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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망하는 사람들의 불행 (민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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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하는 사람들의 불행 (민 14:1-3)

『미운 오리 새끼』라는 안데르센의 동화가 있습니다. 그 오리 새끼는 너무 밉게 생겼습니다. 얼굴 모양도 다른 오리와 다르고, 몸체도, 날개도, 갈퀴도, 걷는 모양도 다릅니다. 다른 오리들이 볼 땐 전부 다 밉습니다. 그러니 그 미운 모습을 한 오리 자신은 자기가 얼마나 협오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하늘에서 멋진 백조가 내려옵니다. 그것을 보고 미운 오리 새끼가 ‘쟤들은 어쩌면 저렇게 멋질까’감탄하고 있는데, 백조가 다가와서 “너 왜 거기 있니? 넌 오리가 아니야. 넌 백조야. 이리 와”합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백조인 것을 모르고 오리들 사이에서 계속 미운 오리로 살아갈 때와 백조로서의 자신을 발견했을 때의 삶이 같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날마다 진리 안에서 강건해져 가는 내 속 사람을 발견해 가는 기쁨입니다. 믿음은 곧 자기 사랑, 자기 가꿈이 됩니다. 미운 오리 새끼였다가 자기가 백조인 것을 알게 된 백조가 계속 오리처럼 밉게 엉덩이를 뒤뚱거리면서 걷겠습니까? 하늘을 날지도 않고 계속 호수 위에서만 놀겠습니까? 백조처럼 걸음걸이도 우아하게 하고 한 번도 안 날아 봐서 날개가 아프지만 날개가 찢어지도록 힘을 다해 연습하면서 우아하게 나는 법을 배우는 등 자기를 백조로서 가꿔 갈 것입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내 자신, 진리를 좇아 사는 나의 속사람을 발견하면 그 다음부터 나는 그 속사람을 지성으로 가꾸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눈에 보입니다. 남들 보는 앞에서만 신실한 척하는 사람인지, 누가 보든 안 보든 정말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인지 다 압니다. 그 사람의 행동거지가 허세인지, 아니면 신실함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말만 안 할 뿐이지 다들 압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속으로 ‘저 분은 정말 진실한 믿음의 소유자’ 혹은 ‘저 분은 아직 아니야’라고 평가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나의 믿음을 본다는 사실입니다. 내색만 안 할 뿐, 다른 사람도 속으로는 우리의 믿음을 보이는 대로 다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40일 간의 가나안 정탐을 마친 12명 가운데 10명의 족장들은 가나안 땅과 그 거민의 강성함으로 인해 ‘메뚜기’ 같은 자신들은 결코 가나안을 정복할 수 없노라고 하는 비보를 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비보를 접수한 백성들의 자포자기적인 울부짖음과 원망을 다루고 있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의 불신앙적인 보고는 백성들에게 실망과 두려움을 안겨 주었고 그 두려움은 발전하여 지도자와 하나님을 원망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원망은 불과 같아서 모든 것을 태우고 삼키게 됩니다. 모두를 불행하고 하고 망하게 합니다. 결국 지옥으로 끌고 갑니다. 원망이 침투하면 사람의 마음과 인격과 생각과 언어와 삶이 마귀처럼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고 마귀의 앞잡이가 됩니다. 그것을 충성이라고 착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원망의 오리로 살아가지 말고 백조처럼 날아서 믿음과 감사와 긍정적인 세계로 옮겨져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믿음의 백조가 되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며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백성들을 원망케 했습니다
  본문 1절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10명의 부정적인 불신앙적인 보고를 듣고 온 회중이 밤새도록 통곡을 하였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통곡입니다. 그렇게도 원하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만 소망하면서 참아왔는데 그 땅에 들어갈 수 없다니 당연히 그럴 만도 합니다. 모세와 아론, 그리고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제외한 모든 백성들이 일제히 소리 높여 밤새도록 통곡하였습니다. 통곡도 상승 작용을 합니다. 불신앙의 바람이 이스라엘 전체를 휘몰아쳤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백성들의 비탄에 찬 반응에 대해 소리 높여, 부르짖으며, 곡하였다고 표현함으로써 그들의 울부짖음이 점차 고조되고 확산되어가고 있음을 시사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였고 불타는 심정으로 가슴을 치면서 몹시 애통해 하면서 아우성쳤다는 뜻입니다. 결국 그들은 완전히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밤새도록 절규하며 점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갔던 것입니다. 그들이 절망 가운데 오히려 하나님을 찾아 간구하기보다 자기 연민과 회한의 감정에 빠져든 근본적인 이유는 오직 약속에 대한 불신과 믿음의 결핍 때문이었습니다.

믿음 없이는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 사람들의 말을 듣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원망한 것은 극히 감정적이고 불신앙적인 모습입니다. 한 사람의 원망은 천 명 혹은 만 명을 원망케 합니다. 많은 사람을 죽이고 지옥으로 몰아넣습니다. 원망의 불은 쉽게 붙고 활활 타오릅니다. 원망의 불 속에서 빠져 나오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앉아 있다 보면 똑같이 원망꾼이 되는 것입니다. 원망의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 있는 결단과 지혜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느 날 노만 빈센트 필 박사가 열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맞은편에는 한 중년 부부가 앉아 있었는데 그 부인은 계속해서 이것저것 투덜거리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습니다. 좌석이 불편하다, 시트가 지저분하다, 청소도 제대로 안 돼 냄새가 지독하다, 심지어 승무원도 불친절하다고 갖은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이때 부인의 불평을 듣던 남편이 필 박사에게 인사를 건네며 자신들을 소개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변호사이고, 제 아내는 제조업자입니다.”
  필 박사가 물었습니다.
  “부인께서는 어떤 종류의 제조업에 종사하시는지요?”
  그러자 남편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제 아내는 항상 불평을 만드는 제조업자입니다.”
  나는 매일 갖가지 불평을 계속 찍어내는 제조업자는 아닙니까? 생각해 봅시다.

불평을 다량으로 만들어 내는 사람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요? 조금 힘들다고, 조금 어렵다고 불평하고 원망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감사하는 자세는 우리의 인생을 복되게 하지만, 불평하는 자세는 만사를 그르치게 합니다. 우리는 감사가 아닌 불평으로 일관한 이스라엘 백성의 어리석음을 통해서도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살이의 비참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노예 생활은 짐승처럼 취급받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사 애굽의 종살이에서 자유인의 신분으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얼마나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하는 일입니까? 그러나 그들은 홍해를 건널 때만 감사했을 뿐 가나안 땅을 향하는 동안 내내 광야에서 불평거리를 늘어놓았습니다. 불평과 원망은 불행과 저주의 연습이고 씨앗입니다. 반면 감사는 행복과 축복의 연습이고 씨앗입니다. 원망하고 사람들을 원망케 하는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 어떠한 가운데서도 감사하고 사람들을 감사케 하는 행복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지도자를 원망했습니다

  본문 2절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백성들이 출애굽의 두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 것은 배은망덕한 일인 동시에 두 지도자를 세우신 여호와의 권위에 도전하는 악행이었습니다. 이처럼 원망을 일삼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멸망당하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 중 조금만 나빠져도 습관적으로 죽음을 운운했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원망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모든 구원의 은총인 유월절 사건, 홍해 사건, 만나 사건을 업신여기는 처사인 동시에 자유와 생명을 향유할 가치가 없는 자임을 스스로 증거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역경에 처할지라도 생명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지혜이며 축복의 길인 것입니다. 우리는 죽더라도 신앙을 지키며 고난 가운데서도 끝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고 떳떳하게 살겠다는 긍정적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오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악하고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거세고 교묘한 악의 세력에 부딪쳐 희망이 무너질 때마다 ‘죽었으면 좋겠다’는 비탄조의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는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교훈 삼아 죽음을 논하는 비관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비관은 궁극적으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존재를 불신하는 죄악이 되어 말한 그대로 광야에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백성들을 잘 인도하고 섬겨야 합니다. 반면 백성들은 지도자를 존중하고 기도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원망은 신앙과 질서를 파괴하는 악한 행위입니다. 고라와 그의 일당들이 지도자를 원망하다가 땅이 갈라져 묻혀 죽게 되었습니다. 원망은 반역이고 죽음입니다. 사단은 원망으로 지도자를 흔드는 것입니다. 원망의 순간에 하나님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쓰실 때 꼭 광야로 부르십니다. 모세도 광야, 예수님도 광야, 다윗도 왕이 되기 전에 약 십 년 동안 사울의 칼날을 피해서 광야로 숨어 다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광야의 특징은 하나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풀 한 포기, 물 한 방울도 없기에 그곳에서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향한 시선으로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선을 그분께 고정시켜 주시기 위해 때로 우리 인생을 광야로 끌어가십니다. 믿음은 다루어짐입니다. 내 시선이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다면 나 같은 피조물은 절대로 하나님을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조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볼수록, 하나님에 대한 시선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에 의해서 다루어져야 할 존재(be controled)임을 알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하나님 다루는 기술을 얻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나의 재물이나 달란트로 하나님을 다루고 어르는 것은 ‘미신’입니다.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다룰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에 의해서 매일 다루어지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다루어져야 합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남과 지도자들을 원망하는 어리석은 삶이 아니라 악하고 부족한 자신의 존재를 바라보며 회개하고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구원과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축복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본문 3절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패역한 백성들의 억측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그 백성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여 당신을 중심한 복된 국가를 만드시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바로의 칼과 광야의 죽음의 갈증과 기아로부터 고비 때마다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보고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을 적대자, 살인자로 매도함으로써 씻을 수 없는 죄악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언행입니다. 진정한 자유와 선민으로서의 특권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노예근성의 발로입니다. 참 신앙인은 과거의 죄악 되고 비굴했던 생활에로의 회귀보다 고난스런 현실을 꿋꿋이 인내하는 가운데 끝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곳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폐나 지진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지하거나 정체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도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발전하고 진보하고 성장해야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신앙생활 수십 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주일성수, 십일조, 봉사를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 심히 부끄러운 것입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죽음의 삶이 아니라 가나안으로 전진하는 생명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사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다 버리고 하나님을 믿고 높이 찬양하기를 바랍니다.

  어떤 목사님이 미국 여행 후에 쓰신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 계시는 동안 어느 교인 댁에 기거하셨는데 한번은 그 부부와 함께 어떤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먼저 가고, 목사님은 그 부인인 집사님과 시간에 맞춰 파티장에 가려고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여집사님이 옷을 다 차려입고 나왔는데 집사님 가슴에 아주 멋진 목걸이 하나가 번쩍번쩍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농담을 하신다고 던진 말이 “그 목걸이 꼭 진짜 같네요.” 하였습니다. 이 말이 자기 입에서 나간 순간, 목사님은 실수했다 싶으셨습니다. ‘목사가 이런 농담하면 안 되는데… 진짜 같다는 얘기는 그 목걸이가 가짜라는 얘기밖에 안 되는데…’ 하고 생각했지만 이미 말은 나와 버린 후 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그 집사님이 화도 안 내고 까르르 웃었습니다. “목사님, 이게 가짜인지 어떻게 알았습니까?”하면서 말입니다. 집사님은 남편이 결혼기념일 같은 특별한 날 사준 보석은 외출할 때 안한다고 했습니다. 진짜 보석은 늘 집에 그냥 두고, 나갈 때 하는 것들은 다 가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목사님이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진짜를 가진 자는 상처받지 않는구나.’

  부자에게 가난뱅이라고 해 보십시오. 부자는 그 말에 상처 안 받습니다. ‘쟤가 뭘 모르네’ 하고 말 것입니다. 박사 보고 “이 무식한 사람아” 해도 상처 안 받습니다. 그런데 돈이 없는 사람에게 “이 가난한 사람아” 하면 상처 받습니다. 초등학교도 안 나온 사람에게 “이 무식한 사람아” 하면 상처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생활하면서 교우들끼리 주고받는 말에 상처 받는다면 아직 내가 진짜가 아닌 것입니다. 내 안에 최고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담겨 있음을 깨닫는다면, 도대체 이 세상 무슨 말이 내게 상처를 줄 수 있겠습니까? 누구, 무엇 때문에 상처 받거나 원망하지 말고 당당하게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떠한 경우에도 결단코 사람과 지도자와 하나님을 원망하지 맙시다. 이는 불행이고 지옥입니다. 언제 그리고 어디서나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와 찬양으로 축복과 승리의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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