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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통과 고백 (욥 4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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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고백 (욥 42:1-17)

  욥기 42장에서 모든 논쟁이 마무리되고 평안과 축복이 찾아온다. 1장과 2장에서 우리는 한 사람에게 다가오는 엄청난 고난의 파도를 본다. 그리고 3장에서부터 40장까지에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큰 파도를 만나는 사람이 겪는 아픈 소리를 듣게 되고,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한 가운데서 이리 저리 떠밀리는 작은 배 한 척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42장에서 마침내 하나님은 고난당한 욥에게 축복을 주시는 것을 본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고난이 있는 욥기 1장을 읽으면서 이미 축복이 있는 42장에 가 있는 경우가 많다. 욥의 고난을 보면서도 42장의 축복을 미리 생각하고 고난을 고난으로 생각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이 있다. 욥기가 1장과 2장과 42장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이에 39장이라는 고난의 긴 과정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욥의 고난과 축복만을 우리들에게 가르치기를 원하셨다면 그 사이의 긴 성경을 기록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긴 과정이 있다. 그 사이에 아픔과 탄식과 슬픔과 눈물과 삶을 되돌아봄, 고백, 원망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은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셔서 기록하신 것은 아닐까?


2. 욥에게 허락하신 복 (욥기1장과 비교해 보라)

(10절)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12절)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13절)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1:2-3)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 나니라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처음과 마지막을 비교해 보면 그의 재산은 딱 두 배로 증가했다. 다만 자녀들은 10명 똑같다. 그러나 이 자녀들도 사실은 갑절의 축복을 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에 10명의 자녀들이 죽었지만 그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여전히 살아있다고 한다면 자녀들이 20명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욥의 갑절의 복을 언급하면서 “봐라. 욥이 갑절의 복을 받지 않았는가?” 라고 말하면서 욥의 고통을 쉽게 잊어버린다. 그러나 만약 욥이 받은 복이 물질적이고 인간적인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면 나는 욥이 별로 기쁘지 않았을 것 같다. (만약 내가 욥의 입장이라면) 내가 아무리 갑절의 복을 받았다고 해도 차라리 고난을 받지 않는 것을 선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욥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 내면의 아픔은 여전히 남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전에 번제를 드릴 때마다 기도했던 내 사랑하는 자녀 10명을 잃어버렸는데 양 몇 천 마리 더 받았다고 치유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럴 수가 없다.   

  어느 날 제 아내와 함께 드라마를 보았다. 드라마의 마지막에 주인공이 죽어가면서 자기 아내에게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다시 결혼할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저를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은 다시 태어나도 나랑 결혼할거야?” 그러자 저는 진짜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래, 나는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당신과 꼭 다시 결혼할거야.” 저는 그렇게 대답하면 칭찬을 들을 줄 알았는데 집 사람은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왜 자기는 자기 생각만 하는 거야? (나는 다른 사람과도 한 번 사귀어보고 결혼하고 싶다. 아마 이런 뜻?)”

  그런데 제가 왜 다시 태어나도 지금 아내와 다시 결혼하겠다고 했는지 아는가? 지금 아내가 예뻐서? 마음씨가 고와서? 남편에게 순종해서? 절대로...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만약 지금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서 결혼한다? 며칠은 좋겠지. 3일째부터는 머리 아파진다. 우리는 지금까지 12년을 함께 살아오면서 참고 인내하고 그냥 넘어가는 법을 배웠다. 지금이야 6개월에 한 번, 1년에 한 번 싸울까 말까 하는데 신혼 초에는 참 많이 싸웠다. 지금까지 이 모든 시행착오와 전쟁을 거쳐서 오늘의 평화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다시 새로운 사람하고 또 싸우고, 꼴고, 말도 안하고 하는 것을 다시 시작하라고? 나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지금 여기까지 오기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다시 그 싸움을 하라? 나는 도저히 못한다. 지금 이대로 사는 것이 가장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저는 다시 태어나도 온선화 씨와 다시 결혼한다고 했다. (이것도 저의 매우 이기적인 발상이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과정에 있다. 사람들은 결과를 따지려고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그것이 아프고 힘들고 어려워도 소중한 것은 그 과정이다. 

3. 욥의 회개

  욥은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보여주시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욥에게 하늘과 바다, 하나님이 만드신 동물들, 동물 중에서 가장 위엄 있고 놀랄만한 베헤못(하마)과 리워야단(악어)를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보여주시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것들을 창조할 수 있느냐? 너는 이것들을 다스릴 수 있느냐? 나는 이것들을 창조하였고 다스린다. 그러나 너는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만들지도 못하고 제어하지도 못한다.” 그렇게 하나님은 욥에게 가르쳐주신 것이다.
“너와 나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나는 전능자이지만 너는 피조물이다.”

  마침내 욥은 하나님께 회개한다. 그의 회개의 내용을 보자.

(1-3절)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 “지금까지 나는 의롭다고, 나는 지혜롭다고, 이 세상의 이치를 다 안다고 떠들었는데, 하늘, 바다, 동물에 대해서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이 모든 것의 겉모습이었고 일부분이었습니다. 나는 그 속을 몰랐어요. 그 이면을 몰랐고 감추어져 있는 부분이 너무 많았어요. 저의 고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겠죠. 모르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욥은 마침내 다음과 같이 고백하며 회개한다.

(5-6절)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이 고백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기쁘게 했을 것이다. 이 고백이야말로 그가 고난 후에 받게 된 갑절의 복보다 사실은 더 큰 복이다. 그는 이제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고, 믿음의 위치가 변화된다. 그의 믿음은 아주 높은 단계로 변화된다. 귀로만 청취하던 하나님을 이제는 눈으로 직접 뵈옵게 된다. 사도바울이 말한 것처럼 “지금까지는 우리가 희미하게 보았지만 천국에서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듯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라고 고백한 것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고난을 주실 때가 있다.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장 바라실까? 바로 욥의 고백이 아닐까? “고난당하기 전에는 주님을 귀로만 들었지만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뵙습니다. 나는 주님을 확실하게 보았고, 이제는 모든 것 속에서 주님을 바라봅니다.” 나는 욥이 받은 물질적인 갑절의 복보다 욥의 고백과 회개가 먼저 나온 것이 그런 이유라고 생각한다.


4. 욥의 세 친구들의 잘못과 용서

  하나님은 욥의 세친구들이 잘못했다고 말씀하시고, 욥이 그들을 위해서 번제를 드리고 기도할 때 그들의 죄가 용서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엘리후는 빠져있는데 엘리후가 다 맞는 말을 해서가 아니다. (34:36; 35:6-7)을 보라. 이 말은 엘리후가 무흠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이 욥의 세 친구들을 용서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의 구원과 용서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과 대가가 있는 것이요, 그 용서와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달려있음을 이중적으로 본다. 

  욥과 세 친구들의 논쟁, 그리고 하나님의 처분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나의 도그마 속에 다른 사람을 억지로 강제로 밀어 넣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이것이다. 내가 정하는 규범, 내가 정하는 틀을 다른 사람에게도 마구잡이로 적용하려고 한다. 그 틀에 맞으면 좋아하고 인정하고, 그 틀에 맞지 않으면 싫어하고 멀리한다. 하나님이 왜 욥의 세 친구들을 책망했는가? 그들은 자기의 경험, 지식, 생각, 믿음의 틀로 욥을 그 곳에 넣으려고 했다. 그 틀에 맞지 않으니까 욥을 정죄했다. 우리는 욥의 세 친구들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지 않는가?


5. 욥의 마지막

  성경은 욥기의 마지막을 이렇게 진술한다. (17절)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욥은 행복한 삶을 살다가 죽었다. 성경은 욥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 같지만, 제가 보기에 욥기는 마지막이 죽음이 아니라 소망으로 장식된다.

  욥이 죽었다. 그러나 우리는 욥기에서 소망에 대한 빛을 얼핏 본다. 욥이 그토록 고난을 당하면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소망했기 때문이다. 욥이 고난 후에 행복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늘 하늘에 소망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욥은 그렇게 죽었다. 그것은 마지막이었고, 그래서 슬픈 것이 아니라 “그렇게 소망하던 곳에서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뵈었기에 그는 참으로 행복하였다.”

욥기의 마지막은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욥기를 요약하는 듯한 (벧전5:6-11)에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명한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높이실 것을 믿으며 겸손해라.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려라. 믿음을 가지고 우는 사자와 같은 마귀를 대적해라. 고난이 아무리 길다고 할지라도 영원에 비하면 고난은 잠깐(순간)임을 기억해라. 어떤 순간에도 너의 모든 생각과 삶이 하나님께 아멘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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