하고 지켜볼 때는 마음이 답답합니다. 성질 같아서는 쑥 뽑아 늘어트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러나 콩은 우리의 답답한 마음에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자랄 뿐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콩 심은 것을 잊어버리고 딴 일에 열중하다가 어느 날 무심코 돌아보면 이만큼 자라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잊고 지내거나, 모르고 지낼 때 콩은 더 빨리 자라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 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자기 아이들을 보고 있는 부모들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가끔 집을 방문하는 친척들은 아이들을 보면서 “아니 이 아이가 언제 이렇게 훌쩍 컸어?”합니다.

주님은 이 비유 말씀을 통해 제자들에게 교훈을 줍니다. 그 교훈은 하나님 나라가 더디 자라는 것 같지만 그 때문에 답답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나 제자들의 사역이 지금 너무 미약해 보인다고 실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체 생명력이 있습니다. 가만 놔두면 스스로 자랍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안절부절하다가 스스로 좌절하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이나 아이들을 기를 때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다림과 여유입니다. 빨리 추수하고 빨리 성공해야 한다는 조급증이 우리 사역들을 망칩니다. 자기가 기대한 목표치에 다다르지 않으니까 화를 내고 심할 경우는 싹을 잘라버리기도 합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과 염려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아마 대부분 조급증이 그 원인일 것입니다. 아이를 기르는 부모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이 조급증을 버리는 것입니다. 어른 수준으로 아이들을 생각하고 그 기대에 어긋난다고 화내고 실망하면 교육이 되지 않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그 수준에 맞는 영양과 사랑을 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훌쩍 자라 있습니다.

교회 성장에 대한 조급증을 가진 목회자는 현재 주어진 것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 마음은 항상 불만과 염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심지어 분노와 초조, 무력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목회자에게도 우울증이 있습니다. 여러 원인이 있지만 조급증이 주요 원인입니다. 교회가 단번에 성장하길 바라고 한 번의 설교에 사람이 확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사람 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아는 어느 목회자는 성장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설교 단상에서 쓰러지기도 하였습니다. 우울증과 무기력증이 겹친 것입니다. 목회뿐만 아니라 사업도 그렇습니다. 꿈이 큰 것이 좋기는 하지만 그 꿈 때문에 마음이 급하기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다 병 걸립니다.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비결은 농부처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밤낮 자고 깨다 보면 어느새 자라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오늘 하루만이 주어졌고, 우리의 임무는 이 하루를 잘 보내는 것입니다. 내일 일은 잊어버리십시오. 오늘 하루에 충실했다면 감사하십시오. 미래를 알 수 없다고 해서 절망하지 마십시오. 미래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너무 지나치게 계산하고 똑똑하면 인생이 피곤합니다. 좀 어리석게 살 필요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 씨앗이 뿌려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목표는 이미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오늘 하루에 충실하면 됩니다.

스스로 열매를 맺고

예수님의 비유에서 농부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가 한 일은 지켜 본 것 뿐입니다. 물론 씨도 뿌리고 밭을 고르게 정리하고 잡초도 제거하고 거름을 주는 일은 농부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쌀을 한자로 쌀 미(米)자를 쓰는 이유는 추수를 하기까지 88번의 손길이 간다는 의미에서 그렇다고 합니다. 이만큼 농부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씨를 자라게 한 것은 아닙니다. 농부의 수고는 씨를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준 것 뿐입니다. 씨를 자라게 한 것은 씨 자체의 내적인 힘과 땅의 힘이었습니다. 27절에서는 “씨가 나서 자라되” 그랬고, 28절에서는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이 씨를 자라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씨 속에 생명의 DNA를 만들어 주신 분도 하나님이고, 따뜻한 바람과 물기와 햇볕을 24시간 내내 쉬지 않고 내려주신 분도 하나님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3:16)

우리가 가져야 될 확신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싹이 나지 아니할까, 잘 자랄까, 열매를 얼마나 맺을까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몫이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6절에서 그 확신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인생이 힘든 것은 능력도 되지 않으면서 자기가 모든 것을 책임지려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우리는 무능력하다는 사실입니다. 콩 하나 제대로 싹트게 할 능력도 없습니다. 성경은 그래서 이런 우리를 양의 모습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양은 무기가 없습니다.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도 위력적인 뿔도 없습니다. 양의 무기는 목자입니다. 좋은 목자에게 의지하는 것이 양의 최선입니다. 싱싱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분은 양의 발걸음이 아니라 목자의 지팡이입니다. 이리나 늑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는 것도 목자의 몫입니다. 양의 머리에 나쁜 병균들이 생길 때 그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분도 목자입니다.

그런데 양 주제에 자기 인생을 스스로 보호하고 다 책임지려하면 제 풀에 지쳐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라는 세계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내가 일하지 아니할 지라도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세요. 오히려 우리가 멈출 때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하십니다. 복음서에 보면 주님께서는 조용히 물러나 한적한 곳에 자주 가셨습니다. 짧은 3년이라는 공생애 기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얼마나 시간을 아껴 써야 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한적한 곳에 가서 하나님 아버지와 조용히 기도하며 교제의 시간 갖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한적한 곳에 계신 예수님을 찾기가 일쑤였고, 무리들은 주님을 찾아 한적한 곳과 광야로 몰려들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주님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조용히 물러가 계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때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자고 깨고 하는 사이에 씨앗이 자라도록 만드십니다. 독일의 대 설교가 틸리케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앙이란 고요히 기다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수용적으로 되는 것과 하나님이 일하실 때 고요히 머물러 있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라 열매 맺는 씨앗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일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계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너무 바쁩니다. 항상 휴대폰을 들고 다녀야 하고, 자기 인생의 계획이 없으면 불안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라는 손에 꼭 붙잡고 있으니 하나님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이루어 가신다는 생각을 하면 인생에 여유가 생깁니다. 이것이 게으름과 회피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너무나 바쁘고 자기 계획에 철저한 현대인들은 한 번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비텐베르크 맥주를 한 잔 마시고 있는 동안에도 복음은 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복음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열심히 전하지 않으면 복음은 멈출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편히 쉬고 있는 이 시간에도 하나님은 자기 일을 하고 계십니다. 루터의 이 말은 지나치게 하나님의 일 때문에 매여서 자유함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라는 씨앗 비유를 통해서 겸손함을 배워야 합니다. 나 아니면 안 된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따라 스스로 그 일을 이루어 가시고, 그때그때 필요한 사람들을 세워 일을 하게 하십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집니다. 우리에게 그 일이 맡겨지면 단지 감사함으로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내가 했다고 교만하거나 배짱부릴 것이 아닙니다. 굴러다니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삼으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는 그 돌들을 이용해서 우리 대신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만드실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850명이나 되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기도한즉 3년 반 만에 이스라엘에 비가 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런 대승에도 불구하고 왕비 이세벨은 굴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엘리야를 죽이려고 혈안이 됩니다. 그러자 이에 실망한 엘리야는 광야에 있는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합니다.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19:4)

이에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어 먹을 것을 주고 잠을 재워 푹 쉬게 합니다. 그리고는 호렙 산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곳에서도 엘리야는 하나님께 이렇게 항의합니다.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하19:10) 엘리야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오직 나만 남았거늘” 엘리야를 힘들게 했던 것은 바로 이런 태도였습니다. 자신이 혼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다는 태도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자신의 실패는 곧 하나님의 실패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참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하19:18) 하나님의 말씀은 너 아니어도 사람 많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제자 엘리사도 있고 그 외에 칠천 명이나 되는 의인들이 있습니다. 혼자라는 생각 때문에 사역이 무겁게 느껴집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오히려 일을 그릇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확신을 가져야 조급하지 않습니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부담감을 떨쳐 버리고 오히려 자신의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 또 동시에 이런 확신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나 아니어도 하나님의 얼마든지 자신의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뜻을 위한 도구가 된 것에 다만 감사할 뿐입니다.

싹 이삭 곡식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에서 우리는 또한 성장의 법칙을 배울 수 있습니다. 28절입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씨에서 싹, 싹에서 이삭, 이삭에서 열매로 이어집니다. 처음부터 열매부터 시작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조급합니다.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으로 심자마자 열매를 기대합니다. 모든 것은 순서가 있고 그 그릇이 채워져야 합니다. 땅속에서 자리 잡는 기간이 필요하고 충분한 조건이 되어야 씨는 발아합니다. 충분한 햇볕과 물기를 먹어야 싹은 줄기가 자라고 성장합니다. 모진 비바람과 폭풍우를 견뎌야 줄기가 굵어지고 뿌리가 깊어집니다. 가을이 되면 그때서야 열매를 맺기 시작합니다. 모든 꽃들도 순서가 있고 자기 조건이 맞아야 꽃이 핍니다.

신영복 선생의 『나무야 나무야』라는 책을 읽다가 제가 감동을 받은 대목이 있습니다. 저자는 우연히 한 늙은 목수가 종이 위에 집을 그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얀 종이 위에 집을 그린다면 어떻게 그릴 것 같습니까? 보통은 먼저 근사한 지붕을 그렸을 것입니다. 거기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을 그렸을 것입니다. 창문도 내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출입구나 바닥 또는 마당을 그림으로 마무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늙은 목수가 집을 그리는 법은 우리가 그리는 순서와 전혀 달랐습니다. 목수는 먼저 주춧돌을 그렸습니다.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도리와 들보 서까래를 올리고 맨 마지막에 지붕을 완성했습니다. 우리와 다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목수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와 일치했던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건물들은 기초나 주춧돌부터 올라가지 지붕부터 시작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냥 멀리서 바라보거나 머리속으로만 집을 그리는 사람과 실제 집을 지어본 사람의 그림의 순서는 전혀 달랐습니다.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씨, 싹, 줄기, 이삭, 열매입니다. 기초 공사로 다져야 할 때가 있고, 기둥과 벽을 세워야 할 때가 있고, 지붕을 얹고 인테리어로 마감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의 때를 모르고 다른 사람의 완성된 집만 부러워하다간 우리는 무기력함만 느낄 것입니다. 순서를 무시하고 급히 지으려 하다가는 곧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모두에게는 자기 때가 있고 그 때에 맞추어 살아야 합니다. 전도서는 말씀합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전3;1-3)

이 모든 과정에서도 우리가 갖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지만 씨앗이 자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보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역사 또한 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기적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이미 변화의 역사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미래의 풍성한 수확의 때를 위하여 그분의 계획과 시간표 대로 모든 것을 하나하나 준비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어두운 눈이 이것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봄이 되면 죽은 것 같은 대지에서 새순이 돋고 새싹이 피어오릅니다. 씨앗은 죽지 않았습니다.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가을이 되면 열매도 거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실망하지 않고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아갈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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