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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엡 4: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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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에베소서 4:25-32

어떤 부잣집 주인이 회갑을 앞두고 어떤 짐승을 잡아서 잔치를 벌일까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짐승들을 집합시켜놓고 민주적이고 신사적으로 잔치에 죽어 줄 짐승을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가장 만만한 닭에게 말합니다."이번 잔치를 위해서 네가 죽어줘야겠다."그랬더니 닭이 말합니다."주인님을 위해서 죽는 것은 영광입니다만 내가 죽으면 새벽마다 깨워주는 것과 계란을 낳아서 주인님 영양을 보충해 주어야하는데 누가 하겠습니까?"주인이 생각해 보니 그럴만합니다. 그래서 개에게 말합니다."네가 죽어 주어 내 회갑을 즐겁게 하라."그러자 개가 말하기를"주인님! 내가 죽으면 도둑놈은 누가 지키며 애가 똥을 싸면 누가 청소합니까?"합니다. 주인이 생각해보니 개도 안 되겠다 싶어서 소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우 선생이 죽어줘야겠다."고 말하자"주인님, 나도 힘들어 죽고 싶습니다. 허구한 날 밭 갈고 논 갈고 쓰레질하고 죽도록 부려먹고 밥도 아니고 죽만 주니까 자존심이 상해서 죽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잘 됐습니다. 주인님 회갑 잔치에 좋은 일 하고 죽겠습니다."하고 항의 겸 순교를 자청하자 죽만 먹인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농사지을 일도 걱정이어서 주인의 마음이 약해집니다. 그래서 돼지에게 죽어 줄 것을 주문하고 혹시 죽지 못할 이유가 있으면 말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돼지는 아무 생각이 없는지 꿀꿀거리면서 먹기만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하는 일이라고는 없고 먹고 자고 싸고 하는 것밖에 떠오르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주인님, 물 끓이세요."하고는 장렬히 죽어갔다고 합니다.

우화와 같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웃을 수만은 없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사명에 살아야 하는 것과 자기의 육체만을 위하여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을 분류하는 가운데 규범적 입장에서 세 종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째는 육체적 본능과 정욕에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자연적인 본능대로 살아간다고 해서"자연인"이라고 합니다. 흔히 사람에게 속물이라는 표현을 하는데 바로 이런 사람들 즉,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이해하지도 못하고 다만 짐승처럼 자기 육신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을 속물이라고 합니다. 관심과 욕망은 오직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둘째는 자기의 이성과 지식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식을 위주로 살아가기 때문에 소위 지성인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언제나 자기가 기준이 되고 자기가 중심이 되어서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인정해 주면 기뻐하지만 인정받지 못할 땐 비참한 기분에 빠져버립니다. 이런 사람에게 구제하라면 내 놓을 돈이 없지만 체면이라고 하면 얼마든지 내 놓습니다. 자존심에 목숨 걸고 평생을 사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런가하면 셋째는 성령에 이끌리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삽니다. 자기의 생각이나 판단은 십자가 위에 못 박아 버리고 주님의 판단에 따라 성령께서 감화해 주시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는데 성령 주도적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바로 이런 성령주도적인 사람들입니다.

본래의 인간은 타락한 존재입니다. 성품이 타락 했고, 지식이 타락했고, 모든 계획, 모든 판단이 전적으로 타락되었고 완전히 타락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지식, 내 판단이라는 것이 온전치가 않습니다. 내 감정 그대로 내버려두면 큰일 납니다. 내 의지라는 것도 믿을 것이 못 됩니다. 그러니 인간의 이 잘못된 이성과 성품과 지식에 자유를 줘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은 망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누려야 할 자유가 따로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령에 매여 사는 자유입니다. 매여 사는 자유를 아십니까? 매여 있는 게 무슨 자유입니까? 하실지 모르지만 분명히 매여 사는 자유가 있습니다. 결혼을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결혼 하는데 무슨 특별한 자격이 있겠습니까마는 분명한 자격이 하나 있습니다. 결혼하기 전 이제까지는 내가 내 마음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입니다. 그러니 지금까지는 방종했을지라도 이제는 결혼을 해서 한 사람에게 예속되므로 오히려 자유를 느낄 수 있다면 그 사람만이 정말 결혼할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보세요. 이것을 자유로 여기지 못해서 가정으로부터 벗어나겠다고 하니까 술집이요, 질서로부터 벗어나겠다고 하니까 무질서가 남고, 폭력이 남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참된 매임에 참된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신앙적으로 해석해 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성령에 매일 때 그 속에 진정한 자유가 있는 것임을 알기 바랍니다. 이것이 좁은 길이지만 주님 말씀하시는 자유의 길입니다. 진리에 매이고, 은혜에 매이고, 사랑에 매여서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순간 그것이 자유입니다. 그래서 가장 행복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말씀과 성령에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성령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시골에서 농사지을 때에 가장 필요한 동물이 소입니다. 그런데 어린 송아지가 태어나서 처음 농사일에 이용하려면 애를 먹습니다. 송아지가 막 태어나면 코뚜레를 하지 않습니다. 아직 어려서 어미 곁을 떠나지 않고 고분고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 자라서 어미의 통제를 벗어나 제 맘대로 날뛸 때쯤이면 코뚜레를 꿰어서 농사일에 이용 합니다. 그런데 그때 주인이 고삐를 끄는 대로 따라가면 좋겠는데 끌려가지 않으려고 궁둥이를 쭉 빼고 버티다가 한 대 맞아서 펄쩍 뛰며 따라갑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결국은 끌려가야만 할 문제고 주인이 양보할 문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왕에 갈 길을 매 맞으며 끌려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실 당신이 택하셔서 한번 거듭난 사람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택함 받은 자는 절대로 사탄에게 양보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어쨌든 끝까지 데리고 가시려고 합니다. 이제 문제는 곱게 따라가느냐, 아니면 매 맞으면서 끌려가느냐하는 그것이 남아 있을 뿐 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늘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성령이 탄식하시고, 책망하시며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거역할 때에 성령께서는 근심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 속에 강하게 역사하셔서 나의 선택권이 없어져야합니다. 내 생각도, 내 의지도, 내 감정도 완전히 성령에 붙들리어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래 모습이요, 진실 된 모습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한번 거역하고 나면 또다시 거역하게 되고 계속적으로 거역하게 되면 마침내 내속에서 성령의 역사는 희미해지고 맙니다. 여기에서 한 발자국만 내디디면 무서운 함정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그런고로 성경은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때에 성령이 근심합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요약해보면 용서하지 않을 때에 성령이 근심하신다고 했습니다. 용서란 곧 화목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기도해도 화목하지 않고는 기쁨이 없습니다. 열심히 믿는다고 애써 왔어도 용서해야 할 사람을 요서하지 못하고는 내 마음에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화목 없이 불화 하는 거기에 성령의 슬퍼하심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해를 시키려고 하면"내가 먼저 그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 할 이유가 없다. 그 사람이 먼저 나에게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해도 될까 말까한데 죽어도 내가 먼저 사과도 용서도 할 수 없다."고 버팁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만 더 생각해 보면 용서하고 화목해야 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심 같이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돌이켜 우리의 경험한 바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그 기분대로 거친 말과 부도덕한 욕을 내 뱉었는데 조금만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면 내 마음이 먼저 아프고 슬퍼집니다. 이때가 성령이 근심하는 순간입니다. 그런고로 화가 치밀어 올라도 웬만하면 말조심해야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성령을 근심케 하지 않으려면 화를 내는 것과 그 분노를 품고 있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26절을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 만약의 경우 섭섭한 일이 있더라도 해 지기 전에 고쳐야합니다. 마음속에 꽁한 채로 어디 두고 보자는 심사로 몇 달씩 벼르고 사는 사람에게 성령이 함께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화가 날지라도 품지 말고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물질로 인해서 기쁜 것도 아니고 명예로 인해 기쁜 것도 아닙니다. 건강하고 병들고의 문제 때문에 기쁘고 슬프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쁨은 오직 하나입니다. 무엇입니까? 성령이 내 안에서 기뻐하실 때에 내가 기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실 때에 사도 바울은 죽도록 매를 맞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빌립보 감옥에서 감사의 찬송을 부를 수 있었다는 사실에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기쁨이요, 승리의 생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의지, 내 지식, 내 경험 모두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성령께서 나를 이끌어 가시도록 그리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나아가는 영주도적인 삶을 사십시오. 이제부터는 내 안에 계신 성령께 듣고 성령과 의논하며 전적으로 순종함으로 성령을 기쁘게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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