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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롬 9: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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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롬 9:6-18)

저는 지난 주간 로마서의 말씀을 새벽마다 함께 나누면서 아주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가 혼자서 말씀을 묵상할 때는 무릎을 치면서 감탄을 하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제가 새벽기도시간에 나가서 말씀을 전할 때는 깨달은 말씀이 잘 전달이 안 되고,
뭔가 말이 꼬이고, 공전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깨닫게 된 것은 제가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분명하게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이 말씀으로 주일 설교를 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나름대로 준비를 했지만 여전히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오늘은 비교적 교리적인 설교이기 때문에 좀 딱딱할 수 있습니다.
가능한 한 제가 쉽게 풀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하지만,
여러분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귀를 쫑긋 세우고 들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논지를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는 일로 미국에 잠시 머물 때 있었던 일입니다.
아는 후배 목사님 댁에 들렀습니다.
딸이 둘 있는데, 큰 딸은 9살이고, 작은 딸은 7살이었던 것 같습니다.
두 딸에게 뭔가 사 주고 싶었는데 껌을 사 달라기에 작은 마트에 데리고 갔습니다.
작은 딸은 껌을 받아 들고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는데,
큰 딸은 ‘저 초콜릿 하나만 사면 안 될까요?’ 그래서,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카운터에 가더니 굳이 이 초콜릿 값이 얼마냐고 물어요.
80센트라고 하더라고요.
밖으로 나오는데 동생이 보고서 갑자기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제게 강한 어조로
“You are not fair.” 불공평하다는 겁니다.
제가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너도 사 줄게’ 했더니 ‘싫어요.’하면서 눈을 흘겨요.
제가 좋은 일하고서 얼마나 야단을 맞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요. 그 큰 딸이 집으로 오더니 저에게 80센트를 가지고 왔습니다.
초콜릿 값을 받으라는 겁니다.
아니라고 해도 막무가내에요.
왜냐하면 목사님은 저에게 껌을 사 주기로 하고 마트에 간 것이고,
초콜릿은 자기가 먹고 싶어서 산 것인데,
그 때 돈을 가지고 가지 않았기 때문에 빌린 것이라는 겁니다.
결국 제 가방에 돈을 살짝 놓고 나가더라고요.
저는 또 한 번 뒤통수를 맞았습니다.

저는 이 작은 경험을 통해서, 미국교육에서 fair 하냐? unfair 하냐? 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차별 대우받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미국같이 다인종사회에서는, 인종차별이라는 것은 가장 예민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 문제에 걸리게 되면 아주 난감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단일민족이라는 말은 할 수 없을 만큼
점점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들어와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인종차별을 당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
majority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잘 느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minority에 속해 보면, 금방 차별대우 받는 것을 느끼게 되고
그것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게 하고,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나라에 와서 살고 있는 외국인들에 대해서
친절하게 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차별대우 받는 것에 대해서는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들도
자신들이 특혜를 받는 것에 대해서는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에 대한 관심이요, 예우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특혜를 받으면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차별이 된다는 사실은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차별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불만요소가 됩니다.
‘하나님은 공평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이 불공평한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 한 번 6-8절을 함께 읽어 볼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이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아브라함은 사라의 몸종 하갈의 몸에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낳은 아들인 이삭만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이스마엘에 대한 차별로 보여집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을 하였는데
쌍둥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둘이 얼마나 경쟁을 하는지, 배속에서부터 경쟁을 하고 다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그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말라기1:2-3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면서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왜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을 차별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사람들이 그러는 것은 기분이 나쁘지만 이해할 수는 있어요.
사람들은 불완전한 죄인이니까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아니잖아요.
사람들에게서 차별을 당하는 것도 참기 어려운데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하나님까지 나를 차별하신다고 느끼면
이제는 더 이상 의지할 곳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기서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과연 우리를 차별하실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불의를 행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니시죠.(14절)
우리가 아는 공의로운 하나님으로서는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을 똑같이 만들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다르게 대하고 계시는 것은 현실입니다.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독특한 존재입니다.
더구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가 다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나를 이렇게 독특하게 만드셨냐?’고 불만을 가지는 것은 정당한 것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에서 좀 더 잘 생긴 사람도 있고,
균형과 조화를 잘 이루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대적으로 비교할 때 생기는 문제입니다. 하나님 관점이 아니에요.
하나님께는 모두가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다 하나님의 목적이 있어 태어났습니다.

세상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습니다.
키가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습니다.
한국 사람도 있고, 미국 사람도 있고, 유태인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불공평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능력이 많은 사람도 있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도 있습니다.
장애인도 있고, 비장애인도 있습니다.
한 가지만 전문적으로 잘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것, 저것을 다 잘하는 팔방미인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잘하지 못하는 것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불공평하게 만드셨습니까?
이런 관점을 가지고 보면, 매사에 불만스러운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런 부모를 만나게 하셨는가?
왜 나를 남자로 만드셨는가? 왜 나를 여자로 만드셨는가?
왜 나를 김씨가 되게 하셨는가? 박씨가 되게 하셨는가?

그런데 여러분, 반대로 뒤집어서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이 공평하게 하신다고 다 남자로 만드시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요?
다 공부 잘해서 모두 1등하는 사람으로 만드시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요?
모두가 다 운동을 잘해서 금메달감을 만드시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릅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보다 옳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때때로 당신 마음대로 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시는 것이 때로 우리에게는 불공평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그 깊은 속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깨닫고 보면, 불평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마음대로 하신다고 해도 불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옳으십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그런 하나님이라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눈에 불공평해 보이는 것도 깨닫고 보면, 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지선이라는 청년을 아시죠?
대학을 다니면서 교회 찬양대에서 봉사하던 믿음도 좋고 얼굴도 예쁜 청년이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로 온 몸에 화상을 입고
끔찍하게 변해 버린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수도 없이 여러 번에 걸쳐서 수술을 했지만
예전의 그 아름답던 얼굴을 되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빠’를 ‘오빠’라고 발음할 수 없어서
‘오까’라고 말하게 되는 장애를 안고 있습니다.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도 많이 가졌다고 합니다.

‘왜?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나를 이 모양으로 만드십니까?’
이것은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선이가 은혜를 깨닫고 보니까, 감사하더라는 것입니다.
찬양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거죠.

송명희 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뇌성마비로 인해서 반신불수가 되어버린 여인입니다.
입이 돌아가고, 손이 비틀어지고, 그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아니,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을 수가 있습니까?
송명희 씨도 여러 번 자살을 생각할 만큼,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너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 모두의 너무나 자연스런 항변입니다.

우리도 사업을 하다가 어려움을 당하거나,
직장 생활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퇴출을 당하게 되거나
신앙생활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암과 같은 불치의 병에 걸리게 되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불평입니다.
하나님이 실수했다는 겁니다.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런데 이 말을 잘 분석해 보면,
죄를 지었으면 그에 대한 형벌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일을 당할만큼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는 잘한 일만 계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하나님 앞에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잘한 일이 많은가? 잘못한 일이 많은가?
잘한 일에 대해서 칭찬받고, 잘못한 일에 대해서 벌을 내리신다면,
나는 상 받을 일이 많은가? 벌 받을 일이 많은가?
잘못할 때마다 정당한 벌을 내리신다면, 여기에 살아남아 있을 사람이 얼만가?

사실 은혜를 깨닫고 보면,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감사한 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나는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면제받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송명희 시인은 자기를 그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하나님께 대해서
하나님은 공평하다고 노래를 부릅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17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집트의 왕 바로를 택하여 세우십니다.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비록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이 그를 택하셔서 사용하십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것은 꼭 선한 행위를 해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부르십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보세요. 야곱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은 에서보다 행위가 선하기 때문이 아니죠.
오직 부르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십니다.
귀하게 쓸 그릇도 만드시지만, 천하게 쓸 그릇도 만드십니다.
그러나 모두가 필요한 그릇인 것입니다. 쓰지 않고 잠시 보관하고 계실 수도 있죠.
하나님에게는 그러한 권한이 있으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불의하신 것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쓰시든, 우리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왜 나를 저렇게 쓰지 않으시냐고 불평하죠.
나는 다 준비가 되었는데, 왜 하나님만 그것을 모르고 계시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옳으십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몸부림을 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높일 자를 높이시고, 낮출 자를 낮추십니다.
하나님은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되는 것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전도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해서 부흥이 온다면, 우리는 그 부흥이 하나님 때문이 아니고
자기의 기도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약삭빠른 사람은 금방 ‘그럼 기도 할 필요가 없구나’ 이렇게 생각하죠.

여러분! 그런 말이 아닙니다.
내 기도 때문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부흥을 주셔야 부흥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누구에게 부흥을 주십니까?
사모하는 사람에게 입니다. 그것을 열망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실 때 주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4:4)
하나님께 감사하시고 은혜만 구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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