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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장자다 (창 25: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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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장자다 (창 25:27-34)

하나님도 다루기 어려운 사람, 하나님께서 복을 주고 싶어도 복을 줄 수 없는 사람들의 유형이 몇 가지 있다고 합니다.

첫째 소달구지 형입니다. 누군가 끌어주면 덜커덩 거리고 가지만 아무도 끌어주지 않으면 꼼짝 않고 서 있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꼬리연 유형입니다. 꼬리를 흔들고 높이 높이 올라가다가 어느 날 보면 땅바닥에 곤두박질 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고양이 유형입니다. 고양이는 머리에서 꼬리 쪽으로 잘 쓰다듬어 주면 야옹 야옹~ 좋아하며 따릅니다. 그러나 거꾸로 털을 쓰다듬어 올리면 아무나 할퀴고 달려듭니다. 주인도 모르고 사람을 할퀴어 버리지요. 잘 쓰다듬어 주고 돌보아 주면 야옹거리고 따르다가 자기 뜻에 안 맞으면 아무나 할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다루기 힘드시겠지요.
네 번째 문제 학생 유형입니다. 지각 조퇴하기 좋아하고, 걸핏하면 휴학하고 다른 교회로 전학 가고 안되면 퇴학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 유형은 크리스마스 츄리에 붙어 있는 꼬마 전구형입니다. 깜빡 깜빡 거리고 있는데 켜진 것인지 꺼진 것인지,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신앙의 유형이 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복을 받지 못한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 내가 받은 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그래서 마침내 그 복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런 신앙 유형의 한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에서라는 인물입니다. 반면, 복이 무엇인지 알았던 사람, 그 복을 얻기 위해서 몸부림했던 사람, 받은 복을 지키기 위해서 가슴에 부둥켜안고 숨을 거둔 사람이 야곱입니다.

이 두 사람의 아버지는 이삭입니다. 이삭은 마흔에 결혼을 했으나 이십년 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60세에 쌍둥이를 얻었는데 큰 아이는 붉은 털복숭이로 태어나서 붉다라는 뜻으로 에서라 이름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아이는 형의 발뒤꿈치를 붙들고 태어났습니다. 남을 걸어 넘어지게 하는 자라는 뜻으로 야곱이라 이름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창26장 27절에는 이렇게 문을 열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이 말씀은 에서와 야곱의 직업을 설명해줍니다. 지금은 2만 가지가 넘을 정도로 굉장히 세분화되어 있습니다만 이 당시의 직업은 세 가지 정도였습니다.

그 첫째가 사냥꾼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사'자 돌림의 직업, 성공한 정치인, 유명한 연예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나 할 수 없어요. 사냥을 하려 하면 신체가 건장해야 하고 힘이 있어야 되고 용맹스러워야 합니다. 더구나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습니다. 노련한 사냥꾼이란 말이지요. 유명 연예인이나 '사'자 돌림의 직업을 가진 사람 가운데도 더 노련하고 인기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당시 사냥꾼 중에도 더 뛰어난 사냥꾼이었다는 것입니다. 동네 처녀들이 에서에게 시집가는 것이 꿈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에서가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사냥감을 잡아서 동리에 들어오면 동네 처녀들이 마을 입구까지 나와서 에서! 에서! 환호를 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두 번째 직업은 목축이나 농사꾼이 되는 겁니다. 평민들, 중산층입니다.
제일 인기 없는 직업이 집에서 살림하는 남자입니다. 동네 처녀들이 얘기하다가 "야곱한테나 시집가라"고 하면 욕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드라마나 영화의 첫 부분에는 대게 주인공은 초라하게 등장하지요. 반대로 악역을 맡은 사람은 무대에 아주 화려하게 등장하지요.

본문 27절에 보면 야곱은 초라하게 등장합니다. 부엌에서 불 때는 아이 정도로 등장하지만 에서는 아주 멋있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28절에 보면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라고 되어있어요.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큰 인물, 즉 아브라함 같은 사람을 대하면 그 믿음이 너무 너무 크기 때문에 흉내 낼 엄두가 나지 않아요. 출애굽의 영웅 모세는 그 인물의 스케일이 너무 크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바라볼 때마다 좌절감 같은 것이 생기게 됩니다.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 같이 하늘에서 불을 내리기도 하고, 하늘 문을 닫기도 하고 열기도 하는 능력의 선지자들을 만나게 되면 기가 죽어서 도무지 흉내 낼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더더구나 사무엘이나 요셉 같은 인물은 평생 살면서 흠도 티도 없었어요. 깨끗하게 살아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면 오히려 낙망을 하게 됩니다. 언제 나는 저런 사람을 본받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야곱이란 인물을 보면 좀 만만해요. 야곱의 삶을 보면 나하고 비슷한 데가 많아서 '아 나도 복 받을만 하다' 자신감이 생깁니다. 어떤 때는 야곱보다 내가 나은 것 같아서 하나님께 물어봐요. "하나님 어쩌시려고 저런 야곱 같은 인물을 선택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얼른 가르쳐 주시지요. "너 같은 인물도 선택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야곱을 보면 친밀감을 느낍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고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는데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태중에서 쌍둥이 아이들이 토닥토닥 싸우고 있었습니다. 본문 조금 앞 22절에서 리브가가 하나님께 물었어요. "하나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23절에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두 민족이 네 안에 있구나. 형이 아우를 섬기게 될 것이다." 나는 형을 선택하지 아니했고 아우를 선택했다. 리브가는 이 말씀을 기억하고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이 야곱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의 무대 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것인가? 경외감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야곱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아버지 이삭은 대단히 감정적이고 육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맛있는 고기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았습니다.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에서를 사랑했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무관심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별미가 좋아서 에서를 사랑하는 그런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재미있는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29절-30절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피곤하다는 말이 두 절에 두 번이나 나오지요. 이 말은 에서라는 인물은 배가 고프면 눈에 보이는게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 살아가다 조그마한 문제라도 생기게 되면 눈에 보이는게 없이, 신앙이고 예배고 생각하지 않고 코앞의 문제만 해결하기에 급급한 존재가 에서였다는 것이지요. 배가 몹시 고픈데 마침 야곱이 팥죽을 끓이고 있습니다.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팥죽이 폭닥폭닥 끓고 있는 겁니다. 팥죽을 한 그릇 달라 해야 하는데 너무 배가 고프니까 팥죽이란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거 붉은 것 한 그릇 다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나 야곱이란 인물은 오랫동안 장자의 명분에 대한 욕심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내가 장자의 명분을 받아야 되는데, 내가 하나님한테 믿음의 큰 복을 받아야 하는데, 믿음의 큰 그릇이 되어야 하는데, 이런 열망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기회가 왔을 때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는 것이지요.

31절에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고 했습니다. 에서는 이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어요. 장자의 명분이 눈에 보이는 것입니까? 손에 잡히는 것입니까? 등기에 올려놓는 거라도 됩니까? 장자의 명분이 있다고 해서 사업이 잘되는 것도 아니고 사냥이 잘 되는 것도 아니지요. 세상 사람들하고 다를 게 별로 없어요. 있으나 마나 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믿음이라는게 그렇습니다. 믿음이 있다는 게 눈에 보입니까? 손에 잡힙니까? 호적등본 올리듯 믿음을 등본에 올릴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가끔 우리는 이 믿음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지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하고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지요.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이 얘기는 에서만 요구받은 것이 아닙니다. 지나간 세대의 모든 신앙인들이 끊임없이 받았던 도전이지요. 지금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이 받는 유혹이지요. 또 앞으로 오고 오는 세대에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끊임없이 이 도전을 받게 될 것입니다. "너의 장자의 명분을 팔라" 현실에 어려움이 있을 때에, 가정에 문제가 생겼을 때, 직장에 갈등이 생겼을 때, 사업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에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네 신앙을 팔라!" 신앙이 밥 먹여 주냐? 예수가 밥 먹여 주냐? 너의 장자의 명분을 팔아라. 신앙을 팔아라.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팔아라. 너의 은혜를 팔아라. 덕을 팔아라. 사랑을 팔아라. 영원을 팔아라. 상급을 팔아라. 말씀을 팔아라. 기도를 팔아라. 예배를 팔아라. "너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이 도전이 끊임없이 우리 앞에 던져집니다.

에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무슨 얘기야? 장자의 명분을 팔다니? 내 목이 만개라도 난 그걸 팔 수 없어." 그래야 했는데 32절에 보면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경망스럽게 말합니다. 현실을 과장하고 부딪힌 문제를 과장하고 있습니다. 인생 살다보면 문제에 부딪히고 온갖 난제에 부딪힙니다. 그때에 문제를 긍정적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판단하고 긍정적으로 말할 수도 있고 또 얼마든지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부정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말이 얼마나 자기를 속이는 것인지 모릅니다. 내가 죽게 생겼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말하고 아무렇게나 판단하고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No. 그렇지 않습니다. 배고프다고 금방 죽지 않습니다. 밥 한 끼 굶었다고 절대 죽지 않습니다. 잠시 후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팥죽 먹을 거예요. 조금만 참으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죽게 생겼다니요. 영적인 눈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현실의 문제를 과장합니다. 자기가 당한 문제를 과장합니다.

그래서 기껏 하는 얘기가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32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입니까? 에서에게 다른 무엇이 그렇게 소중했단 말입니까? 고기 한 근이 귀했을까요? 아니면 팥죽 한 그릇이 귀했습니까? 그것이 인생의 전부입니까? 에서는 지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장자의 명분은 대단히 유익한 것입니다. 장자의 권세는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장자의 명분은 가문의 족보를 이어가는 권세를 말합니다. 원래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에서를 낳고' 이렇게 성경이 기록돼야 하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에서의 하나님' 이렇게 씌여져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에서는 빠지고 야곱이 들어갑니다. 구원의 족보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는 권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구원의 반열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천국 백성의 권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장자권은 가문의 재산을 물려 받는 권세입니다. 아버지 재산의 두 몫을 받을 수 있는 권세입니다. 가보가 있을 때에 그것을 먼저 가질 수 있는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장자의 권세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권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주실 어마어마한 영적인 유산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자의 권세라는 것입니다. 장자권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아무렇게나 취급하고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자권은 축복의 권세를 이어가는 권세입니다. 장자가 손을 들어 축복하면 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습니다. 장자가 매면 가문의 사람들 가운데 저주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손끝과 입술에 축복의 권세가 있다는 말입니다.

또 한걸음 나아가 장자권은 제사권입니다. 장자는 집안 사람들이 죄를 범했을 때에 죄를 전부 가슴에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양을 잡아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 집안에 아무개가 이런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율법을 파괴했습니다. 십일조를 도둑질했습니다. 부모를 거역했습니다. 거짓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속죄의 제사를 드리면 죄지은 자들의 죄가 사함 받게 됩니다. 장자는 또 모든 식구들의 기도제목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장자권은 곧 기도의 권세를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어머 어마한 장자의 명분, 장자의 권세가 있는데 에서는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하며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모르고 살았던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유익을 알았던 야곱! 그 명분의 권세를 알았던 야곱, 기회가 왔을 때 이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32-34절)

어쩌면 교활하고 간사하기 짝이 없는 야곱, 남의 배고픈 약점을 이용해서 팥죽 한 그릇 가지고 장자의 명분을 가로챕니다. 그러나 오늘 이 사건을 두고 하나님이 뭐라고 평가하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경은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기록하느냐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했다." 신령한 것의 소중함을 알았던 야곱을 하나님이 사랑했다. 그러나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던 에서를 가볍게 여기셨던 것이지요. 이게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히브리서 12:16절은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되지 말라" 이어지는 17절 "기회가 지난 다음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에서의 이 행동은 팥죽 한 그릇에 구원을 판 것입니다. 믿음을 판 것입니다. 예수를 판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지적이요 평가입니다.

야곱의 교활하고 간사한 행위을 배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아무렇게나 취급하지 말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세상 살아가다 어떤 어려움이 있고, 어떤 위기와 고난에 부딪힌다 할지라도, 어떤 댓가를 지불할지라도 나는 예수를 팔지 않는다. 믿음을 배신하지 않겠다.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고 살지 않겠다. 죽어도 말씀대로 산다. 예수 이름으로 살고 예수 이름으로 죽을 것이다. 이것이 야곱의 가치관입니다. 변두리 인생이 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구원 공동체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겠다. 믿음의 도리를 배반하고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 땅의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장자입니다. 여러분의 손끝에 축복의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의 입으로 말미암아 복이 내리고 저주가 내리게 됩니다. 우리에겐 하나님 나라 상속권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들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모든 권세와 하나님의 모든 자원들을 내 것으로 받게 됩니다. 우리는 인생의 문제가 있을 때마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이제부터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내가 즉시 시행하리라" 기도의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예배권이요 장자의 권세입니다.

장자권의 엄청난 권세를 알고 그 권세를 누리며 살았던 사람 그가 야곱이요 이 땅의 진정한 장자입니다. 야곱이 나중에 큰 부자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형 에서가 군대를 이끌고 자기를 죽이러 온다는 소문이 들려옵니다. 형에게 많은 예물을 갖다 바칩니다. 낙타와 소와 그 외 어마어마한 예물을 형에게 갖다 바칩니다. 그러나 그는 형에게 장자의 명분만은 돌려주지는 않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가슴에 부둥켜안고 살고 장자의 명분을 가슴에 부둥켜안고 죽어갑니다. 이것이 장자로 죽어가는 삶입니다.

여러분! 민족에도 장자 민족이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어찌 이렇게 조그마한 땅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허리마저 뚝 잘려 있습니다. 지하자원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군사력이 강한 나라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안에서 위대한 나라입니다. 예수 안에서 위대한 민족입니다. 예수 안에서 위대한 시대를 이끌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위대한 민족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마지막 때에 쓰임 받는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사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은 누가 뭐라 하더라도 한국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위대한 나라, 이 민족은 장자민족입니다.

이 한국 땅에 많은 교파들이 있지만 장로교회는 장자교파입니다. 지금까지 민족 역사를 이끌어 왔던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는 장로교회입니다. 그 중에서도 대한예수교 장로회 저희 교회는 통합측에 속한 교단입니다. 저희 교단 총회에 참석해 보니까 입만 열면 장자교단, 장자교단 그럽니다. 그것은 교만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우리교단이 바로 서야 우리민족이 바로 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교단이 바로 살아야 되고 우리교단이 부흥되어야 한국교회가 살아나는다는 이런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쓰는 용어가 장자교단이더라구요.

이 땅에 대한예수교장로회가 생긴 이후 우리 교단은 언제나 중심에 서서 걸어왔습니다. 신학적으로 늘 중심에 서는 통전적인 신앙, 중용의 신학을 지켜왔습니다. 좌측의 신학과 우측의 신학을 모두 끌어안고, 그렇다고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잡고 중용의 길을 걸어왔던 신학입니다. 합동교단과 나누어진 이후 한 번도 교단이 분열된 적이 없습니다. 이 땅 어느 도시에 가든지 늘 중심에 서서 그 도시를 섬기는 교회들은 저희 교단의 교회입니다. 총회를 하는데 신학적인 갈등이 있고 치리의 문제가 생기고 재판해야 될 일이 생깁니다. 정책을 결정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많은 논쟁을 하고 싸움을 합니다. 어떤 때는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얼굴을 붉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결론을 내리는 것을 보면 언제나 바르고 균형잡힌 결정을 내립니다. 한 주간동안 교단이 이렇게 바른 결정을 하고 균형잡힌 결정을 하고, 민족을 품고 몸부림하는 것을 보면서, 이 교단에서 목사가 되고 목회를 하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교단도 장자교단이 있습니다. 다른 교단도 다 자기 역할이 있지만 저희 교단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일산에서도 천명 이상 모이는 교회가 열 교회 가까이 되는 것 같아요. 그 가운데 8-9개 정도는 저희 교단 교회입니다. 동안교회, 예일교회, 한소망교회, 승리교회, 든든한교회, 충신교회, 명성교회가 있습니다. 파주로 들어가면 광성교회가 있습니다. 이런 교단에 속한 교회들이 바르게 서야 합니다. 바른 목회 철학을 가지고 바른 정신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구현하고 실천하는 교단이 될 때에 도시를 살릴 수 있고 민족을 살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장자교회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아직도 개척교회인줄 알았어요. 한번도 큰 교회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교회보다 많이 모이는 교회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큰 건물의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신학생들이, 우리교파의 신학생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한소망교회의 목회 비전과 한소망교회가 추구하는 목회 원리를 따르고 배우기를 그렇게 열망할 수 없습니다. 영향력 있는 많은 한국교회가 있지만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부흥하는 교회 모델을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심장 속에 있는 초대교회 모형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리더입니다. 이 시대에 아무렇게나 살아가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신앙생활하기 좋은 교회가 아니라 영향력 있는 교회를 만들어야 됩니다. 이 비전을 신학생들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교회는 장자교회구나. 우리끼리만 잘먹고 잘살아야 될 교회가 아니구나. 지금까지 은혜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한다면 이제는 민족을 살리는 교회로 나누면서 살아야 되겠구나. 도시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의 자원을 나누어야 되겠구나. 비전채플을 세우는 것도 우리끼리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자고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장자교회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가 비전채플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비전채플을 통하여 통일된 이후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북한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땅 끝까지 전하는 어마어마한 일들을 감당하는 그 날이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교회도 장자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장자 성도가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나 혼자 예배드리고 싶으면 드리고 시간 바쁘면 안나오고 그게 아닙니다. 예배의 장자의식을 가져야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예배는 타협하지 않는다. 세상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예배에 성공자의 자리에 앉아 있겠다. 예배에 타협하고 살지 않겠다. 이게 예배의 장자들입니다.

우리교회는 전도의 장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서 내 주변에 한 영혼이라도 건지기 위해서 땀 흘리고 눈물 흘리고 피 흘리고 희생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서 몸부림하는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도의 장자들입니다.

집안에 할 일이 많습니다. 자녀들을 돌봐야 됩니다. 얼마든지 나를 위해서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섬기는 자리가 있으면 앞 다투어 나와서 교회를 섬깁니다. 섬김과 사역의 장자들이 있습니다.

한소망교회는 물질 헌신의 장자들이 있습니다. 열심히 땀 흘려 돈을 벌고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사업을 합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고 정직하고 타협하지 않는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삽니다. 그리고 나머지 물질을 가지고도 깨끗하게 살 것이며 나를 위해서만 쓰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의 비전을 위해서 쓰겠다하는 작정을 하고 사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물질 헌신의 장자들입니다.

You can be a leader! 여러분 모두 이 교회의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 비전과 주님의 비전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지 비전의 장자들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장자입니다. 큰 비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종재기 마음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큰 그릇이 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넓히시기를 바랍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입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여러분은 장자입니다.

불평하면 졸병이 되고 감사하면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 매사에 무관심하고 뒤에 서서 구경꾼 노릇만 하면 졸병이 됩니다. 언제나 중심자리로 달려가시기를 바랍니다. 구원의 중심, 공동체의 중심, 비전의 중심으로 달려들어가는 장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예배가 끝나고 나면 명절에 가족들을 만나게 되겠지요. 장자의식을 가지고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어떻게 기도하느냐. 내가 어떻게 축복하느냐. 어떻게 살아가느냐.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어떤 향기를 보이느냐에 따라서 우리 가문이 복을 받기도 하고 우리 가문이 저주를 받기도 한다는 장자 의식을 가지고 사시길 바랍니다.

나는 맏형이 아니지만 육신적으로 보면 나는 동생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내가 장자입니다. 축복의 권세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집안에서 화목을 깨뜨리지 마십시오. "역시 우리 동서를 봐 예수를 믿으면 저렇게 믿어야지." 그게 장자입니다. 화목을 깨뜨리지 마세요. 믿지 않는 남편한테 가서 인내하십시오. 참으십시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시아버지 시어머니 앞에 가서 참으십시오. 본이 되십시오. 섬기며 화목하게 지내다 오십시오. 여러분은 장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분들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야 되는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느니라. 주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맏아들이 되셨느니라. 십자가 감당하면 맏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버리면 졸병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순교의 자리에서도 원수를 용서했습니다. 장자로 죽어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회를 섬기면서 가족들을 만나면서 나는 장자다. 내게 축복권이 있다. 내게 예배권이 있다. 나는 마음이 큰 사람이다. 믿음이 큰 사람이다. 내가 장자다. 장자로서 이 세상을 나아가기 바랍니다. 장자로서 가족 안에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장자다. 내가 장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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