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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에 이르는 길(3) : 장애물(2)-시기심↔관용 (민 1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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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이르는 길(3) : 장애물(2)-시기심↔관용 (민 12:1-16)

<'빗나간 모정': 텍사스 치어리더 스토리>
1990년대 초 텍사스에서 아주 기이한 살인 미수 사건이 있었습니다. 완다 할라웨이(Wanda Holloway)라는 백인 여성이 살인 청부업자를 고용해서 자기 딸의 친구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완다는 사춘기 시절 치어리더가 되려고 했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결혼한 뒤 완다는 자기가 이루지 못한 꿈을 딸 샤나(Shannna)를 통해서 이루고자 했습니다. 자신이 치어리더가 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한이 되었던 완다는 자기 딸에게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무용이며 체조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집에 사는 완다의 절친한 친구인 버나 히쓰(Verna Heath) 역시 자기 딸 엠버(Amber)를 치어리더로 만들기 위해서 여간 열심히 아니었습니다. 버나는 완다와 달리 대학 시절에 치어리더로 이름을 날린 적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자기 딸 역시 훌륭한 치어리더로 키울 비전을 품었습니다. 완다의 딸 샤나와 버나의 딸 엠버는 나이가 같은 데다가 엄마들과 마찬가지로 베스트 프렌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베스트 프렌드 사이라고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 라이벌 의식이 있었던 차에 그 지역 중학교에서 치어리더를 뽑는 선발 시험에 나란히 지원을 했습니다. 문제는 입단 테스트에서 버나의 딸 엠버는 남이 보아란 듯이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는데, 완다의 딸 샤나는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완다의 마음 속에 시기심과 분노가 불일 듯 일어났습니다. 바로 이웃집에 사는 베스트 프렌드 버나와 그녀의 딸 엠버가 기뻐하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두 집 사이의 우정이 깨졌습니다. 완다가 샤나에게 엠버와의 교제를 끊으라고 윽박질렀기 때문이었습니다.

완다는 샤나의 숙제며 모든 뒤치다꺼리를 다해주면서 다음 번 선발 시험을 기대했지만 결과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엠버는 치어리더 팀의 주장 자리까지 올라갔지만 샤나는 두 번째 테스트에서도 떨어져 연거푸 고배를 마셔야만 했습니다. 이제 완다의 질투심은 활활 타올라 폭발 일보 직전이 되었습니다. 너무 뛰어난 엠버가 바로 옆집에 사는 까닭에 샤나가 자신감을 잃어서 두 번씩이나 낙방했다고 믿었습니다. 

결국 완다는 유명한 청부 살인업자 테리(Terry)를 고용해서 엠버를 없애달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자라고 할지라도 13세된 소녀를 죽이라는 말에는 양심이 괴로웠습니다. 그리하여 테리는 거꾸로 완다같은 사람은 사회에서 영원히 매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힌 나머지 죽여달라는 상대방 엠버가 아니라 죽여달라는 고객 완다를 잡기로 결심했습니다. 테리는 녹음기를 몰래 숨겨서 완다와 나눈 살해 음모 일체를 남김 없이 녹취했습니다. 테리는 살인 음모에 관해 완다와 나눈 녹음 테이프를 경찰에 보냈고 완다는 즉시 체포되었습니다. 재판에 회부된 완다는 살인미수죄로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배심원 중에 한 사람이 집행 유예 중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6개월간 교도소 생활을 하다가 출소했습니다. TV 드라마와 영화로도 제작된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시기심'과 '질투심'의 차이는?>
행복에 이르는 길을 막는 두 번째 장애물은 '시기심'(envy)입니다. 비슷한 말로 '질투심'(jealousy)이 있습니다. 여러분, 시기심과 질투심은 어떻게 다를까요? 이 두말을 많은 경우 우리가 아무 구분 없이 쓰지만 엄밀히 말해서 시기심과 질투심은 서로 다른 감정입니다. 쉽게 말해서 시기심은 두 사람 사이에서 느끼는 감정이고 질투심은 삼각관계에서 발생하는 감정입니다. 시기심은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나 불특정 다수에게 느낄 수 있는 '일반 감정'인데 반하여, 질투심은 반드시 자신과 관계 있는 특정 인물을 향하여 느끼는 '특수 감정'입니다.

비근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가끔 TV를 보노라면 나보다 더 멋있고 더 많이 배우고 더 행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나와서 토크 쇼 같은 것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은근한 시기심이 발동할 때가 있지요. 그래서 채널을 다른 데로 휙 돌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제 경우에는 기독교 방송 TV에서 목사님들이 설교하는 모습을 제 아내가 볼 때 은근히 채널을 다른 쪽으로 돌릴 때가 있습니다. 아마 이것도 일종의 시기심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예전에는 아파트 주차장이나 길가에 세워 놓은 새차의 본넷트나 트렁크에다 줄을 찍찍 그어서 흠집을 내거나 타이어의 바람을 다 빼서 납작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것 역시 좋은 차를 차고 다니는 사람들에 대해서 시기심을 가진 사람들의 소행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극단적인 경우에 아무집이나 불을 지르는 '묻지마 방화' 역시 시기심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시기심'(envy)은 '행복, 성공, 명성 등 가치 있는 것을 누리고 있는 사람의 우월함에 대해 불쾌감과 악의를 느끼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이와 같이 시기심은 상대방이 가진 것을 나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에서 악의를 품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적 결핍감' 혹은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말도 있듯이 왜 저 사람은 저렇게 행복한데 나는 불행할까,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성공했는데 나는 실패할까,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유명한데 나는 아무것도 아닐까, 이러한 감정으로 배가 아픈 것이 시기심이라는 것이지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 속담이 꼭 이 시기심을 일컫는 것이지요. 시기심이 심해질 경우 방화, 약탈, 중상 모략, 헛소문, 집단 왕따, 쇼핑 중독 등의 사회적인 병리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연예인에 대한 전혀 근거 없는 악성루머나 로또 복권 당첨자가 죽었다고 헛소문을 퍼뜨리는 것도 모두 시기심 때문에 일어납니다. 또한 현대 쇼핑 광고 역시 상당수가 소비자들에게 시기심을 자극시켜 구매 충동을 자극시킨다는 연구 보고가 있습니다.

시기심과 달리 질투심은 삼각 관계에서부터 옵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사이에 두고 연적끼리 느끼는 감정이나 부모의 사랑을 놓고 형제 사이에 다투는 느낌, 혹은 남편을 사이에 두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신경전을 벌이는 것도 모두 질투심이라고 볼 수 있지요. 질투심은 대개 낮은 자존감 때문에 생긴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사랑받는 자로서의 자신감'이 서지 못할 때 질투심이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사랑하는 연인끼리 TV를 보다가 여자가 잘생긴 남자 탤런트를 칭찬할 때 남자가 토라져 다투는 경우, 남자가 그 연예인에 비해 자신감이 없어서 생기는 질투심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기심과 질투심이 다르지만 저는 질투심을 포함하는 보다 일반적인 용어 시기심을 제 설교에서 사용하고자 합니다.

<아론과 미리암, 모세에게 시기심을 느낀 까닭은?>
이제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모세의 형 아론과 누나 미리암이 모세를 시기했다가 혼쭐난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단연 이스라엘 민족의 최고의 영도자였습니다. 그러나 아론과 미리암도 만만치 않은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아론은 대제사장으로서 모세가 출애굽의 영도자로서 부르심을 받았을 때부터 함께 있었습니다(출 4: 14-17).

미리암 역시 여선지자로서 대단한 역할을 했습니다. 애굽을 성공적으로 탈출했을 때 모든 여인들을 인솔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습니다(출 15: 19-21). 더욱이 미리암 하면, 모세가 갓난 아이였을 때 바로의 딸, 즉 애굽 공주가 모세를 거두어 목숨을 보전하고 애굽 왕궁에서 자라나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출 2: 1-10). 그리하여 미 6: 4을 보면 아론과 미리암은 모세와 더불어 당당히 출애굽의 핵심 영도자 3인의 반열에 올라가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은 친남매지간이었는데도 시기심이 있었습니다. 본문 2절을 보세요.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모세만 영도자냐? 우리도 모세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 영도자가 아니냐?"는 불평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모세만 전세 놓은 것이 아니고 우리도 계시를 받았다"는 주장이지요. 한 마디로 모세의 영적인 권위에 정면 도전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바로 앞에 있는 1절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 즉 에티오피아 여인을 아내로 취해서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후문맥을 볼 때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을 가하게 된 계기는 모세의 결혼 사건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은 것이 왜 아론과 미리암의 비방거리가 되었던 것일까요?

어떤 학자들은 구스, 즉 에티오피아 여인의 검은 피부를 문제삼습니다.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때문에 두 사람이 모세를 비난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려 피부가 눈처럼 희게 되었다는 사실(10절)과 절묘하게 조화되기에 매우 흥미로운 주장입니다. 다시 말해 '구스 여인의 검은 피부'와 '미리암의 흰 피부'가 정확하게 대조된다는 것이지요! 미리암이 인종적인 편견으로 구스 여인의 검은 피부에 대해서 비판했더니 여기에 대한 징벌로서 자기 피부는 정반대로 하얗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현대의 유럽 사람들이 조장시킨 이데올로기이지 구약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아론과 미리암이 시기심을 가지고 모세의 권위에 도전한 것은 구스 여인의 검은 피부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한 가지 가능성은 모세의 아내가 된 구스 여인이 모세의 친형제 자매인 자기들보다 모세에게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까봐 비방했다고 보는 것이 더 그럴듯한 해석일 것입니다. 만일 이것도 아니라면 모세가 구스 여인과 결혼한 것을 비방한 것은 모세의 영적 권위를 흔들기 위한 하나의 구실이나 연막 작전으로 풀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중요한 이슈는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했기 때문에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아론과 미리암이 시기심 때문에 모세의 영적 권위에 도전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모세만이 하나님의 계시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유일무이한 채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들도 얼마든지 모세 못지 않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할 수 있는 채널이 된다는 주장입니다. 이와 같은 두 사람의 시기심의 배후에는 경쟁심이 숨어 있는데, 이 경쟁심이 한 편으로 열등감으로, 다른 한편으로 우월감으로 각각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시기심은 경쟁심 때문에 생깁니다. '선의의 경쟁심'이라는 말도 있듯이 때로 경쟁심이 쌍방 간에 발전과 성숙을 가져오는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경쟁심이 있는 아이가 샘이 많아서 공부도 더 잘 하는 경우이지요. 그러나 지나친 경쟁심은 상대방을 해칠 수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을 편치 않게 만듭니다. 행복에 장애가 됩니다. 그러므로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경쟁심을 버려야지만 우리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더욱이 무모한 경쟁심을 갖다 보면 나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을 만날 경우 열등감이 찾아와 자신감을 잃게 됩니다. 반면에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못한 사람을 만날 경우 우월감, 교만이 찾아옵니다. 이와 같이 시기심은 기본적으로 경쟁심 때문에 생기는 감정인데 한쪽 끝에는 열등감이 있고, 또 다른 한쪽 끝에는 우월감 혹은 교만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론과 미리암의 경우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두 사람은 같은 피붙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모세에게 묘한 경쟁심을 가진 나머지 모세보다 못한 게 없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한편으로 아무래도 하나님께서 모세를 자기들보다 더 중요하게 쓰신다는 열등감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감정인 동시에,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니 자기들이 모세보다 부족한 것도 없다는 교만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4-8절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삼인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삼인이 나아가매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서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여기에서 하나님은 모세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유일무이한 채널이 된다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하십니다. 보통 선지자들에게는 환상이나 꿈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간접적으로 전달하지만 모세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직접 얼굴을 맞대고 명백하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신 34: 10은 말씀합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하나님과 모세에게는 아주 남다른 친밀성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아론이나 미리암을 쓰시는 방법과 모세를 쓰시는 방법이 근본적으로 달랐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바로 여기에 시기심을 이기는 중요한 비결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시는 방법이 각각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쓰시는 방법은 아론과 미리암을 쓰시는 방법과 다릅니다. 쓰시는 방법이 다르다고 해서 모세가 아론이나 미리암보다 더 우월하다는 말이 아니라 은사와 직능이 각각 다를 뿐이므로 이러한 사실을 용납할 때 질서가 설 수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왜 목사님만 설교하고 장로님들만 공중 기도를 하느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데 은사와 기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가 높고 낮으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은사와 직능의 문제이므로 서로 겸허하게 용납할 때 우리는 시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기심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용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대방이 누리는 행복과 성공, 명성 등을 고까운 눈으로 보지말고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지 하면서, 있는 사실 그대로를 용납하면서 인정하면 내 마음이 편합니다. 부자는 돈 벌 이유가 있다고 인정하면 됩니다. 높은 자리 올라간 사람도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겠지 하고 용납하면 됩니다. 상대방과 나의 차이점을 부각시켜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상대방에게는 있는데 나에게는 없는 것만 찾아낼 필요가 없습니다. 나에게는 있지만 상대방에게 없는 것도 많습니다. 아론과 미리암도 마찬가지이지요. 모세가 누리지 못했던 것을 분명 두 사람이 누렸을 것입니다. 상대방을 자신과 비교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겸허하게 인정하십시오! 이것이 시기심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온유함으로 아론과 미리암의 시기심을 다룬 모세>
모세를 비방했던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려서 피부가 하얗게 되었습니다. 똑같이 비방했는데 왜 여자인 미리암만 벌을 받느냐는 문제는 참 흥미롭습니다. 아론보다 더 심한 시기심이 있었기 때문에? 여자이기 때문에?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아론 역시 문둥병에 걸릴 수 있었지만 미리암이 벌받는 모습을 보고서는 즉각 회개하고 용서를 빌었기 때문에 괜찮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린 모습을 본 아론이 다급해서 모세에게 나아가 빕니다. 11절을 보세요. "아론이 이에 모세에게 이르되 슬프다 내 주여 우리가 우매한 일을 하여 죄를 얻었으나 청컨대 그 허물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자기들이 모세보다 못한 것이 어디 있느냐며 질투를 부리던 아론이 이제 동생인 모세에게 "내 주여"라고 부르며 용서를 구합니다. 겸손해진 것이지요. 모세와 자기들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쓰시는 방법과 자기들을 쓰시는 방법이 다르다는 사실을 용납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저지른 어리석음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빕니다. '죽어서 모태에서 나온 자', 즉 유산된 아기와 같은 미리암을 다시 태어나게 해달라고 청원합니다. 모세보다 더 커지려고 시기심을 부렸던 미리암이 유산된 아기와 같이 작아졌음을 인정합니다.

이렇게 해서 모세가 미리암을 제발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중보 기도했더니 미리암의 병이 나았습니다. 한 때 모세를 구해주었던 누나 미리암을 동생인 모세가 구해준 것이지요. 이제 문둥병이 낫는 대신에 미리암은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7일 동안 진밖에 추방을 당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자기의 시기심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반성하는 시간을 부여했던 것이지요. 15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 못지 않게 자기들의 중요한 지도자 미리암이 진 밖으로 쫓겨나 근신하는 동안 그녀에 대한 존경과 예우로 7일 동안 행군을 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과 함께 미리암도 존경하고 사랑했던 것이지요.

여러분, 여기에서 중요한 교훈이 하나 더 있습니다. 누가 나를 시기하고 나에 대한 헛된 비방을 일삼고 집단 따돌림을 부추기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모세가 아론과 미리암을 다룬 방식을 눈여겨보십시오. 아론과 미리암이 시기심을 품고 모세를 비방했다는 2절 말씀 바로 뒤에 갑자기 뜬금없이 땅위에 사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모세가 단연 온유한 사람이라는 칭찬이 나옵니다.

바로 이겁니다! 온유한 사람 모세를 경쟁심과 시기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아론과 미리암과 날카롭게 대조시키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론과 미리암이 경쟁심과 시기심을 가지고 자기의 영적 권위에 도전했어도 모세는 온유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교통정리를 해주셨습니다. 자기 스스로 어떤 수단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대꾸나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알아서 모든 문제를 척척 해결해주셨고 손 볼 사람 손 봐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한 때 자기를 비방했고 자기를 시기했던 사람을 용서하고 치료해달라는 관용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시기하고 중상 모략할 때 그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모세처럼 온유해져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용서하면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최후 승자가 됩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 시기심의 문제를 잘 다루어서 다 행복해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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