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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을 주시옵소서 (대상 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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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대상 4 : 9 - 10
제 목 : 복을 주시옵소서

오늘 본문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여러분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한 책의 제목이 있을 줄로 압니다.  “야베스의 기도” 라는 책이지요.
한 때 우리 성도들에게, 신드롬과 같이 많이 읽혀진 책입니다.
브루스 윌킨슨이 쓴 책인데요, 첫 출판 이래로 5개월 만에 무려 33판을 찍었다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사람들이 이 책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보았습니다.

“야베스의 기도” 라고 하는 제목 때문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야베스라는 이름이, 성경에서도 그렇게 유명한 이름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사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야베스라고 하는 이름을 사람들이 잘 알지를 못했습니다.  성경을 통틀어서 오늘 본문인 역대상 4장, 딱 한 곳에서 이 이름이 소개가 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한 번 잠깐 나왔다가 사라진 사람의 이름 때문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 책으로 하여금,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만들었을까? 그 이유를 제가 짐작해 보건데, “야베스의 기도” 라는 제목아래 있는, 부제  때문이 아닌가?  책 제목 밑에 보면,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내 삶을, 기적으로 채우는 기도의 원리” 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아마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이 책을 사 보았구나 하는 생각을 가져 보았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은 은혜를 받았어요.  여러분도 그 책을 읽었을 때 은혜를 많이 받았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 책이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끼쳤지만, 우리가 그 책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내용에, 전적으로 공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자는 야베스의 기도를, 너무 지나치게 비약시키고 미화시켜서 해석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내용 외에, 더 확대되어진 지나친 해석은 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성경이 말하는 본질에서 비껴나간 다른 내용들을 이야기하고,  인위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절대 삼가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나 저자인 브루스 윌킨슨은, 이에 대해 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 있다는 것이지요. 
저자는 야베스란 인물을, 아주 대단한 영적인 인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성경을 보게 되면 야베스란 인물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아닌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일반 평신도와 같은, 그저 그만한 영성을  소유한 사람이, 야베스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야베스에 대해 좀더 알기를 원해서, 성경인물 사전을 살펴보았는데, 거기에도 이 이름이 없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살펴보아도, 책 제목에 나타난  야베스를 소개하는데 그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야베스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성경 역사에 이렇다할 업적을 남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베스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는 오래 전 이스라엘 족장 중,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이 속한 역대상을 보게 되면, 1장에서 9장까지 온통 이름들이 기록되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역대상에 나타난 인물들의 이름들은, 대대로 이어진 이스라엘 족장들의 명단입니다. 
그 명단 가운데, 이 야베스라고 하는 이름이 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왜 성경은 다른 이름에는 없는 언급을, 야베스에게는 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유명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그 반대의 의미로 야베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 열거 되어진 족장들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더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함을 입고, 더 존귀함을 입게 된 인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에 이렇게 특별히 언급되고  있다고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야베스가 한 기도의 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보십시오.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얼핏 보기에는  아주 영적이고 멋있는 기도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구두로 전해진 기도의  내용이, 성경에 문자로 기록되어질 때는, 문학적으로 얼마든지 아름답게 기록  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기도의 내용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드리는 기도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실제 기도의 내용을 보세요.  쉽게 풀이하면 어떤 내용입니까?
“내게 복을 더 주셔서 내가 경영하는 모든 것이 더 크고 넓어지게 해 주시고, 이후로도 도와주셔서 나로 큰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시고, 그래서 이후로도 근심하며 염려하는 일 없도록 도와주옵소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드리는 기도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어찌 보면 다분히 인간적이요, 현실적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도를 가지고 너무 영적으로 깊이 해석하려고 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의 기도를 주목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런 인간적이고, 소박한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 주셨다는 사실 때문 입니다.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얼마나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소박한 기도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절 끝에 뭐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그래서 우리에게 더 은혜가 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별로 보잘것없는  신앙을 가진 우리에게도, 이 말씀이 참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야베스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브루스 윌킨슨과 같이 야베스의 영성이 어떠한가?  여기에 우리가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경의 유명한 인물들이 아닌, 일반적인  신앙을 가진 야베스의 기도를, 참으로 소박하고 인간적인 마음으로 드린 그의 기도를, 외면치 아니하시고 응답해 주신, 놀라우신 은혜의 하나님께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이 본문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야베스의 무엇을 보고, 그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는가? 
여기에 대한 궁금증이 더하게 되는데요, 오늘 본문에 보면, 이에 대한 두 가지  이유를, 우리에게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그가 당한 인생의 어려운 형편을 돌아보시고,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야베스의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 9절 말씀에 나와 있는 대로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라고 하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고생해서 야베스를 낳았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진 야베스의 이름의 뜻은, “고통” 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야베스는 고통이라는 뜻의 이름인데, 왜 그의 어머니는 이런 이름을 지어 주었을까?  혹시 낳을 때 아이가 거꾸로 나왔는지, 아니면 아이를 낳기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지, 또는 아이를 임신하고 나서  집안에 감당할 수 없는 우환이 닥쳤는지, 정확한 사연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여튼 고생 중에 아이를 낳았다고 어머니가 생각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머니가 고생을 해서 낳았다고 해도, 자기 자식의 이름을  “고통” 이라고 짓는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한 마디로 “Mr. Pain” 이라고, 그 아들의 이름을 지어준 것입니다. 

여러분, 보통 자기 자식의 이름을 지을 때, 어떤 이름을 짓게 됩니까? 
이왕이면 예쁘고 멋있고, 고상한 의미가 있는 그런 이름을 짓게 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자식을 낳은 대부분의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가끔 있는데, 그런 때가 언제입니까?  낳은 자식에 대한 소망이 없을 때입니다.  자기 속으로 낳은 자식이지만, 별로 그 아이에 대한 미련이 없을 때, 이런 유의 이름을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룻기서를 보면, 룻의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이민 갔다가  아들 둘을 낳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아들들의 이름을 어떻게 지었습니까? 한 아이는 “말론” 이라고 지었고, 또 다른 아이는 “기룐” 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말론은 “허약하다.” 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룐은 “수척하다.” 뜻이 있습니다.  왜 나오미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짓는데, 이런 부정적인 뜻의 이름을 지었겠습니까?  자기 자식들에 대한 소망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두 아들이 어떻게 됩니까?  둘 다 결혼을 할 만큼 장성은 했지만  결혼을 해도 자식 하나 얻지를 못하고, 다 요절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부정적인 이름을 아이에게 지어 주었다는 것은, 어머니로부터  별로 기대를 받지 못하는, 관심 밖의 자녀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말론이나 기룐, 그리고 오늘 본문의 야베스도 마찬가집니다.  그들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벌써 불행한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이러한 정황을 이해하고, 야베스의 입장이 되어져서 그의 인생을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부모님도 자신을 부를 때마다 “Mr. Pain”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자신을 부를 때마다 “Mr. Pain”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런 소리를 계속해서 듣고 자란 그의 인생에 있어, 무슨 기쁨과  즐거움이 있었겠습니까?  그야말로 고통스러운 인생이었는 줄로 압니다.
여러분 “순풍산부인과” 라는 드라마를 혹시 기억하십니까? 거기에 나오는  아역 탈랜트 여자 아이가 하나 있는데요, 그 극중 이름이 미달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 아이가 이제는 어엿한 아가씨로 자랐는데, 그 드라마 출연 이후  이 “미달이” 라는 이름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컸던지, 자살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미달이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좀 모자란다는 뜻 아닙니까? 
함양 미달, 자격 미달, 지식 미달, 인격 미달, 수준 미달, 이런 온갖 구실을  다 붙여서 자신을 놀리는데, 자기도 죽고 싶고 놀리는 상대방도 죽이고 싶을 만큼 분노가 가득했다고, 얼마 전에 고백한 내용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 마음의 상처가 씻겨지질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간, 야베스의 인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삶은 자신의 이름대로, 온통 고통스럽고 힘이 든 일로 가득했을 줄로 압니다. 그러니 매사에 자신감이 없었을 것이고, 자기가 자신을 보아도 소망이 없는,  실망스러운 인생을 살아갔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해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베스의 인생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처럼 보통의 남들과 비교해 보아도, 훨씬 더 절망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던 야베스를, 하나님은 눈여겨 보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베스를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셨고, 그 긍휼의 마음으로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느 9 : 17절에 보면, “오직 주는 사유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저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야베스는 고통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지고 불행한 인생을 살아갔지만, 이스라엘의 역대 족장의 명단에 그 이름이 기록된 것을 보면, 그래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기 이전부터, 하나님은 그를 돌아보셨고, 그를 기억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신앙생활을 잘 해서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셨던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택한 자녀였기에, 그에게 긍휼을 베푸셨다는 사실입니다.  믿으십니까?

렘 1 : 5절에 보면,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야베스를 어머니의 복 중에 생기기 전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구별하여 열방의 선지자로, 이스라엘의 족장으로 세울 것을 작정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 속에 야베스는 태어나게 된 것이고, 또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스라엘의 족장으로 세움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베스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관심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이런 야베스를 하나님은 일생을 함께 하시며 돌아보셨고, 어려움 중에 있는 그의 형편을 헤아리시며 긍휼의 마음을 가지시고, 오늘 본문에서와 같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 49 : 15절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이 야베스를 향한 마음이었고, 또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모두를 향한 마음인 줄로 믿습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오늘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바 아버지 되십니다.  믿습니까?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의 형편도 돌아보시고 헤아리고 계십니다.
창 16 : 13절에 보면, 하갈이 하나님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라 표현을 했습니다.

비록 그녀의 인생이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나 황량한 광야로 내 몰렸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 아브라함의 씨를 잉태한 그녀를 외면치 않으시고, 그 광야에서 그녀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위로해 주셨습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인생이, 혹 야베스와 같은 고통 중에  있습니까?  하갈과 같은 고통 중에 있습니까?  그럴지라도 염려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지금도 지켜보고 계십니다.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지만, 야베스의 기도를 들어주셨던 하나님께서, 하갈을 만나 주시고 축복해 주셨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형편을 헤아리시며,  여러분의 기도도 들어 주시고, 여러분의 장래를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설교 중이지만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란, 찬양 아시지요?  그 찬양 이 시간 함께 불러 봅시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할렐루야!!! 

세상이 여러분의 인생을 고통이라 부를지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을 결코 고통 가운데 두지 아니하시고,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기 위해 반드시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하나님은 야베스의 무엇을 보고, 그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는가?
두 번째는, 야베스가 고통 가운데서도 인생을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보시고,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야베스는 고통스런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절대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무엇으로 나타났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지금 자신의 형편을 살펴보면, 이런 기도의 내용은 사실 불가능한 일들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축복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의 이제까지의 삶이 그것을 증명하지 않습니까?  지금도 그의 삶은 고통스러움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나를 도와 주셔서, 나로 하여금 지금 이 환난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의 기도를 보세요.  그냥 자신을 도와, 지금 이 환난을 벗어나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신의 인생에 복에 복을 더해 주셔서, 그냥 복도 아니고 복에 복을 더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지경을 넓혀 달라고, 그래서 내가 받은 복을 많은 사람들이 다 알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야베스의 기도의 내용을 들으면, 이 기도는 정말 황당한 내용의 기도  입니다.  지금 자신의 형편은 달세 방에서 근근히 살고 있는데, 앞으로 자신은 100평짜리 아파트에 살게 해달다고 기도하는 것과 같은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야베스의 기도가, 남들이 들으면 비웃을 기도의 내용이지만, 하나님이 들으실 때는, 흡족해 하실 만한 기도의 내용이었다는 겁니다. 

왜 하나님이 흡족해 하십니까?  먼저는 야베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믿음이 있음에 흡족해 하시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야베스가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신앙 안에서 이런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흡족해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와 같이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 꿈대로 반드시  축복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요셉을 향해 그의 형제들이 뭐라고 불렀습니까?  “꿈꾸는 자” 라고 불렀습니다. 요셉은 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기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형편이 어떠했습니까?  절망적이었지 않습니까? 
고통스럽지 않았습니까?  형제에게 버림받았습니다.  그래서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낮선 이방 땅 애굽에서 종노릇을 했습니다. 
그 뿐입니까?  또 모함까지 받아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지 않습니까?  끊임없이 반복되는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고통스러운 환경 가운데서도, 미래의 원대한 꿈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 꿈은 모든 이들로부터 절을 받는 존귀한 자리에 이르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결국 그 꿈을 이루지 않았습니까?  그는 그 꿈대로 애굽의 총리가 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절을 받는, 존귀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 9절 말씀에 보면,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했습니다. 
야베스에게는 다른 형제들이 있었는데,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야베스를 향한 존귀함에 대한 평가는 누가 내린 것입니까? 
야베스의 어머니이겠습니까?  자신이 고통 가운데 수고로이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야베스를 다른 형제들보다 더 존귀한 자라고 평가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 이름을, 고통의 뜻인 야베스라 하지 말고, 존귀함이란 뜻의 다른  이름으로 지었어야만 했습니다. 
창 35장에 보면, 라헬이 아들을 낳다가 죽게 되는데 자신이 숨을 거두면서 아이의 이름을 “베노니” 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슬픔의 아들”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인 야곱이, 바로 그 이름을 바꾸어 부르지 않습니까? 
뭐라고 부릅니까?  “베냐민”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믿을만한 아들” 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의 입장에서는 아이의 어머니가 부른 베노니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비록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목숨과 바꾼 아들이었지만, 아비인 야곱의 입장에서는 그 아이가 존귀한 자로 인식이 되어졌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즉시로, 베냐민이라고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존귀한 자라고 하는  평가는, 하나님이 야베스를 향한 평가였다는 것입니다.
속이는 자, 거짓말쟁이라는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고 하는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어 불러 주셨듯이, 하나님이 고통 가운데 천대받는  야베스를, 존귀한 자라 불러 주셨다는 것입니다. 

절망스런 인생이었지만, 여전히 고통스런 인생이었지만,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원대한 꿈을 그리며, 그 꿈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야베스를, 하나님은 존귀한 자라 불러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러한 꿈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성도들을 기뻐  하시고, 존귀한 자로 여기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 땅에 많은 교회들이 있고, 또 수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세상에서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만한 학력, 인정받을 만한 명예, 인정받을 만한 재물의 부요함, 이런 요건들을 갖추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세상적인 요건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보고 평가하십니까?  그 믿음을 보고 평가하십니다.  그 중심의 꿈의 크기를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하십니다.  믿습니까?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성도, 자신의 형편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장차 원대한 꿈을 이룰 것을 믿으며,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는  성도들을 하나님은 존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똑같이 믿어도, 기도하지 않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가 아닙니다.
또한 장래에 대한 꿈을 가지지 아니한 성도들도 존귀한 자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그냥 이름 없는 형제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존귀한 자로  인정을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야베스의 기도를 보면서, “나도 이런 기도를 좀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야베스가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라고, 굉장히 점잖은 표현을 썼지만, 원뜻은 “부르짖는다. 소리를 지른다.” 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만큼 간절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형편을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제발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제발 나를 축복해 주옵소서.  이것이 야베스의 기도인 것입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이런 야베스의 입장이 되어, 10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길 바랍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절박하고 긴박한 심정이, 그의 기도에 담겨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새롭게 느끼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야베스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통스런 현재의 인생이, 장래의 나를 지배하지 않게 하십시오.
장래의 원대한 꿈으로, 오히려 오늘 고통스런 현실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가시길 바랍니다.  현재의 고통스런 현실을, 하나님께로 끌고 와서 무릎 꿇게  만드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편이 되어 주셔서, 오늘의 고통을 옥에 가두어 버리고, 장래의 꿈과 함께 내일을 살아가게 만드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구약 시대에 무명한 자였던, 그냥 한번 성경에 이름이 기록되어진 정도의, 그것도 다른 족장들에 비해 훨씬 더  열악하고 볼품없는 인생을 살아갔던 야베스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께서,  오늘날 야베스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현대의 성도들,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주고 사신 왕 같은 제사장들인 저와 여러분의 기도를, 왜 안 들어 주시겠습니까? 

인생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자신의 인생을 결코 포기하지 마시고, 야베스와 같이 큰 꿈을 가지고, 입을 크게 벌려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야베스의 기도에 머무르지 말고, 한 단계 더 수준 높은  기도를 드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야베스가 지극히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소박한 소원을,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기도 드렸다면, 오늘 우리는 이러한 현실적인 축복을 통해, 영적인 비전을  이루어 갈 수 있기를 소원하며, 하나님께 기도드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합니까?  야베스와 같이 나의 지경을 넓혀 달라고 기도하되, 이제는 육신적인 지경이 아닌, 영적인 지경이 넓혀지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거룩한 비전을 가지고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백성들이 이 땅에 가득하게 될 수 있을까?  이런 거룩한 고민을 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더 많은 신앙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좀 더 힘 있게 전파할 수 있도록 나의 지경을 넓혀 주옵소서.”  이런 고귀하고 영원한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이 야베스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야베스는 결코 뛰어난 영성을 소유한 사람이 아닙니다.  소개되어지는 족장들 가운데 가장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인생을 살아갔던  사람입니다.  그 고통스런 인생 가운데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어 기도한 내용이, 오늘 이 야베스의 기도인 것입니다. 

이 야베스의 기도를 통해, 오늘 여러분의 현실 속에서 당하는 인생의 고통을  살피시며, 돌아보시고 도와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발견하시고,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야베스와 같이 여러분의 인생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신앙 안에서 하나님께 간구하게 될 때에, 여러분에게도 복에 복을 더해 주시고, 여러분의 지경을 넓혀 주시고, 모든 환난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셔서, 근심없는 평안한 은혜의 삶을 살아가게 만드실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충만한 축복으로 영적인 비전을 새롭게 하여, 남은 평생 정말 주를 위해 헌신하며 살아가시고, 하나님 앞에 더욱 더 존귀한 자로 인정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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