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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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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복음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임과 동시에 해보아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전도는 하는데서 역사가 있고 체험이 있습니다. 전도를 바로 지금 시도하는데서 놀라운 결과가 나타나는 가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전도할 수 있는가?”의 질문에 대하여 거부하거나 회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질문에 분명한 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왜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까?   

  󰓍 복음은 전해져야 할 가정 좋은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기쁜 소식이나 충격적인 일들은 전해지기 마련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지배 아래에서 해방된 광복의 날, 그 뉴스를 들은 사람은 그 소식을 말하지 않고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손과 손에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만세를 부르며 해방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며 외쳐 전했습니다. 아마 마음이 뜨거워, 입에 거품을 품고 침을 튀겨가면서, 심지어 너무 감격하고 흥분되어서 말을 더듬기까지 하면서 그 소식을 전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 소식을 전하지 않고 견딜 수 있습니까? 어떻게 흥분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중에 시간이 있을 때에 전하면 된다고 미룰 수 있겠습니까?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함으로 죄에서 용서받고 구원받는다는, 이 소식은 전하지 않을 수 없는 반드시 전해져야 하는 소식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가,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 곁에서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도록 했습니다. 이일로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놀라운 소식이 사람들에게 전파되어갔습니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앞으로는 그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금했습니다. 이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 앞에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행4:20)고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보고들은 것은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인류의 역사가 끝날 때 까지, 온 세상의 소망으로서,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만 할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마24:14, 요 17:23). 그러므로 이 기쁜 소식은 전해져야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늘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에게 증언될 것이다. 그 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마24:14)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냐!.....”(새 번역)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가장 귀중한 기쁜 소식이기에 전해지는 것입니다.

  󰓎 복음을 전하는 것은 참된 이웃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가장귀한 것을 나누어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너무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죄악가운데서 멸망의 길을 걸어가는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자신의 가장귀한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3:16-18/ 새 번역)

  예수님은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중요한지를 묻는 율법교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7-40)

  이웃을 향한 참된 사랑은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내가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것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전해주는 것은 가장귀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우리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해 봅시다. 나의 가장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을 향한 나의 사랑은 어떤 것일까요?

  만약 사람이 예수 믿지 못하고 죽으면 지옥에 가는 것이 분명한 것이라면, 부모님께 효도하는 나의 사랑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지옥에 가지 않으시도록 복음을 전해드리는 것이 아닐까요? 남편을 지옥에 보내는 아내는 그 사랑이 무엇일까요? 아내에게 전도하지 않는 남편의 사랑이 참된 것일까요? 자식들에게 전도 못하는 부모의 사랑이 바른 사랑일까요? 제자들에게 전도 못하는 교사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여러분, 복음을 믿는 내가, 내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은 가지는데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살전2:4) 그러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살전2:4)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파할 것을 명하시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서본문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전도는 우리가 믿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고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해야하는 것입니다. 

  󰓐 기쁨으로 감당할 의무와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전도에 대하여 이렇게까지 말씀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고전9:16)
  전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역행하는 것이 되고,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결과가 되기에, 내게 화가되는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전도에 대한 당연한 의무와 책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와 책임입니다. 그러기에 전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의무와 책임은 기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무거운 멍에와 짐이 아닙니다.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이기에 보람을 가지는 것이고 그 보람이 있기에 기쁨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빚을 갚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리스 사람에게나 미개한 사람에게나, 지혜가 있는 사람에게나 어리석은 사람에게나, 다 빚을 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간절한 소원은,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롬1:14-15)
  빚진 자는 빚을 가릴 의무와 책임을 가집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빚을 가리듯이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전도하는 일에 의무와 책임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의무와 책임을 깨닫기에 기쁨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전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보는데서입니다.
  나는 왜 전도하기가 어렵다고 느껴집니까? 왜 전도하는 일에 자신이 없습니까? 왜 전도하는 일이 부끄럽다고 느껴지는 것입니까? 이러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내게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하는데서 전도하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전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이신 예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기쁜 소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이름이 우리의 삶의 기쁨 자체요. 행복이 되는데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예수 이름이 내게 생명이요 은혜요 사랑이요 감격이요 능력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 믿음의 부족함입니다.

  성서본문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마음이 무딘 것/새 번역)’을 꾸짖으셨습니다.
  믿음을 가지십시다. 적음 믿음일지라고 없어지는 믿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으로 자라가는 믿음이 되도록 하십시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는 데서 전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 경험과 훈련부족입니다.

  전도할 때에 완벽한 자격을 가져야만 전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분량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시작하는데서 전도의 실제적 생활이 경험되어지고 훈련되어지는 것입니다. 

  󰒔 전도가 주님과 함께 동역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데서입니다.

  성서본문에 보면 제자들이 나가 두루 복음을 전할 때에 주께서 함께 역사하셨습니다.(막16:20) 그것도 표적으로 함께하셨습니다.(막16:17-18, 20) 
  전도는 내가 하되 주님이 함께 하시는 동역임을 깨닫지 못하기에 두렵고 자신감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전도하는 그곳에 함께하십니다. 성령께서 함께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의 역사는 능력과 표적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행1:8)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는 긴박성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철로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가 있다고 할 때에 그를 향하여 달려오는 열차를 보고도 그 아이들을 그대로 두겠습니까? 그 상황에서 돌베개를 베고 누웠던 야곱처럼 레일을 베개 삼아 잠자고 있는 술 취한 아저씨를 마냥 그대로 두겠습니까? 자고 있는 사람 깨우기 미안해서 그냥 두겠습니까? 그것이 신사적인 행동이며 예의 입니까? 체면보다 귀한 것이 목숨입니다. 예절보다 더 귀한 것은 생명의 구원입니다. 

  바울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1:16)

  우리 모두는, 나도 지금부터 복음을 전하며 살겠다고 다짐하며 전도하기 시작하십시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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