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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집을 채우라 (눅 14:15 ~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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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을 채우라 (눅 14:15 ~ 24)

작금에 한국교회는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각 교단 총회를 전후하여 어딘지 모르게 교단적으로 대외적 활동이 적지않게 위축된 듯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측가능한대로 아프가니스탄 사태와 무관하지 아니합니다.
교계에서는 지금은 한국교회가 당분간 잠잠해야한다고 하소연을 합니다. 이와 병행해서 우리 귀에, 눈에 익숙하지 못한 교수들과 목사들이 T.V 앞에 나와서 자신의 소신을 거침없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것을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① 공격적인 한국교회 선교를 자제할 것
② 종교적 인프라가 구축된 곳에는 포교활동을 하지 말 것
③ 회교권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을 가능한 철수시킬 것 등입니다.
이쯤 되고 보면 초기 한국교회의 선교 열정은 옛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목사가 목사를 폄하하는가 하면 철저한 주관적 논리로 비판의 강도를 높여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면서 마태복음 10장 16절에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7절에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11-13절에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비유를 통해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최근 부정적인 선교에 대한 책망과도 같습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기쁨과 즐거움을 혼인잔치에 비유했습니다. 잔치 중에 잔치는 혼인잔치입니다. 여기 혼인잔치는 구속사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다음 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① 강권 ② 내집 ③ 데려다가 ④ 채우라는 것입니다.
아낭카손 에이셀데인 히나 게미스데 무 호 오이코스( ) 이 말을 직역하면 '그래서 너는 들어오라고 강요하라 내 집이 채워지도록'입니다.

Ⅰ. 이 집은 큰 잔치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4장 16절에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왜 큰 잔치라고 했습니까?

1) 이 잔치는 임금이 배설하는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2장 2절에 『어떤 임금』이라고 하였습니다.

2) 이 잔치는 왕자(아들)를 위하여 배설한 잔치이기 때문 입니다.
마태복음 22장 2절에 『자기 아들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3) 이 잔치는 왕궁에서 배설한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장 16절에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성전을 가리켜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4) 이 잔치는 모든 것이 준비된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4장 17절에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는 것은 잔치 집에 손님이 와서 먹고 즐길 준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든 준비를 이미 선행(先行)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이 이미 성취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내가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고 했습니다.
임금이 그의 아들을 위하여 왕의 궁궐에서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놓고 베푸는 잔치이기 때문에 큰 잔치일 수밖에 없습니다.

Ⅱ. 이 집은 아들을 위한 혼인잔치에 사람 을 초청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2절에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16장 10절에 『즐거움과 기쁨이 기름진 밭에서 떠났고 포도원에는 노래와 즐거운 소리가 없어지겠고 틀에는 포도를 밟을 사람이 없으리니 이는 내가 그 소리를 그치게 하였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천국을 잔치하는 집으로 비유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천국은 곧 지상의 교회로 비유했습니다. 그렇다면 곧 교회로의 초청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절에 『혼인잔치에 오라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4절에 『혼인잔치에 오소서』라고 했습니다.

본문 14장 17절에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라고 했습니다.
이 비유의 배경은 유대인들이 생각하기를 메시야가 이 땅에 오면 큰 잔치를 배설하게 되는데 그때는 유대인들만 참석하게 되고 이방인들은 제외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팔레스타인 지방의 잔치 풍습은 혼인잔치를 하기 1년 전에 약혼식을 합니다. 이 약혼식 1년 후에 결혼식을 한다고 초청장을 사람들에게 보내게 됩니다. 사실상 결혼식하기 1년 전에 초청장을 보내게 되는 셈입니다. 이러한 시간적인 충분한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참하면 큰 결례가 됩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생각하면서 본문을 보면 설교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1) 복음으로서의 초청이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초청에 거부하는 유형들을 보게 됩니다.

① 부동산에 대한 집착 때문에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본문 14장 18절에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재물에 집착한 나머지 반드시 거부할 수 없는 초청에 거부하게 됩니다. 그래도 자신의 양심이나 전통적인 사회적 통념에 비추어서 송구스럽다는 표현이 빠지지 않는 것을 보면 자신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② 동산에 대한 집착 때문에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본문 14장 19절에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소를 동산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동산, 부동산으로 분류하듯이 부동산과 다른 동산 하나를 분류하기 위함입니다. 이 사람 역시 소 다섯 겨리를 사서 부리기를 해 보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더 관심이 있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도 초청을 거부하는데 대한 자신의 입장이 초연하거나 자연스럽지 못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세였습니다.

③ 쾌락에 대한 집착 때문에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본문 14장 20절에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죄는 얼마간의 육체적 쾌락을 동반합니다. 죄가 얼마간의 육체적 정신적 쾌락이 없다면 죄를 짓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육체적인 쾌락이 복음을 거부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고 말았습니다.

④ 강포한 자들의 극에 달하는 도전이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5-6절에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라고 했습니다.
육체주의, 쾌락주의가 방해받는다는 이유 때문에 강포로 응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본래의 목적을 저버림이 없이 복음에로의 초청을 계속합니다.

2) 중단되지 아니하는 계속적인 초청입니다.

① 성 안에서의 초청입니다.
본문 14장 21절에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집 주인이 노한 정도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마태복음 22장 7절에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닥칠 비극적인 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전쟁터를 연상케 하는 진노의 결과입니다. 시내거리(플라데이아스, )는 다양한 사람들이 다니는 길입니다. 골목(뤼마스, )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이 다니는 좁은 길입니다. 여기 가난한 자와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은 인간적으로 멸시 받는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돈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육신생활을 영위하기 조차 힘들기 때문에 밭이나 소를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동시에 이들은 장가를 들 만한 입장이 못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이 잔치에 초청되었습니다.

② 아직도 많은 자리가 남아 있는 초청입니다.
본문 14장 22절에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초청했지만 자리는 남아 있는 잔치집입니다. 이것은 큰 잔치에 걸맞는 자리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거할 곳이 많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얼마든지 초청된 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자리가 있는 곳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의 배를 불리는 양식이요 축복입니다.

③ 성 밖에서의 초청입니다.
본문 14장 23절에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했습니다.
거리와 골목이 성 내의 영역이라면 길과 산울가는 성 밖의 영역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 안에서의 초청은 유대인 가운데 소외된 자들이고 성 밖에서의 초청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백성 중에서의 초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충만한 수와 이방인의 충만한 수, 곧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찰 때까지입니다. 로마서 11장 12절에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1장 25-27절에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저희 죄를 없이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Ⅲ. 먼저 믿은 자들이 강권하여 주인의 집(교회)을 채워야 하는 잔치입니다.

본문 14장 23절에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했습니다.
『강권하여』란 말은 강제력(compulsion)으로 동원하라는 의미와 함께 사람을 데려올 때 강한 설득력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인내하고 가르치고 권면하고 설득시켜서 데려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강제 동원보다 한 차원 높은 모집방법입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하기를 임금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왕자를 위한 혼인집의 종들입니다.
마태복음 22장 2-3절에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많은 사람을 교회로 불러오는 종들입니다. 강권하여 주인의 잔치집을 채워야하는 종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매일매일 예수 잔치하는 기쁨이 충만한 장소입니다. 박장대소하며 즐거워하는 잔치입니다. 교회는 풍성한 천국 잔치로 즐거워하는 곳입니다. 이 잔치는 하나님의 말씀의 잔치입니다. ② 이 잔치는 십자가의 잔치입니다. ③ 이 잔치는 영생의 잔치입니다. ④ 이 잔치는 생명의 떡과 생명의 잔을 나누는 잔치입니다. ⑤ 이 잔치는 모든 것이 준비가 된 잔치입니다. ⑥ 이 잔치는 축복의 잔치입니다.
이 잔치는 성부 하나님의 잔치입니다. 성자 예수님의 잔치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잔치입니다.

인간 타락 이후로 하나님은 여러 시대를 통하여 여러 모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를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확증하셨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이 성취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잔치에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 은 구원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초청하여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님과 혼인시키는 혼인 잔치하는 곳입니다. 초청하는 종들이 거절당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존심 상하고 두들겨 맞아도, 아니 죽임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중단하지 말고 계속 초청해야 합니다. 말이 안 되는 말을 할 때는 차라리 귀를 막고 그를 위해 기도하면서 계속 시도해야 합니다.
예전에 믿다가 어떤 모양으로든지 낙오된 자들도 초청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불신 가정에서 오래도록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왔던 자들도 초청해야 합니다. 아무리 불러와도 교회의 자리는 남아 있습니다. 강권하여 교회를 채우는 작업이야말로 먼저 믿은 우리들의 종된 사명이요 하나님의 일꾼들의 자세입니다.

2007년도 1.1.1.1운동은 어느덧 종반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운동의 결실을 풍성하게 허락하실 줄 믿습니다. 따라서 금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초청되는 갈보리교회의 일대 수적인 부흥의 해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요청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요청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어떠한 경우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은 옛날에 하던 방법이나 생각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방법은 우리를 망하게 하는 방법이요,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방법이요, 더 이상 진보가 없는 방법입니다. 타성에 젖은 신앙생활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분명히 알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을 부흥케 하는 전사들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교회를 사람들로 먼저 채우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집을 채우는 왕도는 어떤 경우든지 강권입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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