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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로 환경을 이기라(2) : 환경을 이기는 기도생활 (막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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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로 환경을 이기라(2) : 환경을 이기는 기도생활 (막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기록 중 기도하시는 장면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도 이 기사가 나오는데 비교적 간략하게 나오고, 마가복음에서는 이 기사가 상세히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가가 이 부분을 비중 있게 다루려고 한 흔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마가복음 첫 장에서 예수님의 하루 일과에 대한 긴 행적들과 그 이튿날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면을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는 이 새벽의 장면은 요단강 변에서 기도하실 때처럼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어마어마한 광경도 아니었고 공생애에 들어서기에 앞서서 광야에서 기도하시던 때와 같이 그렇게 특별한 영적인 역사가 일어나는 장면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관한 이 세 번째 기록은 예수님의 일생 동안 계속되었던 일상적인 기도생활 중 하나를 적은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와 같이 성령이 임하는 사건이나, 또 광야에서 사십 일간 주야로 금식하시고 기도하셔서 악한 영을 제압하신 이 위대하고 엄청난 일은 기도의 특별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의 생애의 기도에 관한 세 번째 장면은 너무나 인간적이고, 그러면서도 너무나 신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생각하기에 앞서서 안식일에 있었던 일들을 길게 기록하고 있는 성경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I. 안식일에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가르치시기 시작했고 그 때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귀신들이 주의 명령에 꼼짝하지 못하고 축출되는 역사가 일어났고, 말씀을 들을 때에 사람들은 이제껏 듣지 못한 새로운 교훈을 접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그것이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교훈일 뿐만 아니라 능력에 있어서도 자신들을 제압하고 압도하는 강력한 영적인 권능을 가진 말씀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복음의 소식이 들리지 않고 악한 세력들이 가득한 그 땅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영적인 사명을 감당하셨을 때에, 그것은 그분에게 엄청난 체력과 영력을 요하는 순간이었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훨씬 더 뛰어난 집중력과 영력을 쏟아 부으면서 영혼들에게 권세 있는 말씀을 전파하셨을 그때, 예수님의 이 설교사역에 엄청난 힘이 소모되었으리라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설교사역으로 힘을 소진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베드로의 장모의 집에 가서 심방하고 열병으로 누운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루하루는 사역으로 가득 채워진 하루였고 저녁때가 되어서 숙소에 돌아왔을 때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건 고쳐주심을 간절히 바라는 수많은 병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날 밤에 예수님께 치료받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나는 너무 지치고 피곤하니 내일 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날 밤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한명씩 치료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지 모르지만 밤늦도록, 길면 이른 새벽까지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수고는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을 때에 그저 집안에 모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손을 높이 들고 “모두 나으라”고 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병든 그들의 육신만큼이나 그 육신 속에 있는 곤고한 영혼이 예수님의 섬김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그들의 영혼을 병든 육신보다 훨씬 더 연민과 긍휼에 넘치는 마음으로 바라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틀림없이 그들 하나하나를 고쳐주시면서 죄와 불순종,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아버지의 은혜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고 각자에게 적절한 교훈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역은 정말 많은 에너지와 긴 시간을 요하는 사역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치료하시며 영혼을 돌보시기 위해서 자신을 다 소진하시고 예수님께서 잠자리에 드신 시간은 언제였을까요? 그 시간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깊은 밤, 혹은 이른 새벽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많은 사역으로 육신의 힘을 소진하시고 밤에 잠자리에 드신 예수님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신 그분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섬기고 영혼들을 섬기는 복잡하고 힘겨운 일과를 마치고 피곤한 기색으로 잠자리에 누워 곤하게 잠드신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무엇으로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신 그분이 이렇게 연약한 육체를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서 입으셨던 그 육체는 성질상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이 육체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피곤을 느끼고 때가 되면 잠이 오고 굶주림을 느끼는 똑같은 육체였습니다. 다만 죄가 없으시다는 것 이외에 인간의 육신이 갖는 모든 연약함을 그대로 가지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육체의 연약함이 일평생 연약하고 병든 영혼들을 섬기는 데 있어서 얼마나 무거운 짐이 되셨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거운 연약함이라는 육신의 짐을 지고 영혼을 섬기신 그분은 성실하셨습니다. 성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서 성실하게 영혼을 섬기시고 연약한 육신에도 불구하고 성실한 그 섬김의 삶을 지키시기 위해서는 그분에게는 남다른 희생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육체를 가지시고서 그렇게 자기를 혹사하시면서, 그 새벽에 제자들은 잠들어 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러한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에 관해 한번 묵상해 보십시오. 아마 인간의 연약한 육신을 입으신 그 처지는 죽도록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며 살아가려고 애쓰는 그분의 발목을 붙들고 있는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이었을 것입니다.


II. 새벽 미명에

그런데 그분이 새벽 미명에 일어나시는 장면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본문의 삶은 예수님의 생애 중 몇 번 있었던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에 일어났던 일상적인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연약한 육체를 입으시고 이렇게 기도하셨던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첫 번째는 시간의 문제입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이것은 아직 어두움이 도망가지 못한 이른 새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시간이 아니라 이 새벽에 기도하셔야 했던 이유는, 낮에는 하나님을 섬기고 영혼들을 섬겨야 하는 시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러 가시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니는 이야기가 몇 번이나 나옵니다. 이렇게 일은 너무나도 많고, 사람들도 예수님을 찾아다녔던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새벽 시간에 기도하러 한적한 곳으로 가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벽을 절대적으로 강조할 필요는 없지만,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새벽 시간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새벽 시간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종들을 많이 만나주셨습니다. 그래서 정말 탁월한 믿음을 소유했던 많은 사람들이 바로 새벽의 사람이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고 새벽 시간에 약했던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어느 시간이든지 가장 좋은 생각이 집중되고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수 있는 시간이 좋은 시간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새벽이 아닌 다른 시간에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역사를 읽어보면 항상 하나님과 긴밀한 교제를 나누었던 사람들은 새벽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새벽에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나아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낮에 시간을 내서 기도를 하는 것도 특별히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주님이 아니면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서 일찍 일어난다는 것, 그것을 잠자리에 누울 때부터 생각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귀히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새벽 시간에 하나님 아버지께 달려가 나누는 교제의 시간 가운데, 자신이 누구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닫고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오늘 이 하루를 참된 신자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벽 시간에 삶의 동기가 정화되고, 하루 동안에 일어날지 모르는 수많은 유혹과 도전의 요소들을 영적인 시각으로 분별하고 해석해서 시험에 들지 않고 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신앙적인 분별력과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정서가 동기가 되어서 삶을 움직일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 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루의 생활을 승리로 이끄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눈을 뜨자마자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로 젖는 사람은 여러분들 가운데 매우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아침마다 세탁될 필요가 있고 신령한 하늘의 은혜로운 영으로 충만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하루를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근심과 걱정이 쌓여있고 악몽에까지 눌려서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새벽 시간에 아버지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신령한 은혜를 부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녹이셔서 거룩한 정서를 우리에게 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왜 그것을 자신에게 허락하셨는지 바로 깨달아 알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감정 없이는 누구도 세상의 유혹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한적한 곳으로 가사”라고 했는데, 이 한적한 곳은 희랍어로 “고독한 장소”입니다. 이것은 결국 기도의 시간도 중요하지만 “방해받지 않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방해받지 않는 마음”, 새벽마다 나와도 기도를 전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몸은 새벽에 나왔지만 혼자 나아온 것이 아니라 온갖 잡동사니를 다 가지고 들어온 것입니다. 온갖 걱정, 근심, 신경 쓰이는 모든 것을 함께 가지고 들어와서,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라고 하면서 회사 생각, 돈 생각, 집 걱정 등이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간은 구별이 되었는데, 도대체 이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께 구별된 마음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올라갈 수 없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가 훨훨 날아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이르는 기도가 되려면 무거운 것이 매달리지 말아야 합니다. 근심과 걱정과 염려와 온갖 잡동사니 다 매달려서는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생각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근심이 떠나지 않는 생애를 사셨는데 그것은 신령한 염려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염려라면 기도를 드리는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속되고 세속적인 염려만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방해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너무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경건한 괴로움에 휩싸이는 것은, 기도의 날개가 올라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바람을 받쳐 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근심에 비해 자기가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무거운 바윗덩어리가 되어서 기도가 뜰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신령한 염려, 거룩한 것을 향한 근심,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방해하지 않습니다. 혹은 신령한 일에 대해서 잘못된 방법으로 염려할 때는 기도가 잠시 방해를 받기는 하지만, 그러나 깨닫고 나면 오히려 더 큰 추진력을 발휘해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을 더 온전히 바라보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십니다. 주님은 번잡한 생활 속에서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아니라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응시하고 그리고 주님과 홀로 대면할 수 있는 조용한 마음의 상태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나서 반가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가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만나서 깜짝 놀라게 되고 다음을 기약하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일반적으로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영적인 회복은 그렇지 않습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주님이 나를 어떻게 해 주시겠지.’ 해 주시긴 해 주시지만 그런 식으로 놀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영적인 갈급함을 깊이 느끼고 주님을 갈망하고 자신이 깨뜨려지고 그렇게 주님을 만날 마음의 준비를 갖추게 하신 후에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면, 기도에 있어서는 이러한 원칙이 얼마나 잘 적용되겠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새벽마다 밤마다 또는 낮에 교회에 와서 아니면 집에서 기도를 하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은 없고 기도생활에 의해서 기도의 영이 자신에게 충전되는 일들이 없고 늘 무미건조하고 답답함만 느낀다면 어떻겠습니까? 기도의 영으로 채워지고 좋으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답답함 속에서 무조건 계속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지 말고, 어디서부터 문제가 있는 것인지, 어디가 망가졌는가를 생각해 보고 고쳐야 되지 않습니까? 조금만 고치면 될 것을 안 고치고 계속해서 기다리다가, 결국 하는 말이 “내가 하나님께 그렇게 매달렸는데 돌아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기계가 망가졌는데 거기에 아무리 전기를 꽂는다고 해서 충전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돌아보고 새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더듬어 가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멀어진 삶으로, 구별된 마음으로, 하나님이 아니시면 나를 도울 이 없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때에, 왜 우리를 돌아보시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성경은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하는데 이 장면은 결국 시간과 장소도 정해지고 마음에 상태도 정해졌을 때 “기도하시더니”,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간과 장소가 정해지고 마음이 다 갖추어졌어도,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많은 생각이 맴돈다 하더라도 그것이 기도는 아닙니다. 기도는 꼭 입을 열어서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것을 언어화해서 하나님 앞에 아뢰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돌고 있는 생각을 우리 의식 속에서 언어화해 하나님 앞에 고백함으로, 그 머릿속에 있는 그 생각과 사상이 우리 자신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기도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수단일 수 있는 것은 이렇게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놀랍게 바꾸시고 변화시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자신의 영적인 더러움을 씻어버리고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도록 아버지 앞에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는 이러한 생명을 누릴 것이고 기도하기 싫어하는 자는 이러한 생명이 고갈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III. 환경과 기도

여기에서 우리들은 환경과 기도의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환경 탓을 많이 하는데 우리가 충분히 기도할 수 있도록 환경이 길을 열어주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물론 영향을 전혀 안 받을 수는 없지만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순전히 환경 때문만은 아닙니다. 실제로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내면적인 이유입니다. 기도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든지,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든지, 벽을 대고 기도한다는 생각이 든다든지, 무지해서 더 이상 어떤 진전을 보기 힘들다든지 아니면 시간도 있고 체력도 있고 집중도 되는데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어서 기도에 방해를 받고 있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일이 많아서 기도를 못하는 이유가 환경적인 어려움뿐이라면 어떻게 보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 가운데 가장 극복하기 쉬운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지 환경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도 병들어 있어 기도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때에는 죄와 불순종으로 기도의 영이 흐려져서 기도하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일이 너무 늦게 끝나서’, ‘피곤해서’,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런 식으로 핑계를 댑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환경은 우리가 타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싸우고 이겨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극복해야할 숙제입니다. 그것을 극복하면서 싸워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도 이것은 정말 힘겨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육체를 가지신 그분에게 그 일이 얼마나 힘겨우셨겠습니까? 그때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자신이 영혼을 돌보고 그 영혼들을 고치는 사역을 해나가시기 위해서는 이 새벽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하늘에 속한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한다고 그것으로 당신 자신이 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고 믿으셨기 때문에 늘 이렇게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병자와 같이 누워있던 우리의 기도생활이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를 누리며 기도할 수 있도록 벌떡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물론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지만,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서, 환경과 더불어서 싸우고자 하고 환경을 극복하고자 애쓰는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기도의 문을 열어주시고 기도할 새 힘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관심의 초점을 어디에 두고 사느냐입니다. 지금 우리가 환경적인 이유 때문에 기도할 수 없다면 환경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질 때는 언제입니까?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다음에는 좀 더 나은 여건이 되어서 영적인 생활에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 하는 식의 기대를 하면서 살아왔고 이런 식으로 계속 속으면서 신앙생활을 해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영혼에 무리한 부담을 주어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자신이 그 고통을 짊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싫으니까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고 하기는 하되 ‘앞으로 상황이 나아지면’이라고 조건을 달고 오늘 하나님 앞에 마땅히 해야 할 기도의 의무에 해이한 것을 합리화시키고 위안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들에게 기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깊은 후회와 뉘우침이 있다면 우리의 삶이 바뀌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신기하게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자기를 쏟아 붓는 기도의 의무를 게을리 하는 것에 대해서 별로 회개하지 않습니다. 명백한 돌이킴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기도의 제목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비춰주셔서 우리에게 놓여있는 삶의 문제를 비춰주시기만 하면 우리는 머리를 들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잠든 영혼에 대해서 말씀의 빛으로 비추시며 이것이 정말 하나님께 사랑 받은 자녀의 삶이냐고 물으시면 우리는 머리를 들 수가 없습니다. 너희의 자녀들을 위해서 울고 있느냐고 물으실 때 우리는 머리를 들 수 없습니다. 너희 자녀가 이제 장성해 가는데 정말 저렇게 살아가면 네 자녀가 후에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을 살 수 있겠느냐 하시면 머리를 들 수 없습니다.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자신이 이 땅에 있는 목적조차 알지 못하여 이 세상에서 행복해보려고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인생들이 보이지 않느냐고 물으시면 우리는 머리를 들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너희의 기도를 필요로 하고 있는 곳은 없느냐고 물으실 때에는 더더욱 몸 둘 바를 모르는 정도가 될 것입니다. 조각나고 부서진 우리의 가정들, 주위의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 영적인 곤궁과 육적인 곤궁으로 고통 속에 소리치는 불쌍한 영혼들에 대해서 주님께서 물으시면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의 세속적인 삶은 물론이고 죄에 대해서 늘 지고 마는 우리의 삶,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맡겨진 주의 일들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있느냐고 물어볼 때 사실은 우리가 일을 감당한다기보다는 교회의 일이, 하나님의 일이 우리를 감당하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너무나 많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정말 기도하고 있는 부분이 얼마나 될까요? ‘이런 부분은 이렇게 부족하지만 그러나 정말 제가 힘써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부분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보다 더 시급한 이 기도의 생활을 뒤로 한 채 이런 저런 이유와 핑계로, 하루하루 맞닥뜨린 우리의 삶에 자신을 소진시키면서 이 세상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일보다는 바쁘고 급한 일들을 처리하느라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게을리 하고 기도에 소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 아닙니까?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우리 육신의 유혹에 굴복하기를 훨씬 쉽게 선택하고 그렇게 해서 수없이 결심하면서도 실패하는 새벽기도 생활의 경험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보십시오. 주님께서 새벽까지 말씀을 전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자기를 다 소진하신 후에 이른 새벽의 어두움을 가르시며 홀로 조용히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셔서 이슬을 맞으시며 아버지 앞에 기도하신 그 모습을 보십시오. 단지 연약한 육신을 가지신 그분이셨습니다. 육신의 힘으로서는 탁월할 것이 없는 그런 가난한 청년이셨습니다. 인생의 많은 슬픔과 고통, 결핍과 연약함을 맛보신 그분이 그런 육신을 가지고 주님 앞에 기도하실 수 있으셨던 것은, 감당할 수 없는 그 환경을 감당하신 것은, 그 빈틈을 충성과 헌신으로 채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그 새벽에 푹 주무시기를 원하셨을 것이고 예수님도 그 새벽에 쉬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의 부족한 기도생활을 하나님을 향한 헌신으로 채우시면서, 연약한 육신을 충성된 마음으로 메우시면서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환경의 어려움을 물리치시고 기도로 가득 찬 삶을 사셨습니다. 이슬을 맞으며 기도하시는 그 새벽 시간은 그분의 영혼이 우리와 같이 연약한 육신을 가진 비참한 인간들이 먹고 마실 수 있는 영혼의 양식을 깊이 공급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영혼의 물과 젖과 양식을 그 새벽의 기도 시간을 통해 자신 속에 가득 채우시고 이른 새벽부터 깊은 밤에 이르기까지 핍절한 영혼들을 찾아내시어 가슴을 풀어 어린 아이에게 젖을 물리시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무엇인가 자신 속에 있는 것을 쏟아 부으시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 일을 감당하는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자기도 그 일이 좋아서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충성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충성이라는 것은 그 충성이 없었으면 할 수 없었을 어떤 일을, 고통이 있으면서도 충성하는 기쁨 때문에 극복하며 환경의 어려움을 희생으로 이기면서 감당하는 것, 그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물론 그것은 무척 힘이 드는 일입니다. 그런데 충성된 마음은 그것을 극복하게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의 더러운 욕망들이 우리의 영혼을 삼킬 듯이 넘실거리는, 나그네와 행인 같은 육체가 우리를 거스르는 이 환경 속에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힘을 간직한 채 그분과의 교제 속에서 일평생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어떻게 희생 없이 되겠습니까? 소중한 것 치고 쉽게 얻어지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쉬운 길이 아닙니다.


IV. 십자가 지는 정신으로

그래서 기도생활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십자가 지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환경이 여러분들을 놓아주어 기도하기를 격려할 때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그럴 때는 일평생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기 힘들 때마다 항상 십자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자기의 연약함을 충성으로 이기시고 자신을 쏟아 부으며 기도에 자기를 바치시고 우리를 위해서 헌신하시더니 결국은 십자가에서 죽으셨구나.”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희생하신 그 십자가의 정신은 사실 예수님께서 일생동안 이루셨던 그 기도의 정신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이었다고 말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습니다. 희생 없이 어떻게 이 기도 생활의 견고함을 유지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희생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기도 생활의 견고함 여부를 보면 그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많은 핑계를 대지만 기도하지 않는 것은 환경 때문이라기보다는 정확하게 말하면 주님을 향한 사랑의 뜨거운 충성심이 환경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그 환경에 붙들려서 기도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상황이 어려울 때에 좀처럼 기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기도하기를 결심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우리의 신앙의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우리의 마음으로나 상황으로나 기도하기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래도 ‘주님께 의지하는 것 말고 내게 무슨 희망이 있으랴’라고 매달릴 때에 주님이 주신 은혜가 특별했던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고난을 당하면서라도 충성되게 살아서 우리 육신의 연약한 부분들 때문에 주님이 손해를 보시지 않고 우리의 영혼이 벌레 먹지 않으며 그러한 헌신과 충성심으로 우리의 희생을 통해서 채워지고 메워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희생 없이는 그런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이 교회의 영혼들을 돌보고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일꾼으로서 여기에 와서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영혼들을 돌보겠습니까? 어떻게 진실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며 살 수 있겠습니까? 제가 여러분께 묻고 싶은 것은 새벽 기도든지 저녁 기도든지 여러분만의 기도 시간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험으로 미뤄볼 때 하루에 최소한 30분도 기도하지 않고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이길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헌신된 삶을 사시면서 이 새벽의 시간을 기도에 바쳐서 승리를 지키시면서 사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게 기도하신 그분에게 하나님을 섬길 일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의 필요, 하나님을 섬기는 섬김의 필요 속에서도 그분은 이 일을 감당해 나가기 위해 많은 희생을 감행하시고 기도의 세계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마가가 예수님의 생애 초기의 이 장면을 이렇게 상세하게 여기에 기록한 것은 여러분들도 바로 이러한 어려움 속에 있을 때에라도 주님의 이 충성스러운 모본을 따라서 십자가의 정신으로 기도하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V. 적용과 결론

신앙생활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누군가가 여러분들에게 ‘질러가는 성화의 길이 있다’, ‘짧은 시간에 도달할 수 있는 거룩함의 길이 있다’고 가르쳐 준다고 한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이 매일 기도하며 살아야했습니다. 매일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그래서 다시 정결함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사모하며 아버지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고, 주의 사죄의 은총을 구하고, 그리고 다시 기도의 세계를 회복하고…….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다른 길이 있었으면 그분들이 먼저 그런 길을 걸어가고 이러한 과정을 보여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기도하시면서 사셨습니다. 그러니까 환경의 핑계를 대며 희생하지 않고 기도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자기 안에 주님이 주신 이 생명 있는 삶을 반납하고 죄에 매여서 살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하루에 단 30분도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무릎을 꿇지 않는 여러분들의 기도생활로 승리를 꿈꾼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믿음이라고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요행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시겠습니까?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님 당신이 그렇게 힘겨운 인생,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시면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시고 참된 진리를 가르칠 때에 그 진리의 가르침으로 영혼들에게 감화를 끼치시고 이 세상에 아버지의 나라가 오도록 섬기시는 그 비결이 아버지와의 깊은 교제 속에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며, 어떻게 하든지 환경을 이기며 이 기도의 시간이 아니면 나는 오늘 하루를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또 십자가의 정신으로 기도하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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