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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 : 공의 속에서 베푼 사랑 (창 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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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 공의 속에서 베푼 사랑 (창 20:1-18)

본문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초기 시절에 애굽에서 범했던 실수를 기억나게 합니다. 그 때는 ‘언약의 수호자’가 누군가에 대해서 생각했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 20여 년이 지난 어느날 그랄에서 비슷한 사건이 반복되었습니다. 이 사건에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세 가지 측면에서 12장에서 아브라함이 허물을 남겼던 사건보다는 18장에서 소돔 고모라를 심판하셨던 사건과 더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공의의 시행이 주제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둘째는 소돔 고모라의 멸망이 가정의 파괴(성도덕의 문란)와 관계가 있었던 것처럼 아비멜렉의 경우도 가정파괴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아브람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도고했던 것처럼 아비멜렉을 위해서도 도고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셨다는 공통점 때문입니다.

소돔의 심판 이후에 아브라함은 남방, 곧 네게브 지역으로 옮겨서 그랄에 거했습니다(1-2). 그곳 사람들도 하나님에 대해 두려워함이 없기는 소돔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강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고 소개했습니다(10-13). 실제로 사라가 이복누이이긴 했지만 이제는 자신 아내가 되었는데도 사실의 일부를 살짝 숨김으로써 안전을 도모하려 한 셈이지요. 일종의 ‘선의의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큰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간 것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려서 드디어 좀 있으면 약속의 자녀를 얻게 되는데, 참으로 큰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셨습니다. 사라를 데려간 그날 밤에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3) 아직 사라를 가까이 하지도 않았던 아비멜렉은 억울한 마음으로 물었습니다. “주님, 주께서 의로운 한 민족을 멸하시렵니까? 아브라함이 저에게, 이 여인은 자기 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이 여인도 아브라함을 오라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깨끗한 마음으로 떳떳하게 이 일을 하였습니다.”(4-5, 표준새번역) 그러자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6-7)

한 고개를 넘으면 또 한 고개가 있고 그 고개 뒤에는 또 한 고개가 있는 것처럼, 인생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문제들을 극복해가는 삶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릴 때는 어려서 걱정되고, 철이 들면 사춘기라 걱정되고, 사춘기 지나면 대학 입시 가 걱정되고, 대학 들어가도 취직이 걱정되고, 취직해도 결혼이 걱정되고, 결혼 후에도 이혼과 명퇴가 걱정되고, 아무튼 끝이 없습니다. 저는 선교회 간사 10년의 기간 동안에 수백 명의 대학생들로부터 그들의 인생에 대한 간증을 들어왔습니다. 그들 중에서 아무 고민도 없는 사람, 아무 문제도 없는 가정은 전혀 만나보질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해서 이런 인생의 문제들에서 열외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의 근원이라는 약속을 받았어도 그의 앞길이 항상 탄탄대로는 아닙니다. 그분의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불신 세상 속에서 거룩하게 살려고 하다 보면 손해도 더 많이 볼 수 있고, 어려움도 더 많이 겪기가 쉽습니다. 어떤 때는 큰 산조차 거뜬히 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조그마한 산 앞에서도 두려움에 떨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당면한 위기를 우선 넘겨야겠다는 조급한 마음이 생겨서 인간적인 꾀를 내기도 하고 요령도 부려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이 ‘소돔 고모라의 멸망’과 같은 큰 사건에서만 시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소하다고 여겨지는 개인의 문제에까지도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십니다. 아브라함이 예전과 똑같은 잘못을 범했지만, 그것은 20여 년 만에 반복된 일입니다. 그보다 더 자주 동일한 허물을 반복하는 우리로서는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에 있었던 아브라함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의의 거짓말 정도쯤이야’ 눈감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선의의 거짓말도 원칙적으로 죄이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충분히 신뢰하지 못한 죄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꾀로 살아가려 할 때, 자기 꾀에 자기가 당하도록 두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공의의 시행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깨끗한 마음으로 떳떳하게”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고 했습니다. 물론 성경의 원칙을 따르면 일부일처를 벗어나는 그의 행동 자체가 깨끗하지도 않고 떳떳한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 시대의 윤리기준으로 보자면 왕이 여러 여인을 취하는 것쯤은 충분히 용납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사라가 유부녀인 줄 몰랐습니다. ‘모르고 행한 일쯤이야’ 충분히 눈감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사회가 용납하고, 자기 양심에 위배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기준에 위배된다면 죄입니다. 특히 아비멜렉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이루시려는 뜻을 부지중에 훼방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은혜’라는 말이 오늘날 성도들 사이에 값싸게 사용될 때가 있습니다. ‘은혜로 합시다’라는 말이 깐깐하게 굴지 말고 죄를 슬쩍 눈감아 주자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공의를 추구해야 할 하나님 백성의 태도가 아닙니다. 사회생활에서 지치고 피곤한 사람들에게는 쉼과 은혜가 되는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는 말이 ‘공의’는 말하지 말고 ‘사랑’만 말해야 된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사랑’만 외치면 복음을 값싸게 만들어버립니다. 십자가의 ‘공의’를 먼저 말해야만 복음이 복음다워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철저하게 공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공의가 시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이 베풀어지지는 않습니다. 공의를 빼고 사랑만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 아브라함에게도 공의로우셨고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도 공의로우셨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아브라함의 행동은 고의적이었던 반면에 아비멜렉의 행동은 고의적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의적인 죄에 대해서는 그 결과를 맛보도록 두셨고, 고의적이지 않은 죄에 대해서는 죄를 깨닫고 순종하도록 하셨습니다. 시행형태는 달랐지만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모든 죄에 대해 공의로 역사하셨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 모두에게 은혜로우셨습니다. 아비멜렉에게는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주셨고, 아브라함에게는 곤궁에 처한 그를 회복시키시고 자기에게 곤란을 가져다준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은혜의 형태는 달랐어도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은혜로 역사하셨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저는 무엇보다 한 영혼, 한 영혼을 순수하게 사랑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바르게 자라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을 더욱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다워져서 인격과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도록 기도해왔습니다. 또한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를 잘 살려서 교회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잘 드러낼 수 있도록 기도해왔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자식을 둔 아비처럼 이것저것 걱정도 많았습니다. 취직걱정, 시집 장가보낼 걱정, 자녀 양육 걱정, 한 사람 잘되면 다른 사람 걱정, 한 가정 잘되면 다른 가정 걱정이 머리 한 쪽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를 격려하고 나면 그 두려움이 제게 밀려왔습니다. 조급해하는 사람 진정시키고 나면 제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믿음을 가지도록 힘써 권면한 후에 제 마음에 믿음이 떨어졌습니다. 때로는 안타깝고 염려스러운 마음에 위로한답시고 했던 말이 오히려 상처를 주기도 했고, 저의 부족한 인격과 능력으로 인해 아무 말이 없었지만 상처가 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좋은 동기로 해도 성경적이지 않은 ‘인간적인 마음과 수단’을 선택하면 꼭 예상치 못한 다른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이 모든 허물과 실패 속에서 요한복음 15:5절이 진리임을 배웠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며,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저 회개한 후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맡기는 길밖에 없다는 것, 인간적인 꾀를 쓰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실 것을 믿고 기도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꾸 길을 막으실 때도 그것이 은혜의 한 표현이기 때문에 자기를 보다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 곤경에 빠졌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것이므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자기가 깨어지는 공의로운 징계의 아픔을 통해 깨닫게 된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공의 속에서 베풀어지는 사랑임을 보게 됩니다. 죄는 결단코 용서하지 않으시되 죄인에 대해서는 자비로우신 모습을 봅니다. 17-18절은 하나님의 그 공의와 사랑의 조화를 잘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그의 여종들이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있게 태를 열어 주셨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데려간 일로, 주께서는 전에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여자의 태를 닫으셨었다.”

공의 없는 사랑은 무례와 방종을 낳고, 사랑 없는 공의는 두려움과 외식을 낳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함께 알 때, 그분의 은혜를 바르게 누릴 수 있습니다. 은혜 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친근히 하면서도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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