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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과장이 없는 신앙 (막 8: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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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이 없는 신앙 (막 8:22-26)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왜 예수님은 이 소경을 데리고 마을 밖으로 나가셨습니까? 또 예수님은 왜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어보셨습니까? 그리고 왜 이 소경은 단번에 낫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 소경이 눈을 뜬 다음에 왜 예수님은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상은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입니다.

  먼저 왜 예수님은 이 소경을 데리고 마을 밖으로 나가셨을까?
  예수님은 서커스 같은 분위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구경꾼들이 모이는 것을 예수님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쇼를 원치 않았습니다. TV 광고에 쇼를 하라는 광고가 있던데 그것은 예수님의 의중과는 아주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은 스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과 하나님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도 이와 같은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고 또 그것을 구합니다. 그런데 만일 오늘날 우리 가운데 소경이 눈을 뜨는 것과 같은 기적이 일어난다면 여러분이나 저나 그것을 올바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교만해 지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서커스 같은 그런 장소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한 번 이런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 다음에도 계속 이런 기적이 일어나게 되기를 요구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묘한 것입니다. 차라리 그런 일이 없었다면 기대를 하지 않지만 한 번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것이 계속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그런 것이 일어나지 않으면 마치 하나님이 떠나간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떠난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강박관념을 낳습니다. 그래서 이런 기적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시늉을 할 수도 있습니다. 위선을 낳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든 사정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소경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 그를 데리고 마을 밖으로 나가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너희가 기도할 때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도 당신이 행하신 선한 일을 사람들 앞에서 선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은밀한 중에서 선한 일 하기를 원하셨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 왜 예수님은 소경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습니까? 궁금하니까. 궁금하니까 물으신 것인데 예수님이 소경에게 안수하신 목적은 눈을 뜨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경이 눈을 뜰 줄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같으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무엇이 보입니까?’라고 물어보는데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이렇게 대답한다면 얼마나 창피하고 얼마나 민망하겠습니까. 아마 저 같아도 소경이 안수를 해달라고 하면 그냥 안수하고 떠나가지 ‘무엇이 보이십니까?’라고 차마 묻지 못할 것입니다. 민망하니까. 그럴 배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연히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실 줄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경의 입에서 무슨 대답이 나올지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그 소경이 ‘아무것도 안보입니다.’라고 대답했더라도 예수님은 당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침착하게 다시 안수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에요.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첫째, 예수님은 당신의 명성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의 실적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으셨습니다. 야구선수들에게 타율이라는 것이 있지요. 예컨대 2할 2푼이라고 하면 그것은 22%의 타율을 말합니다. 백 번 타석에 서면 스물두 번 안타를 친다는 얘기입니다. 그것만 해도 상당한 것이지요. 예수님에게는 100%의 타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안수한 사람은 다 나았습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게 되지 않았을지라도 예수님은 당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실적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을 돕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은 당신의 명성을 세우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사람들을 돕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만일 목사인 제가 설교를 잘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빗나가는 것입니다. 저의 목적은 여러분이 은혜를 받는 것이고 여러분이 믿음에 도움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제가 설교를 잘 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설교를 잘하느냐 못하느냐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은혜를 받고 여러분의 믿음이 잘 자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당신의 실적이나 명성, 당신 자신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오직 이 순간에는 소경을 돕는 것이 예수님의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또 하나 이 질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어떤 결과를 강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소경에게 눈 뜰 것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눈 뜨기를 믿으셨지요. 눈 뜨기를 바라셨지요. 그러나 눈 뜰 것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 소경에게 결과를 강요하셨다면 이 소경은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소경이 눈을 뜨기는 떴는데 부분적으로 떴습니다. 아직 제대로 다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이 말은 눈이 보이기는 보이는데 아직 부분적으로 보인다는 얘기입니다. 그 사실을 솔직하게 대답한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에게 조금이라도 어떤 특정한 결과를 강요하는 면이 있었다면 이 소경은 ‘다 잘 보입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 외로 대답하는 것은 민망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솔직하게 자기의 상황을 얘기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과거에 한국 교회에도 긍정적인 언어를 강조하고 긍정적인 언어를 가르쳤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 아직도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낫지 않았더라도 ‘나는 나았다, 나는 복을 받았다’ 이런 식으로 입으로 일부러 긍정적인 고백을 해야 잘 믿는 것처럼 강요하고 요구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았으면 나은 것이고, 안 나았으면 안 나은 것이고, 반만 나았으면 반만 나은 것이지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불필요한 짐을 지우는 것이고 사람을 솔직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그것이 믿음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더 가능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질문하셨을 때 그대로 대답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보이면 보인다, 안 보이면 안 보인다, 반만 보이면 반만 보인다고.

  사실 이 소경이 과거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면 잘 보는 것을 무엇으로 판단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어떻게 해야 다 볼 수 있는 것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평강이라는 것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진짜 평강이 와도 그게 평강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한 번도 거룩하게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거룩하게 사는 것을 스스로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천국에 가 본적이 없는 사람이 천국에 간다면 거기가 천국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 사실 누가 그것을 알려주기 전까지는 내가 한 번도 그것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설령 하나님이 그것을 주시더라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뭐를 간절히 요구하고 간절히 기도하기는 하는데 하나님이 응답하셨는지 안 하셨는지 모를 경우도 많아요.

  세 번째로 왜 이 소경은 단번에 낫지 않았느냐? 예수님이 안수를 하셨는데도 왜 단번에 낫지 않았을까?
  저는 이 소경이 단번에 낫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문제라는 것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문제가 일순간에 해결될 때도 있습니다. 병이 일순간에 나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안 그럴 때가 더 많습니다. 일순간에 해결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이 소경이 단번에 낫지 않은 이유가 본인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습니까? 아니에요. 본인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많은 문제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발전해서 생긴 것이라면 그것이 해결되는 것이 일순간에 될 수 있겠습니까? 과정이 필요하지요. 내가 갖고 있는 잘못된 생각이든 세상적인 욕심이든 두려움이든 의심이든 미움이든 그게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벗어버리는 것도 어느 정도 과정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잘못된 길로 살아온 것이 시간이 걸린 것이라면 그것을 바로잡는 데도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 속에서 병이 들고, 병이 낫는 것도 인생 속에서 나아야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살다보면 병이 생기는 것처럼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사는 중에 병이 낫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천국 갈 때까지. 그렇기 때문에 한번 기도해서 낫지 않으면 두 번 기도하면 됩니다. 두 번 기도해서 낫지 않으면 세 번 기도하면 됩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소경을 위해 두 번째 안수하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고 귀찮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귀찮아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그것을 민망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단번에 낫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문제가 속히 해결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아, 내가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가? 이렇게만 생각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단번에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은 일순간에 임합니다. 마치 양초에 불을 붙이면 그 순간부터 빛을 발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믿으면 그 순간에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변하는 것은 일순간에 되는 것이 아니고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이 소경과도 같아요. 이 소경이 처음에는 뭔가 보이기는 보이는데 다 보이는 게 아니고 그래서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그러니까 소경이 과거에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무를 본 적이 있으니까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고 대답했을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안수했더니 밝히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변화하는 것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왜 당신은 교회를 다니는데 이 모양이냐고 그 사람을 탓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단번에 다 천사처럼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리한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변화는 그렇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좀 더 여유를 주어야 됩니다. 서로에게 여유를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여유를 허용해야 됩니다. 서로에게 예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해야 됩니다. 아직도 그 사람은 갈 길이 멉니다. 다행이지요. 그게 아니고 갈 길을 다 갔다면 이제는 천국 가는 길만 남았습니다. 다 배웠으니까. 그러나 아직 하나님이 우리를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이 땅에서 배워야 될 것이 있고 또 이루어야 될 것이 있고 해야 될 일이 있고 갚아야 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숙제가 남아있습니다. 학생에게 숙제가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에게도 예수 안에 사는 사람에게도 숙제가 있는데 이 숙제는 책을 읽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믿음으로, 섬김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으로 하는 숙제입니다. 이 숙제가 저에게도 있고 여러분에게도 있습니다. 저의 숙제는 교회를 섬기는 것이고 교회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제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것도 저의 숙제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설령 목회를 안 하더라도 인생이 할 일이 없느냐? 아닙니다. 할 일 많습니다. 저는 목사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목회를 하지 않더라도 믿음을 지키고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예수님을 따라야 될 숙제가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플러스 목회라는 사명이 주어진 것인데 여러분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매일매일 여러분의 알림장을 체크하셔야 됩니다. 내 숙제가 뭔지 알아야 숙제를 할 수 있을 게 아닙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맡기신 숙제, 신앙의 숙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에게는 숙제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소원이요, 바람이요, 뜻이지만 우리에게는 숙제가 되어서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 살아야 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 이유, 내가 추구하는 목표, 그것이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시간을 주시고, 또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네 번째, 예수님이 왜 이 소경에게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을까?
  저의 질문은 이 소경을 집으로 보내셨다고 했는데 한 번도 눈 떠서 집에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집을 찾아갔을까 궁금합니다. 아마 그 마을이 작은 마을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서울 변두리에 데려다 놓고 네 집을 찾아가라고 하면 아마 몇 달 걸릴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은혜를 받은 다음도 중요합니다. 이 사람이 눈을 뜨는 것도 중요하지만 눈을 뜬 다음에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 하는데 은혜를 경험한 다음에 지혜가 없든 절제하지 못하든 겸손하지 못하든 그래서 그 받은 은혜를 쏟아버릴 수도 있고 오히려 은혜 받은 다음에 시험에 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애써서 주신 은혜가 무익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하게 하신 일이 선한 결과를 갖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소경을 고쳐주신 것으로 끝내신 것이 아니고 그 이후에 그 소경되었던 사람이 마땅히 할 바를 지시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에요. 이것이 지혜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내 소원을 이루는 것뿐만이 아니라 내 소원을 이룰 줄 당연히 믿고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실 줄을 믿고 내 소원을 이룬 다음에 내가 어떻게 할 것이냐 그것도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소원을 이루고 난 다음에 예수님 없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냐? 다시 옛날의 생활 습관으로 돌아갈 것이냐? 그래서는 안 됩니다. 내 소원을 이루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눈뜨기 전에도 예수님을 사모하고 눈 뜨는 과정에서도 예수님을 신뢰하고 눈을 뜬 다음에도 예수님께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참 목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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