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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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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19-29)

「어떤 대학교수가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종이를 한 장 주면서 자신의 일생을 통해서 꼭 가지고 싶은 것을 적어보라고 하였다. 이 제자는 평소에 자기가 가지고 싶었던 것을 그 종이에 열심히 적었다. 건강, 지식, 명예, 사랑, 권력, 돈…… 이러한 것들을 적어 교수님에게 보여드렸다. 교수는 그가 적은 내용들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더니 그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자네가 여기 적어온 것들은 매우 훌륭한 것들일세. 그리고 일리 있는 내용일세. 그러나 자네는 여기에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렸네. 그것이 없으면 자네가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모두 가졌다 해도 오히려 그것은 참기 어려운 고통거리가 될 지도 모르네.”

이 청년은 깜짝 놀라면서 “교수님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반문하였다.
그러자 그 교수는 연필로 그 청년이 적어온 목록에 Ⅹ로 그어버리고 그 밑에다 ‘마음의 평화’라고 크게 써 주었다.
이 청년은 크게 깨달았다. 건강보다, 지식보다, 명예보다, 사랑보다, 권력보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마음의 평화’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후로 이 청년은 평생 동안 그 어떤 것보다 ‘마음의 평화’를 소중히 여기며 살았고, 나중에는 ‘마음의 평화’라는 책을 썼는데 수백만 부가 팔렸다. 그 청년의 이름은 바로 ‘죠수아 리브만’이라는 사람이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세 번이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19, 21, 26)
「평강」이라는 말은 평화, 평안, 화평이라는 말이다.

수 천년동안 강대국들의 침략과 약탈에 시달려온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도 서로 만날 때마다「Shalom」이라는 인사를 주고받는다. 즉,「평화」「평안」이라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궁극적으로는 평화, 평안이다. 돈 가지고, 권력가지고, 지식과 명예로 평화와 평안을 사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처럼 찾고 있는 진정한 평화와 평안을 찾지도, 누리지도 못하고 있다. 오히려 세상은 점점 더 불안해지고, 험악해져 가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돈이나, 권력, 명예, 지식, 결혼 그 자체에 평화가 없다는 증거이다.

한 쌍의 젊은이의 결혼을 주례하던 주례자가 서약을 하게 되었다. “신랑은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신부를 사랑하며 백년가약을 맹세 하겠습니까?” 그러자 신랑이 “2-3년은 살아봐야 알겠는데요. 그리고 저 이의 있습니다. 사실 저는 대머리여서 가발을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고 찬송을 불렀다. 평화를 주려고 주님은 오셨으나, 인간은 불안과 갈등, 초조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존 가드너」라는 사람은 「자아의 재생」이라는 책에서 이러한 말을 하였다.「만일 행복이 물질적인 것을 갖는 데서 온다고 생각하면 미국에 사는 사람은 다 행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는데 우리의 비극이 있다.」

지난 2007년 9월 20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글이다. 2002년 미국의 사업가인 잭 휘태커(59세)씨는 무려 3억1490만 달러에 달하는 파워 볼 복권에 당첨되었다. 이것은 복권 역사상 가장 최고의 금액이었다. 우리 돈으로 3 천억 원이 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복권이 당첨된 이후로 5년 만에 빈털터리가 되었고, 460건의 소송에 연루되었으며, 음주와 도박, 연애행각, 음주운전 등으로 잇따라 불행이 겹쳤다. 그는 “복권 당첨 후 나는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었다. 그 놈의 복권이 나를 망하게 했다.” 라고 탄식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은「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가 없다」라고 말씀하였다.

C 폴록=행복이란 과잉과 부족의 중간에 있는 조그마한 역이다.

우리는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며 불안한 삶을 살아간다.
사람에게는 참으로 평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평화는 아무 데서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왜 이 세상에는 참 평안이 없는가?

그토록 사람들이 갈망하고, 평화와 평안을 위하여 많은 조약이 체결되고, 유엔이 창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세상은 날이 갈수록 불안하고, 전쟁의 위험은 더욱 높아져 가고, 하루도 마음 놓고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었는가?

어떤 사람의 입에서도 ‘평안하다, 라는 말을 들어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①우리 마음에 있는 죄 때문이다.
죄는 평안을 파괴한다. 죄가 자리 잡고 있는 한, 우리의 마음에 또는 인간세계에 평안이 있을 수 없다. 죄는 사람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모든 행복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마음속에 죄가 자리 잡고 있는 한, 돈 방석, 권력의 의자, 지식의 최고봉에 앉아 있어도, 그 심령이 평안할 수 없다.
죄인은 개 짖는 소리에도 놀라고, 경찰만 보아도 가슴이 철렁하기 마련이다.
영국의 속담에「죄인은 생쥐 발자국 소리에도 놀란다.」라는 말이 있다.
시38:3=「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죄악은 우리의 심령 속에서 평안을 방해한다. 죄라고 하는 것은 범하기 전에는 좋아 보이고, 멋있어 보이고, 행복해 보여도, 일단 죄를 범하고 나면 그 생각이 얼마나 잘못 되었는가를 알게 되고,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 것이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 같이 될 것 같았고, 선악과가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워 보여 먹고 싶은 생각과 충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그것을 따먹었다.

그런 다음 그가 행복하고, 평안했는가? 마음에 평화가 있었는가? 평안은 모두 사라졌다. 두렵고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고, 숨었다. 그렇다고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감추어지고 숨어지는가?

「미국의 유명한 뉴스 해설가인 폴 하비(Paul Harvey)는 추운 지방에 사는 Eskimo인들이 늑대를 어떻게 잡는가? 에 대한 특별한 방법을 이렇게 말했다.
Eskimo인들은 늑대를 잡기 위하여, 날카로운 칼날에 짐승의 피를 묻힌 후, 그것을 얼린다. 칼날에 피가 얼어붙으면 그 위에 다시 피를 묻히고 다시 얼린다. 이렇게 여러 차례 반복을 하면 나중에는 칼날이 얼어붙은 피 속에 숨겨지게 된다. 이 칼을 늑대들이 잘 다니는 곳에 칼날이 위로 오게 묻어둔다. 늑대는 피 냄새를 맡고 곧 다가와서 얼어있는 피를 혀로 핥기 시작한다. 계속 핥으면 마침내 날카로운 칼날이 나타나지만 늑대의 혀는 이미 차가운 얼음을 핥는 중에 감각이 없어져 자기의 혀가 갈라져서 피가 줄줄 흐르는 것도 모른 채 계속 열심히 핥는다. 늑대는 마침내 피를 많이 흘려 쓰러져 죽는다는 것이다.」

죄라고 하는 것이 이처럼 지을 때는 그것이 얼마나 나쁜 것이라는 생각도, 감각도 없이, 죄짓는 재미에 빠져, 열심히 죄를 지으나, 결국은 자기를 망하게 하고야 만다.
그러므로 죄악을 품고 있는 한, 참 평화가 없는 것이다.

②문제를 자기가 지고 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절대자가 아니며, 초능력자가 아니다. 인간은 상한 갈대처럼 한 없이 약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다보면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이런 문제를 자기가 짊어지고 가지 않는다. 하나님께 모든 삶 전체를 맡기는 것이다.
빌4:6-7=「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짐을 주님께 맡기는 사람은 행복하다.

「어느 무더운 여름 청년 한 사람이 예배당 앞을 지나다가 호기심에 끌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다. 강단 뒤로 까만 휘장이 쳐져 있고, 그 위에 하얀 글씨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마11:28의 성경말씀이 쓰여 있었다.
청년은 그 글씨를 보고 ‘이곳은 예배당이 아니라 휴게소로군’하면서 코웃음을 치고 예배당을 나와 자기의 갈 곳으로 가버렸다.

그로부터 1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청년의 생활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산다는 것이 너무너무 힘이 들었다. 모든 삶의 의욕이 사라졌다. 죽고만 싶었다. 청년은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졌다. 그는 죽을 곳을 찾아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공교롭게도 그가 가고 있는 길은 자신이 바로 1년 전에 지나갔던 바로 그 길이었다.
한참 가다보니 십자가 종탑이 보였다. 그는 문득 1년 전에 자신이 그곳에 들렸던 일과 성경구절이 생각나게 되었다.
청년은 교회로 들어가 목사님을 만나고, 그 성경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주님을 영접하였다. 청년은 새 사람이 되었다. 죽으러 가던 그는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다. 후에 크게 성공하였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내 짐을 내가 지고 가려고 할 때, 평안도 평화도 없다. 주님께 맡겨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곳에 참된 평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어진 평화는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다.
이 평화는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평화이다. 어떤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변함없는 평화이다.


2.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이러한 평강을 주시는가?

①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사람이 이 평화를 누릴 수 있다.(19-2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 것은 자신이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또한 다시 사셨음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함이었다.

이때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으나 그의 부활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고,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했지만 아직까지도 확신이 없는 반신반의의 상태에 있었다.

이때에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못자국과 창 자국을 보여주시면서「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자가 그 믿음의 결과로 받는 주님의 선물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흔들림이 없는 신앙을 가진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평화의 샘이 솟을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가 나를 살렸다. 나의 모든 죄를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깨끗케 하였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주님이 대신 죽으셨다.
이와 같은 사실을 의심 없이 믿고 살 때,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원망과 불평, 불안한 마음은 사라질 것이며, 구원의 기쁨과, 감격, 천국의 소망으로 가득 찰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다. 기독교의 두 기둥이다. 이것이 없이 기독교는 존립할 수 없다.

「인도의 Nallamalam 이라는 곳에서 선교하던 한 선교사가 이런 간증을 했다. 인도 여인 한 사람이 매우 남루한 옷을 입고 늘 예배에 참석하였다. 예배의 분위기에 적절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많은 지장을 주어 하루는 용기를 내어 그 부인에게 물었다. “왜 항상 그 옷을 입고 예배에 참석합니까? 다른 옷이 없습니까?” 여인이 대답하기를 “지금 제가 입고 있는 옷이 내게는 제일 좋은 옷입니다.” 그래서 선교사가 다시 묻기를 “당신은 그렇게 가난하십니까?” 정말 그렇게 가난하다면 자비로라도 옷을 한 벌 사주고 싶어서였다.

그러자 그 여인이 대답하기를 “선교사님 그렇지 않습니다. 저에게도 전에는 보석도, 돈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친척 한 사람이 재산을 모두 빼앗아 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내가 믿는 예수만 버리면 빼앗아간 돈과 보석들을 모두 다시 돌려준다고 했습니다.”

선교사가 다시 그에게 말하기를 “그러면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다.
이 때 그 여인은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비록 가난하게 살아도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이 많은 돈을 가지고 불신자로 사는 것보다 훨씬 낫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이러한 확신과 감격 속에 살았기 때문에 매우 남루한 옷을 입고, 예배에 참여하고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마음에 평화가 충만했던 것이다.

여러분이 진정한 평안과 평화를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을 확신하기 바란다.

②생명을 살리는 운동을 하는 사람이 이 평화를 누릴 수 있다.(21)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도 너희를 보낸다.” 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증인으로 보내신다는 말씀이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평화를 누릴 것이다.

제자들은 선교사명을 부여 받았다. 이 세상에서 주님의 사역은 이제 다 끝나고, 이제 제자들에게 그 사역을 위임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해야 할 사명이 그들에게 부여된 것이다.

“복음”이란 “복된 소식”이다. 결국 “복음은 평화의 소식”이다. 그래서 엡6:15에 「평안의 복음」이라고 하였다.
복음이 평안의 소식이라면, 이것을 전하는 사람도 역시 평안을 마음껏 누릴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증거 하는 사람,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성도들은 열심히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생명을 살리는 운동에 힘을 써야 한다.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럴 때 하나님의 평화가 넘칠 것이다.

눅10:에는 예수님께서 70인의 전도 특공대를 파송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눅10:17에 보면 이 70인이 전도를 마치고 돌아와 보고를 하는데 “기뻐하며 돌아왔다”고 하였다. 전도하는 자의 기쁨이다.
여러분 모두도 이러한 기쁨과 평화를 소유하시기 바란다.

③신앙을 회복하는 사람이 이러한 평강을 누릴 수 있다.(26-27)
주님께서 이 자리에 다시 오신 것은 도마의 잃어버린 신앙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였다. 도마는 여러 다른 제자들의 중언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아니하였다.

성경은 믿음이 귀하다고 말씀한다. 계2:9에 믿음이 있는 자를「부요한 자」라고 말한다. 벧후1:1에서는 믿음을「보배」라고 하였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보이는 믿음이나 만져지는 믿음이 아니다. 사실 가장 좋은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공기, 사랑, 천국, 하나님, 성령 등은 귀한 보배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

느낌이나 눈에 보이는 것은 수시로 변한다. 그러므로 도마처럼 무엇을 보고 믿으려 한다면 그러한 신앙은 올바른 신앙이 될 수 없으며, 결국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고후4:18=「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벧전1:8=「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그런데도 도마는 믿음을 잃어버리고, “내가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돈을 잃어버렸을 때 마음 아파한다. 건강을 잃어버렸을 때는 더욱 마음 아파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을 때는 더욱 비통해 한다.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찾고자 애쓴다.
그러나 믿음을 잃어버리고 나서는 무감각하게 지낼 때가 많이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 잃어버린 믿음을 다시 찾아야 한다. 피조물이며 죄인 된 인생의 진정한 평안과 행복은 믿어야 할 것을 믿을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심 많은 도마가 신앙을 회복하였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해소되었다. 그러자 그는 예수님에게「예수님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였다.

“돈을 잃은 것은 조금 잃은 것이고, 명예를 잃은 것은 많은 것을 잃은 것이고, 건강을 잃은 것은 전부를 잃은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믿음을 잃어버리면 영원을 잃어버린 것이다.” 세상에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는가?

이런 믿음의 사람에게는 하늘의 평안과 평화로 가득 찰 것이다.


결론.

세상은 우리를 평안하게 해줄 수 없다. 돈, 권력, 명예가 우리를 평안하게 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평안하게 하실 수 있다.
요14:27「내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계시면서 온갖 인간의 고통을 다 당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다 아신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를 평안하고, 세상을 평화롭게 하실 수 있다.

「영국의 헨리 8세가 밤에 런던시를 배회하다가 야경에게 붙잡혔다. 신분을 밝히지 않았으므로 경범죄로 투옥되어 하룻밤을 감옥에서 지내고, 이튿날 석방되어 궁전으로 다시 돌아왔다. 궁전에서는 왕이 갑자기 없어져 큰 소동이 일어났다. 헨리 8세는 자기가 냉방에서 하루 저녁 고생을 하고나니 감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알게 되어 그 다음날부터 감옥마다 석탄을 넉넉하게 보내주고 죄수들에게 빵을 푸짐하게 주라고 하였다.」

자기 자신이 경험해보니 그 고통을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도 바로 그런 분이시다.
세상이 주는 평화와,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질적으로, 시간적으로, 양적으로 다르다.
세상에 시달려 피곤에 지친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따뜻한 평안과 평화가 넘치기를 소원한다.

이러한 평안과 평화는
①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확신하는 사람에게 임한다.
②한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복음증거에 열정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임한다.
③잃어버린 신앙을 다시 회복하는 사람에게 임한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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