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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험을 넘어서 은혜의 지경에 이르름 (눅 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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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넘어서 은혜의 지경에 이르름 (눅 4:1-13) 
 
살다보면 우리 성도들의 삶에도 많은 어려움이 닥칩니다.
생활이 윤택함에도 불구하고 인간관계나 심적인 상황, 아니면 개인적인 이러저러한 문제로 마음에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일이 안될까?'
'왜 인간관계는 이렇게 꼬이지?
'나는 지금 아무런 어려움을 겪어야 할 이유가 없는데 왜 이렇게 어려움이 많을까?' 하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되는 일이 참 없구나!' 라고 생각도 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결국 우리 인생은 많은 문제들을 만나게 되고 그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이 우리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시험을 당할 때 ‘아이고, 힘들구나!’ 라고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이것을 잘 해결하면 이 좋은 은혜의 기회를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모습일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어려움과 저 좋은 때에 그것으로 인해서 망하게 되고,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것이 어렵고 힘든 때에 오히려 그것을 극복하여 최악의 상황을 최고의 때로 만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우리 한 번 다 같이 따라서 합시다.
“최악의 상황을 최고의 때로 만듭시다."
"가장 어렵고 힘든 때를 주님의 영광을 빛낼 최고의 은혜의 때로 만듭시다.”

그래요. 우리는 최악의 때를 최고의 때로 만들고 가장 힘들고 어려운 때를 주님의 영광을 빛낼 은혜의 때로 만들어 가는 은혜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내 자신의 내적 상태, 혹은 인간관계, 아니면 삶의 일과 상황과 장면 속에서 또는 심지어 주를 위해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장면 속에서 다가오는 다양한 종류의 어려움, 시험들을 극복하여 승리하는 은혜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성령이 충만하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가운데서도 사십 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장면과 그 시험을 극복하여 승리하는 장면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와 같은 장면을 보면 예수님도 사단에게 시험을 받는 모습을 보며 우리 인생에도 시험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능히 그 시험을 이기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에게 어려운 시험이 있을 수는 있으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으로 충분히 승리하여 또 새로운 은혜의 장면으로 진입하겠다는 생각을 또한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은 제일 먼저 첫 번째로 ‘왜 우리에게 시험이 다가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1절>과 <2절>을 보면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내용 세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에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에게 시험을 받았습니다. 성령 충만하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고 있는 동안에도 사단에게 시험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험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다만 그것을 유연히 극복한 사람들이 있고 그렇지 못하고 과도하게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시험이 없어서 무던한 것이 아니라 어떤 어려운 시험이 있어도 의연하게 이기는 사람과 간단한 시험만 있어도 크게 소동을 떠는 경우가 다를 뿐입니다.
시험은 반드시 우리가 약하고 어리석어서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획일적으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성령 충만했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동안에도 사단에게 시험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때라도 시험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더욱 더 겸손한 마음으로 준비하며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어려움이 있을 때 의연하고 가변성 있는 이와 같은 태도로 그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시험은 <야고보서 1:장 2,3절> 혹은 <12절>처럼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인내를 구비케 하시려고, 그래서 옳다 인정함을 받은 후에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려고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인내를 구비하여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하려고 우리에게 주시는 시험이니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야고보서 3장 13,14절>처럼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욕심에 미혹되어 욕심에 끌려 받는 시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욕심에 끌려 시험을 받는 경우 하나님에게 시험받는다 생각하지 말고 내 욕심에 끌려서 시험을 받는 것이니 오히려 이런 때는 내 자신을 더욱 더 돌보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바로 세워 주의 은혜의 자리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게 어떤 종류의 시험이 됐건, 어떤 종류의 미혹이 됐건, 우리들은 이 시험을 하나님의 은혜의 계기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는 인증의 기회가 되는 시험이든, 혹시 내 욕심의 미혹이든, 우리는 그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오히려 인정을 받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의 시대로 접어드는 믿음의 백성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예수님은 어떤 시험을 받으셨고, 어떻게 극복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매우 유명한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사단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았는데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세 가지 시험이었고 예수님은 믿음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 모든 어려운 시험을 능히 능가했던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시험이 음식으로 일컬어지는 기본적인 의식주의 시험, 즉 그 순간 가장 어렵다고 느껴졌던 시험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금식을 하셨으니 인성의 몸을 지닌 예수님도 몹시 주리고 시장하셨겠지요? 그때 사단이 나타나서 뭐라고 얘기 하냐면 "이 돌멩이로 떡을 만들어라."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있어서 음식이라는 것은 정말 참기 어려운 것입니다.
'음식이 뭐 대수야?' 라고 생각하시는 분 3일만 굶으세요. 그러면 말이 전혀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음식 별 것 아닌 것 아닙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십 일을 금식을 하셨으니 음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예수님에게 있어서 절실한 문제였겠습니까? 그런데 사단이 와서 예수님에게 돌멩이로 떡덩이를 만들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너 배고프지 않느냐? 너 능력 있지 않느냐? 그러면 한 번 돌멩이를 가지고 떡으로 만들어봐라.” 네 능력도 실험해보고 하나님이 너에게 떡을 주시는가도 실험해보고 이러저러한 모든 것을 복합적으로 예수님에게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시험에 걸렸으면 어떻게 됐죠?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가지고 자기 배고픈 것 하나 줄이기 위해서 돌멩이로 떡이나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분이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구속사와 관련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기적과 모든 행적들은 예수님의 구속적 사역을 위해서 필요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개인적인 편안함과 개인적인 여러 가지 일들을 위해서 이루어진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만약에 그렇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본인 개인의 안일을 위해서 사용한 것이 됐겠지요.

그런데 이와 같이 가장 기본적인 의, 식. 주, 또 뿐만 아니라 그 시험받을 당시에 가장 어려웠던 것, 가장 약점이 되는 것, 그것을 가지고 사단이 시험을 하게 되는 겁니다.
배가 고플 때는 음식으로 시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이 과도할 때는 물질로 시험이 올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넘어서는 인간관계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나 변덕이 있을 때는 인간관계로 시험이 올 것입니다.
정력을 주체치 못할 때는 정욕으로 시험이 올 겁니다.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하는 욕심과 탐욕으로 시험이 오게 될 겁니다.
결국 시험은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생활의 기본적인 부분으로 다가옵니다. 내게 시험이 자꾸 다가온다고 생각이 들면 그 시험이 내게 왜 자꾸 다가올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약해서, 이 부분이 약해서 그렇구나!
몸도 피곤하면 늘 약한 부분부터 터지고 병이 나게 됩니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험을 받는 것은 내가 가장 약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서 시험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부분에 자꾸 시험 받는다 생각하면, 이게 내 약점이구나!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그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더욱 더 기도하고 치유 받고 해결하고 강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가장 기본적인 욕구, 또 현재 당하고 있는 가장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셨을까요?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 가장 아픈 상황, 문제로 인하여 괴로워할 상황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상황에 지나치게 집착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능가하는 더 큰 관점에서 그 시험을 쉽게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내 손에 빵이 한 덩어리 들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내 앞에 있는 사람이 그 빵을 뺏으려고 갖은 계교를 써요. 거짓말하고 계략을 꾸미고 힘으로 위압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가지고 있어요. 나는 어떻게 해야 되죠? 이 빵을 지키려니까 상대방에 대해 계략에 넘어가지 않아야 되고, 상대방을 능가해야 되고, 넘어뜨려야 되고, 내가 모든 것을 방어해야 되요.

그런데 어느 날 마음이 조금 더 커졌어요. 상대방이 내 모든 것을 뺏으려고 해요. 빵 한 덩어리 뺏으려고 합니다. 갑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불쌍해졌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내 빵을 뺏으려고 하는가?
저것은 몸도 배고픈 것이지만 마음도 배고픈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드니까 가여워졌어요.
그래서 내 손에 든 빵을 뺏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안 뺏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배고프니? 내가 이것 줄게. 먹어. 나는 집에 가면 또 있어.' 이런 마음이 된다면 우리는 내게 있어서 어떤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바동댐보다 더 큰 문제로 말미암아, 더 큰 차원으로 올라감으로 말미암아 그 문제를 쉽게 훅하고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배가 고픈 예수님에게, 먹을 것을 가지고 시험하는 사단에게 무어라고 얘기하시냐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내가 먹는 것 때문에 고민하고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이 거기에 집착되어 있는 줄로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와 같은 내용을 보면 예수님은 사단이 시험을 건 것에 대해서 한층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서 그 시험을 쉽게 해결한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 앞에 장벽이 있을 때 그 장벽을 부수고 가는 방법도 있지만, 장벽보다 훨씬 큰 거인이 되어서 성큼 하고 장벽을 넘어가면 그건 더 이상 장벽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시장하신데 돌멩이로 떡을 만들라고 하니 예수님은 그 핵심을 파악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내가 돌멩이로 떡을 만들어야 될 이유가 있는가? 내가 지금 먹는 것에 주려있다고 해서 저 사단은 나를 먹는 것을 가지고 끌고 다니고 그 수준으로 나를 내리는데 나는 그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싸움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일일이 다 대응하겠습니까? 지나가는데 개가 짖어요. 그러면 화가 나서 나도 같이 멍멍 짖습니까? 개한테 얘기가 통하려면 짖어야 되잖아요.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뭐가 됩니까? 그때는 어떻게 생각해야 됩니까?
'너는 개니까 짖는구나! 너는 개니까 집을 지켜야 되고 낯선 사람 보면 짖어야 되니까 너는 네 임무수행을 참 잘하는구나! 훌륭한 개다.' 속으로 칭찬해주고, '그런데 나는 너와는 다르니까 내 일 볼 것 보고 가면 된다.' 하고 우리는 그냥 우리 할 일 하면 되는 겁니다.

사단이 우리에게 거는 시험 중에 가장 간편한 시험이 뭔지 압니까? 우리에게 본질외적인 것에 집중하게 해서 정작 본질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정작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닌데 거기에 집착하게 해서 힘을 쏟다보니까 우리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하다보면 힘이 없어서 그 일을 못합니다. 늘 말씀드리잖아요. 말꾼은 말을 하다 보니 힘이 없어서 일을 못해요. 그러나 일꾼을 일하다보니 힘이 없어서 말을 못해요.

여러분, 말 많이 하면서 일을 잘하는 사람은 거의 드물어요. 그리고 일을 잘하는 사람치고 말을 또 많이 하는 사람도 거의 드물어요.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원리예요. 한쪽에 힘을 쓰면 힘이 없어서 다른 것을 못하게 돼 있습니다. 본질외적인 것에 힘을 쓰게 되면 본질은 못 이루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사단은 우리에게 힘을 쓰게 하는데 엉뚱하게 본질에서 벗어난 일에 집착해서 힘을 쓰게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내가 배고프지만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은 먹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교회 오시는데 어떤 마음이 드셨습니까?
여러분 교회 오시는데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이렇게 얘기했어요. 옷도 잘 차려입고 성경도 들고 오는데 “교회 가지마!, 나하고 극장가. 어디 놀러가, 오늘 나하고 밥 먹으러 가.” 그러면서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여러분에게 아는데 그렇게 얘기했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거기에 영향을 받아서 극장갈까, 밥 먹으러 갈까, 어디 놀러갈까, 이렇게 생각하셨어요?
그것은 유혹도 아니죠?
여러분 주일 예배드리고 다 옷 차려 입고 나왔는데 그것은 유혹도 아니죠?
그럼 뭐라고 그래요? 뭐라고 그럽니까?
“아이 고맙습니다. 생각해 주셔서...... 안녕히 가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교회 오잖아요. 그것은 유혹도 아니에요. 시험도 아니에요.
예수님에게 있어서 이것은 시험도 아닙니다. 왜죠?
나는 먹는 것에 집착해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는 네가 하는 대로 끌려 다니는 것은 아니다 이거죠.

우리의 삶에도 누가 우리에게 시험을 걸고 여러 가지 우리에게 어려움을 걸어도 우리는 거기에 아무런 느낌과 감동이 없는 것입니다. 그건 그런 거고 나는 그냥 믿음 따라 가는 거고 하다보면 우리가 어느 날 의연한 은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생각하고 집착하고 그것 때문에 목을 걸고 있는 것에서 한 걸음 빠져나와 더 높은 수준에서 이러저러한 시험들에게 시달리지 않고 그 수준을 빠져나오는 겁니다.
자꾸 내가 시험이 든다면 이것은 내가 주님이 원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자꾸 시험에 드니 이게 내 약점인가보다 생각하고 나 자신을 점검하고 새로운 은혜의 지경으로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험이 들 때 그 시험에서 벗어나려고 옥닥복닥 하지 말고 그 시험의 수준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여러분들이 믿음의 훌쩍 비상하게 되면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로 그것은 시험도 아닌 것이 돼버립니다.

두 번째는 명예와 권세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모든 세상의 만물의 영광을 보여주며
"네가 만일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이 내 것이 되리라."
그 때 예수님은 어떻게 그 시험을 해결했죠?
“다만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만 섬기라고 얘기했습니다."
사단이 예수님에게 명예와 권세를 보여주며 자기에게 절하면 그 모든 것을 준다고 했습니다. 솔깃할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명예와 권세에 대한 욕망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사단은 예수님을 잘 파악하지 못한 겁니다.
예수님은 사단이 가지고 있는 명예와 권세 그 이상을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누리지 않아서 그렇지, 가지지 않아서 그 모든 것에 애틋해 하는 분은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유혹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만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명예와 권세에 대한 시험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높인다는 기본 사실에 충실하면 어려움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만을 높이는데 내가 너에게 절해서 저런 권세를 갖겠는가?
내가 하나님께 절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면 하나님은 저것보다 더 큰 것을 주시리라
'나는 하나님만 높인다.'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그와 같은 것이 무슨 시험이 되겠습니까? 억지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사는 것이 바른 방법입니다.
시험을 벗어나는 것은 억지로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본연의 믿음의 길을 의젓하게 가면 되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아깝다면 그것은 사랑이 식은 겁니다. 아까운 것이 아니라 사랑이 식은 겁니다.

요새 옆에 있는 사람에게 뭐 주는 것 아까워요? 그럼 사랑이 식은 겁니다. 주는 게 아까운 게 아니라. 그 순간부터 시험이 오는 겁니다.
주님께 대하여 사랑이 식어지면 우리 마음에는 주님께 대한 사랑이 식어짐으로 주님을 높이려는 마음이 사라짐으로 말미암아 그 순간부터 이러한 종류의 시험이 오는 겁니다.
주님을 높인다면 내게 무슨 다른 미혹거리가 있겠습니까?
내가 주를 위해서 봉사하는데 내가 칭찬을 못 받아도 내가 비난을 받아도 내가 평가를 제대로 못 받아도 나는 주님만을 높인 것으로 그것 자체만으로 만족하는데 내가 무슨 미혹이 있겠습니까? 주님에 대한 진정한 신뢰가 있다면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위해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서는 또 다른 면 한 가지를 생각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사단이 모든 것을 주지 않아도 그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는 분입니다. 천하만국보다 높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왜 사단에게 절을 해서 그 천하만국을 가져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물질, 권세, 명예, 세상에 대한 힘의 유혹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왜 유혹을 받습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주님은 모든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굳이 사단에게 절해서 그 능력을 가져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물질과 명예와 권세를 가지고 우리를 유혹할 때 잘 생각하셔야 됩니다.
내가 사단에게 절하지 않아도 내가 가지고 있는 주님이 주신 정상적인 능력가지고 그것 가지고 있을 수 있으면 불의한 방법에 타협하지 않아도 돼요. 나는 정상적으로 정직하게 노력해서 그것을 얻을 수 있는데 내가 왜 불의한 방법으로 타협해서 그것을 얻겠느냐하는 방법이 적어도 믿음의 사람에게 없겠습니까?
내주머니에 빵을 사먹을 돈이 두둑한데 왜 내가 빵을 훔치겠습니까?
주님의 정상적인 은혜와 능력과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의 역사를 이룰 수 있다면 우리는 굳이 사단에게 절하지 않아도 돼요.
내 주머니에 빵 사먹을 돈 두둑하면 빵을 안 훔쳐도 됩니다. 그래도 아주 악한 사람이나 잘못된 도덕관념이나 그와 같은 것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 있으면 그럴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은 정상이 아닙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이 문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정직하게 살려면 정직하게 살만한 기본적인 능력을 습득해 놔야 됩니다. 늘하말씀드리죠.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지혜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것은 때로 우리들에게 노력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이 말씀 늘 드리지요? 노력도 성령 충만 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성령 충만이 우리에게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가?
노력하는 삶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능력이 너무 마련되지 않다보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부패한 심정이 자꾸 우리를 살아가게 하려고 거짓말하게 합니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늘 불안하고 말도 번복하고 약속도 번복하고 지킴이 없는 겁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 스스로 약함 때문에 내가 원치 않는 시험에 드는 것 아닌가 생각하고 그 시험에 드는 부분을 강하게 해서 부단히 기도하고 노력해야 됩니다.

여러분, 빵을 훔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어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 내 마음에 빵을 훔치고 싶은데 빵을 훔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해야 되겠습니까? 더 근본적인 기도 있잖아요.
'하나님, 내가 빵을 훔치지 않아도 될 만큼 내가 일을 해서 돈을 벌게 하시고 그 돈을 가지고 빵을 살 수 있도록 내게 은혜와 능력을 주십시오.'

그렇게 되면 우리 빵을 훔칠 마음이 없어지잖아요.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기도가 있겠지요. '내가 지금 할 일이 없는데 내가 어떤 일도 아무리 거친 일도 내가 하나님 은혜가운데 어떤 일도 기쁨으로 받아들여 할 수 있도록 마음의 용기와 자신감을 주시고 하나님 앞에 열정을 더하여 주십시오.'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고 할 일을 찾고 내가 전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일을 능히 하고 그 일을 통해 더욱 귀한 역사를 이룰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십시오. 하는 것이 우리에게 선행되어야 될 정직한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이 정직히 살아도 하나님의 은혜와 뜻과 영광을 이룰 수 있으며 우리는 불의하게 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대로 산다는 것은 어느 날 문득 기도해서 한꺼번에 다 얻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기도해서 조금씩 조금씩 쌓아가는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부분이 의외로 너무나 많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사단에게 절하지 않아도 될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사단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사단에게 절하지 않아도 될 능력을 가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믿음 안에서 우리는 그것을 습득하기 위해서 성령 충만으로 노력하고, 성령 충만으로 지혜롭고, 성령 충만으로 근면하고, 성령 충만으로 주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부분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주의 영광으로 주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 믿음에 대한 시험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너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나님이 너를 지켜줄 줄 알아? 한 번 뛰어내려봐. 정말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시고 네가 아들이면 하나님이 너를 받아줘서 네가 떨어지지 않을 거야. 죽지 않을 거야." 이렇게 시험했어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요? 내가 뛰어내려볼게요. 그런 것이 아니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나는 하나님을 확실히 믿어. 그런데 너는 왜 하나님을 또 시험하고 믿지 못해서 확인을 받아야 하느냐? 만약에 확인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믿지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 확신이 있으면 과연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실까? 에 대한 재차 확신의 시험이나 증거가 필요 없습니다.
재차증거를 요구한다는 것은 불확실한 믿음이요, 불신앙입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나보다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니 어떤 뜻이 있겠지! 하고 믿음가운데 확신가지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그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수준에서 우리의 모든 것을 생각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내게 어떤 어려움이 닥쳤어요. 어떤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 정말 나를 돕는 겁니까?
하나님, 정말 나와 함께 하시는 겁니까? 라고 물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불신앙이잖아요.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감사합니다. 하나님, 내게 이런 어려움이 있는데 나는 지금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 그런데 이런 어려움이 있는데 하나님 내게 힘을 주셔서 이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 주십시오.' 하는 이게 정상적인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흔들립니까? 아니면 내가 흔들립니까?
대부분 우리는 내가 흔들리는데 하나님이 흔들린다고 생각해요.
하나님, 계십니까? 안 계십니까?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십니까? 안 하십니까?
하나님, 나를 돕는 겁니까? 안 돕는 겁니까?
하나님,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까? 아닙니까?
기껏 하나님의 뜻이라고 시작해 놓고는 또 어렵다고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 그럼 과거에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뭐예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일을 진행할 때 우리는 흔들리면 안 됩니다.

오늘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내가 왜 그에게 또 다시 증거를 받아야, 증명해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믿느냐? 난 이미 믿는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자꾸만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똑같은 내용에 대해서.
하나님 나를 사랑하세요?
'응, 사랑해.' 라고 확신 받았으면 그냥 그렇게 믿고 살면 됩니다.
하나님, 나를 사랑하세요?
그리고 가다가 또 안 믿어지면 또 '나를 사랑하세요?'
그건 하나님을 안 믿는 거란 말입니다.
한 번 믿었으면 끝까지 믿어야지, 한 번 끝까지 가 봐야 된다는 말입니다.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이지요.
여러분, 우리가 저기까지 가는데 왜 어려움이 없겠습니까?
비 오면 비 맞아야지요. 마른 옷 갈아입으면 되고 젖으면 말리면 되는 겁니다. 우리에게 비 온다고 성화돼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밥을 할 때도 전기밥솥에다가 쌀을 넣고, 물을 붓고, 뚜껑을 닫고, 코드를 꽂고, 스위치를 눌러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조바심을 치며 1분마다 '주여 믿습니다. 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또 열어보고, 또 그걸 못 참아서 또 열어보고, 그냥 처음에 1분마다 열어보다 또 못 참아서 '주여' 또 열어보고 그러니까 밥이 되겠어요?
한 번 "하나님, 믿습니다." 했으면 될 때까지 끝까지 믿어봐야죠.
대부분 우리는 너무너무 조바심치는 것 같아요. 그 조바심이 불신앙 아닙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셨으면 끝까지 주시겠지. 나를 구원해 주셨으면 은혜의 백성으로 나를 인도하시면 끝까지 가겠지. 가다 넘어지기도 하지. 넘어지면 하나님이 웃는 겁니까? 가다가 눈물 나는 일 있으면 하나님이 안 계시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끝까지 우리는 주님 앞에 가야 해요.
이기는 사람은 반드시 그 자리에서 합리하고 일어나고, 지는 사람은 언제나 이기지 못할 것 같으니까 포기하고 늘 그 자리를 떠나는 겁니다.
사실 내가 힘들면 상대도 힘든 겁니다.
여러분 상대가 있어서 어떤 경쟁을 하면 내가 힘들면 상대도 그 순간 아주 억지로 버티고 있는 겁니다. 내가 조금만 더 버티면 상대가 떨어져 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 순간을 못 참고 먼저 떨어져 나가는 거잖아요.
우리 인생에 있어서 어떤 일이든지 어려우면 그것만 넘기면 되는 겁니다. 그것만 넘기면 순탄해지는 것인데 그것을 마지막을 못 넘기잖아요.

우리는 마지막으로 어떤 시험이 있을 때 하나님을 시험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베짱이 강한 사람이 이긴다고 하는데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신을 믿고 자신의 삶을 믿고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의 말로 바꾸면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인도하셨으니 결국 나를 승리하게 하실 것이다.
어려움이 있건, 고통이 있건, 아픔이 있건, 지금 일이 안 되건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라는 믿음을 가지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늘 패배해서 도망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승리해서 그 다음 단계로 가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정말 사랑하시나 안 하시는가 내가 한 번 증명하고 싶습니다. 하고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세요.
그는 죽어요. 왜 죽죠? 불신앙 때문에 죽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 죽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 받아주지 않아서 죽는 것이 아니라 불신앙 때문에 죽는 거 아닙니까?
왜 하나님을 시험해요?
하나님이 나를 꼭 위에서 떨어지는 것을 받아줘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겁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을 시험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불신앙이죠.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이 말은 뭡니까?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내 마음에 확신이 되어 있으면 그냥 믿고 가는 겁니다.
내게 어떤 일을 하라고 하셨으면 가다 중간에 안 되도 끝까지 가는 겁니다.
끝까지 가는 겁니다.


마지막 세 번째 시험을 이긴 자에게 주시는 축복과 은혜입니다.

이제 마귀는 예수님을 떠났고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사역을 진행하십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자녀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시험을 이길 때 우리에게 새로운 길이 열려져요. 이 시험을 통과하니까 예수님은 공생애가 시작되었습니다.
시험을 당할 때 '어렵다, 안 어렵다.'하는 생각이 아니라 이 기회를 통해 새로운 내 삶의 장을 열어가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시험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시험이 다가와도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고 은혜의 말씀에 인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어진 시험을 능가하는 의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믿음의 삶을 살아도 언제든지 시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성령 충만해도,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도, 시험을 받았거든요.
그 때를 생각해서 더욱 더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시험이 와도 우리는 떨릴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의 모든 태도에서 보는 것은 뭐죠?
자신 있고 의연함이고 당당함이에요. 오히려 사단을 제어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 기회를 통해서 예수님은 인정을 받고 그것을 통해서 새로운 공생의 시대를 열어갔던 겁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여러분은 분명히 확신하셔도 됩니다.
'요것 넘으면 은혜가 기다린다.' 라는 겁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와 같이 인정받는 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최악의 어려움을 최고의 은혜로 만들어가는 성도됩시다."
주의 은혜가 우리 성도들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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