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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례를 받으매 (행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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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를 받으매 (행 2: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세례(밥티조-baptized)는 고전 헬라어 에서는 잠그다, 물들이다(밥토)의 강의형으로 '담그다'(사람을 물에 빠뜨리거나 배를 침몰 시킴으로) '멸망시키다'를 뜻했습니다.
밥티조가 일반 헬라어에서 간혹 의식적인 목욕에 사용된 증거가 있는데 아마도 이 말이 소멸 또는 멸망시킨다는 개념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헬레니즘에 있어서 의식적인 목욕은 엘류시스 제의(Eleusinian cults), 애굽의 종교, 이시스(Isis) 예배, 신비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의식의 기초가 되는 관념은 씻고 깨끗케 하는 일입니다. 물을 비롯한 여러 액체들이 신 앞에서 불결을 씻어 버리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관념은 물은 생명을 주므로, 나일강 같은 물에 상징적으로 빠짐으로 생명이 소생(부활)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물에 빠짐으로 물에 빠진 자는 신과 연결되고, 그리하여 신성을 부여 받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정화의 사상은 강하지만, 제의적이며, 도덕적이었기 때문에, 예를 들면 플라톤, 필로, 요세푸스 등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밥티조 자체가 제의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70인역본의 용법에는 4회만 나오는데 그중 왕하 5:14에서는 중간태로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서 7번 목욕한 것에 대해 사용되었습니다. 이 경우는 멸망에 대한 암시가 전혀 없고 정화에 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후기에 이 단어를 의식적인 정화인 목욕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반대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유대 문헌과 기독교 문헌에서 밥티조는 (물에) 담그다, 가라 앉히다를 의미하며, 세례를 나타내는 전문용어가 되었습니다.

은유적으로 구름과 바다에서의 이스라엘의 세례(고전 10:2), 예수님의 죽으심을 세례로 보는 사상(눅 12:50), 특히 바울이 세례를 그리스도와 더불어 매장되고 부활하는 것으로 묘사한 표현은 이 견해와 일치한다고 봅니다.
  쿰란 종파의 신자들은 정화를 위해 실제로 물에 들어갔습니다.

신약성경의 용법은 밥티조는 신약성경에서 세례를 나타내는 전문 용어로 사용되어 요한의 세례, 예수님의 세례, 기독교의 세례에 대하여 사용되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메시야의 출현을 준비하는 또는, 그리스도의 길을 여는 강력한 메시야적 각성 운동입니다.
이 세례는 죄 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입니다.

(막 1:4)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막 1: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이러한 의미에서 이 세례는 유대인의 하나님께로 "돌아감"(회개, 곧 회심)을 표하는 것이며, 그를 참회하는 백성에 참가시켜 그에게 용서와 정화를 보증해 줍니다.
이 세례는 메시야의 세례 받을 준비를 하는 세례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세례는 메시야께서 시행하실 성령과 불의 세례를(막 1:4) 예상하고 기대하며 천국을 보증합니다.
사람들은 죄를 자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마 3: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 입니다.

기독교의 세례는 예수님의 구속적 행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은 죄악된 인간들과의 예수님의 연대성을 증명하심이며 또한 실행하심입니다.

(마 3: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마 3:14)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마 3: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은 그가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헌신과 복종하심입니다. 그것은 모든 신적 제도 및 의식을 승인하고 하나님의 모든 의로운 교훈을 따르려는 그의 준비(혹은 결심)를 보임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신 모든 것은 예수님이 인간과 그 죄악된 세상과 운명을 같이 하셨기 때문에 행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은 그가 메시야로서 자신을 자기의 거룩한 사명에 헌신하여 그의 백성 및 인류와 일체로서 그들의 죄를 지며 그들의 죄를 씻어버림입니다.

  기독교의 세례입니다.

기독교 세례는 매우 일찍부터 실행되어 교회의 선교 시작부터 복음 선포와 함께 한 것으로 보입니다(행 2장).
이것은 명백히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에 따름입니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기독교 세례에 대한 누가의 이해는 행 2:38에 나타납니다.
(행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세례는 회개의 세례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즉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그리고 그의 이름을 사용하여 행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는 자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릅니다.
(행 22: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이는 자신이 그 분께 속했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그 이름이 그에게 붙여진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죄의 용서"와 성령의 은사를 얻고자 함입니다.
이 표준으로부터 여러 가지의 변화가 나왔다는 사실은 변화 시기의 상황과 성령체험의 다양성을 반영합니다.

(행 8: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행 8:15)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행 8: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행 8:17)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행 10:44)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행 10: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행 10: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행 10:47)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행 10: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행 19: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행 19: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행 19:3)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행 19: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행 19: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행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행 19: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바울의 세례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갈 3:27은 중요합니다.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세례는 "그리스도와 합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신자를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관련시킵니다.
(갈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이 기본적인 견해로부터 바울 서신에 나타나는 세례에 다른 모습들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와 합하는"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는" 세례입니다.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세례는 신자를 그리스도의 구속적 행위와 연결시킴으로 골고다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의 죽음이 되며, 그리고 세례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진 삶의 종말 곧 죽음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시작을 함께합니다.
그리스도와 합하는 세례는 곧 교회(Church)와 합하는 세례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합하는 세례는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의 세례입니다.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왜냐하면 성령과 그리스도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그리스도와 합하는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죽으시고 의를 위하여 다시 살아나신 그 모범을 따르는 새 생명을 위함입니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그리스도와 합하는 세례는 그리스도의 날에 계시될 나라에서의 삶을 위함입니다.
(고후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엡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그리스도와 합하는 세례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함께합니다.
(고전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대체로 다른 사람들이 세례를 주도록 허용하였습니다
(고전 1:14이하). 이것은 세례를 과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의 기능을 뚜렷하게 합니다. 세례는 은혜의 복음의 구체화이며 은혜의 복음을 고백하는 가장 중요한 기회이니 곧 하나님과 회개하는 죄인 사이의 관계 회복의 정점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기 때문에(갈 3:27),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구속적 행동 가운데서 인간을 위해 역사하시고 이 행동들에 의해 주시는 모든 것이 사도의 기록들에는 세례와 결합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서의(롬 6:1이하; 골 2;11이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죄의 용서와 죄 씻음(행 2:38; 행 22:10), 성령을 주심(행 2:38; 고전 12:13), 그리스도의 지체에 참여함(고전 12:13; 갈 3:27), 성령으로 인하여 새로워 짐(딛 3:5),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요 3:5)이 포함됩니다.

이 가르침을 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사도의 기록들에서 이러한 그리스도의 은혜들과 그의 구원의 은혜가 믿음에 의해 주어진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엡 3:17), 그의 죽음과 부활에의 참여(갈 2:20; 갈 5:24; 골 2:12), 용서와 깨끗케 하심(요일 1:9), 성령의 은사(갈 3:2, 갈 3:14),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됨(요 1:13), 하나님 나라에서의 생활(요 20:31)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믿음을 위한 하나님의 행동과 세례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행동을 일치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 믿음에 은총을 주신다는 것은 세례의 맥락에 속하는 것이며, 세례시의 하나님의 은사는 믿음과 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믿음을 위한 하나님의 행동과 세례시의 하나님의 행동을 이처럼 일치시키는 것은 벧전 3:21의 세례에 대한 정의에 나타나 있습니다.

(벧전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이곳에서 세례는 구속자와 복음에 근거하여 구속자를 알리는 회개자를 위한 시험의 장소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곧 사도행전은 세례시 하나님의 행동에 관한 모든 언명들은 구원과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유를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는 점입니다.

뉴질랜드의 원주민 피지족들의 생활을 연구한 선교사의 기록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원주민들이 사는 동네 한 가운데에는 죽이는 바위 (Killing Stone)이라는 바위가 있다고 한다. 이 바위는 우리나라 단두대라는 것과 역할이 비숫한 것이다. 이 죽이는 바위(Killing Stone)는 아주 무서운 사형 방법의 하나이다. 죄가 많은 죄인은 이 큰 바위에 묶어놓고 머리를 짓눌러서 죽이며 흐르는 피를 닦아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 참혹한 광경을 보여줌으로써 죄에 대한 경고를 대신한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온 선교사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해서 예수를 믿게 하고 세례를 줄 때, 그 죽이는 바위 앞에서 주었다. 그 바위에서 피를 보게 하고 "자, 옛 사람들은 이렇게 죽습니다."하며 세례의 의미를 지혜로운 방법으로 인식시켰다. 이 선교 방법은 대표적인 케이스로 알려지고 있다. 그 문화권 속에 알맞게 지혜롭게 대행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기능대체(Functional Substitute)라고 한다. 어쨌든 옛 사람이 완전히 예수와 함께 죽고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을 세례라 한다.

초대 교회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사도들이 말씀을 선포할 때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합니다.
세례는 교회 성원이 되는 공적인 표이며 부활의 주님이 명하신 교훈입니다. 이를 행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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